“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창12:8-11)
응답되지 않은 성경 최초 아브람의 기도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여호와가 지시한 가나안 땅에 들어왔으나 주민들의 경계와 냉대를 받아서 장막을 칠 장소를 얻지 못했습니다. 세겜에서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도 우상의 산당이 있는 곳인지라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목축하기에 적합하지 않아서 온전한 거주지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본문은 그 결과인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가다가 기근이 발생해 애굽으로 넘어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몇 가지 가능성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처음 벧엘 동쪽 산으로 옮길 때부터 그곳에 정착할 계획이 없었고 남방으로 가는 중간 기착지였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 산에서 잘 정착해보려고 기도하며 노력했으나 도저히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그곳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기록은 없으나 남방으로 내려가는 곳곳마다 하나님께 혹시 여기가 주님이 주신 정착지인지 물었으나 확답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가 도달한 남방은 팔레스타인과 애굽 사이의 네게브로 베두인이라는 소수 민족이 목축으로 살아가는 건조한 사막지역입니다. 그런 척박한 곳까지 가야 할 정도로 가나안 족속의 훼방이 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기다 남방에 이르자 심한 기근이 들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었습니다. 가나안 쪽으로 다시 돌아가 봐야 기근이라 도움을 얻기는커녕 갖고 있던 소유마저 빼앗길 위험이 있습니다. 거리상으로 가까운 데다 나일 강의 비옥한 삼각주로 고대의 식량창고라 할 수 있는 애굽에 잠시 거류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에게 또 다른 걱정거리가 생겼는데 너무 예쁜 아내 사래였습니다. 고대에는 힘 센 자들이 남의 아내가 탐나면 남편을 죽이고 탈취하는 경우가 예사였고 가인의 후예 라멕이 그 시조였습니다.(창4:19-24) 아브람은 애굽에서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선 치사하게 자기가 살려고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기로 했고 실제로 그 계략대로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애굽에 도착해서까지 여호와가 그의 기도에 응답한 일이 한 번도 없었고 오히려 나쁜 일만 연속되었다는 뜻입니다. 너무나 놀랍고 실망스럽게도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조상이 행한 최초의 기도가 응답이 안 되었습니다. 최고로 잘 봐주어야 계속해서 침묵하고 계셨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그 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당신께서 그렇게 이끌어오셨으면서도 말입니다. 그가 가장 절실할 때에 하나님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되었습니다. 아브람이 기도했던 의미가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단계까지는 아브람에게 두 가지 약속을 주시면서 당신의 뜻을 명확히 계시해주셨습니다. 아브람을 복의 근원으로 세워서 이름을 창대케 해주겠다는 것과 그의 후손에게는 가나안 땅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기록을 살펴보면 아브람은 결국에는 여러 이방족속들 앞에서 그렇게 되었고, 그의 자손도 사백 년 후에 창성케 되어서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약속하신 두 가지를 어김없이 신실하게 지켰습니다. 그럼 거꾸로 아브람이 행한 기도에 뭔가 부족한 점이 없었는지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아브람은 약속을 붙들고 기도했어야 했다.
지난주에 기도는 가장 먼저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가 형성된 후에 드려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이 나를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시며 당신의 거룩한 계획에 따라 내 인생을 이끌고 있음은 물론 기도할 때에 당신께서 바로 앞에서 전부 다 듣고 계신다는 확신을 갖고서 기도해야만 합니다.
본문에선 기도의 두 번째 핵심을 알 수 있는데 하나님이 주신 약속에 맞춰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을 네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럼 어떻게든 그 약속이 이뤄지게끔 그 땅에 머물러 정착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야 했고 기도한 대로 끝까지 머물러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사항은 하나님은 약속은 주셨지만 구체적인 실현 방식과 시기까지는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직통계시가 일반적이었던 때인데도 그랬습니다. 아브람은 어쩔 수 없이 눈에 보이는 형편대로 스스로 분별 판단 결정 시행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바로 응답주시지 않는가, 그럼 왜 이곳으로 오게 하셨는가, 자연스레 의심과 불평도 생겼을 것입니다.
온 우주에서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으로 오직 당신의 의지대로만 행하십니다. 세상만사를 당신께서 완벽하게 계획을 세우시고 당신만의 절대적 주권과 완벽한 섭리에 따라 통치하십니다. 그런 분이 약속하셨으니까 당연히 그분의 때와 방식으로만 성취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그런 통치에, 기도 응답을 포함하여,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그 시기를 앞당겨 달라고 재촉하거나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이뤄달라고 요구할 수 없으며 그런다고 해서 응답되지도 않습니다.
아브람은 후손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하란을 떠날 때인 75세에 받았습니다. 그 후 10년 정도 기다렸어도 성취는커녕 징조도 없자 충성된 종을 후사로 세우려 했으나 하나님은 네 몸에서 날 자가 후손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는 남성중심의 시대였던지라 아내 사래는 단순히 아브람의 몸에서만 나면 된다고 섣불리 판단했습니다. 자기 몸종인 하갈을 아브람의 후처로 들여보내어 86세 때에 이스마엘을 낳게 했으나 집안에 큰 분란만 생겼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은 긴 침묵에 들어갔다가 아브람이 99세 되자 비로소 후손을 주실 구체적인 시기와 방식을 계시해주었습니다. 일 년 후인 아브람의 나이 백세에 사래에게서 약속의 씨앗인 이삭이 태어날 것이라고 아이의 이름까지 지어주었습니다.(창17장) 하나님의 성취 시기는 약속을 주셨을 때부터 25년 후였고, 방식은 아브람과 사래를 함께 열국의 아비와 어미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25년 동안에 하나님은 아브람으로 하여금 마찬가지로 당신의 때와 방식에 따라 이런 저런 고난을 겪게 이끌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기 위해서 믿음이 자라가기에 가장 합당한 방식의 연단들을 가장 합당한 때에 맞춰서 거치게 한 것입니다. 아브람 쪽에선 온갖 시행착오를 겪었고 또 그 때마다 기도하는 내용이 바뀌었을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점점 올바르게 형성되어져 갔을 것입니다.
아브람의 믿음을 보길 원하시는 하나님
만약 하나님이 약속을 주시면서 구체적인 시기와 방식까지 미리 다 가르쳐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자는 손을 놓고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하나님이 주시는 열매를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약속 성취에 대한 소망을 키울 필요가 전혀 없고 온갖 연단이 닥쳐도 자신의 믿음은 물론 인격을 성숙시킬 수 있는 과정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어디에 어떤 보물이 숨겨져 있는지 다 가르쳐준 후에 단 약속한 기일에만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보물에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지켜준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물창고의 역할을 했고 신자는 때가 되어야 작동이 되는 열쇠를 맡은 것뿐입니다.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 아무런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가 생성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성취와 기도응답의 때와 방식을 미리 가르쳐주지 않는 데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미리 가르쳐주면 사실은 그대로 따라갈 신자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예수님이 베드로를 택할 때에 나중에 너는 거꾸로 십자가 처형을 당할 것이라고, 아니 그전에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도망치기 바쁠 것이라고 가르쳐주면 절대 따라나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랫동안 신자의 기도에 침묵하시는 것은 신자더러 아무리 주어진 여건과 일어나는 사건들이 그 약속과 상반되는 양상을 띨지라도 당신에 대한 소망을 절대로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므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인내 연단하면서 환난 중에도 그 소망으로 인해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연약한 인간적인 본성과 세상과 사탄의 훼방으로 종종 실망해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당신을 생각하고 당신만 전적으로 의지하며 다시 일어서서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언제 성취될지 전혀 알 수 없는 약속을 끝까지 붙들 만한 믿음이 좋은 자는 거의 없으며 살펴본 대로 아브람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아무리 넘어져도 오뚝이처럼 계속해서 다시 일어서는 믿음을 가장 귀하게 보십니다. 굳건한 믿음으로 뜨겁게 작정 금식 기도했더니 금방 응답되어서 매사가 술술 잘 풀리고 크게 형통했다는 간증을 접해도 박수치며 부러워하지 말고 잘 분별해서 들어야 합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 성취의 때와 방식이 자기가 바라던 내용과 다르다는 점을 몰랐던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에게 후손을 준다는 약속부터 오해했는데 그 뜻은 당연히 본처인 사래와의 사이에 태어날 자식입니다. 일부다처제는 라멕이 시작한 것으로 인간 죄악의 결과이지 하나님의 뜻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이루려고 첩을 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을 받을 때 사래는 폐경이 훨씬 지났을 것입니다. 그럼 비상한 때와 비상한 방식으로 주신다고 분별했어야 합니다. 물론 아브람도 처음에는 그렇게 이해했을 것이고 그래서 십년이나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비상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자 차츰 생각을 바꿔 먹은 것입니다. 당시는 종을 입양하는 일이 많으니까 충성된 종 엘리에셀을 세우려 했으나 하나님에 의해 거절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람에겐 믿음의 조상이 될 만한 의로운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 나이가 되도록 당시에는 아무 흠결이 되지 않았는데도 아들을 얻으려 첩을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설명 드린 대로 자기 몸에서만 나면 된다고 쉽게 판단해서 애굽에서 얻은 여종 하갈을 후처로 맞이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것입니다. 가뜩이나 애굽에서 아내에게 지은 죄가 크니까 그녀의 권유를 거절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정확히 알지 못한 아브람
아브람이 가나안을 벗어나 애굽으로 넘어가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가 처음 갈대아와 하란 땅을 떠날 때에 하나님께 받은 첫째 약속부터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1-3)
이 약속은 두 부분으로 나눠서 생각해야 합니다. 전반은 약속이 이뤄진 결과로 그의 이름이 창대케 되고 복이 되는 것입니다. 후반은 그 약속을 이뤄가는 하나님의 과정인데 아브람을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는 자를 저주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약속이 성취될 시기는 아직 알려주지 않았으나 그 방식은 이 때 이미 가르쳐주신 셈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보기에는 자식은 둘째 치고 자신의 이름이 창대케 되는 일이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고 세겜 땅은 그러기에 더더욱 적합하지 않다고 여긴 것입니다. 거기다 가나안 사람들이 자기를 경계 천대 멸시 즉, 저주하고 있습니다. 약속대로 하자면 하나님이 그들을 저주하고 그 땅에서 떵떵거리며 최소한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해주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임의로 판단해 남방으로 점점 옮긴 것입니다.
그 약속이 아브람더러 현실적으로 안전하고 풍요로운 거주지에서 높은 생활수준에서 살게 해주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명했지만 다시 후손이 번창하고 이름이 창대해지니까 외적 상황에는 변화가 없이 동일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사람이 살아가는 현실적 방식과 수준은 어디나 비슷합니다. 갈대아 우르나 가나안이나 우상을 숭배하기도 마찬가지였고 당시는 세상 어디에 가나 참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아브람으로선 하나님이 약속하신 열매보다 그것이 이뤄지는 과정에 주목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르쳐준 방식대로 따라가면 약속된 결과는 자연히 얻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그를 축복하거나 저주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답은 아주 간단한데 아브람이 먼저 그들을 축복해주면 됩니다. 단 하나님의 지시대로 갈대아를 완전히 떠나온 자로서 세상 사람과는 다른 모습으로 축복해야 합니다.
여호와만 주인으로 모시는 자로서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해주고 축복해야 합니다. 나아가 그분만 따르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면서 사람들로 자신들의 방탕하고 음란한 삶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우상 신이 가짜이자 실존하지도 않는 허상임을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런 아브람의 삶에 감동을 받아서 그렇게 살고 싶어 하는 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를 축복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하나님이 하필이면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에 이르렀을 때에 그 땅을 주신다고 다시 강조하셨다는 점에 반드시 주목했어야 했습니다. 아브람이 복의 근원으로 이방인을 섬기며 여호와를 증거 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선 당신의 약속이 가장 잘 이뤄질 수 있는 장소로 그를 인도하신 것입니다. 우상의 도성 한 복판에 장차 창대케 된 그의 후손에 의해 세워질 하나님 나라의 초석으로 그를 세우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면서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고 하셨는데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보호해주겠다는 뜻입니다. 그럼 당신의 대적의 소굴인 상수리나무 아래로 보냈다면 당연히 최고로 강력한 권능으로 붙들어주실 것입니다. 아브람으로선 비록 그 땅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고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도 그 땅을 후손에게 물려주겠다는 소망을 놓지 말고 계속 기도하며 인내했어야 했습니다.
자기 소원과 계획을 기도할지라도
기도의 두 번째 핵심인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해야 하는 원리를 오늘날의 신자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선 신약시대 성도에겐 아브람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직통으로 계시 받는 일은 당신만의 특별한 계획이 있는 비상한 경우를 빼고는 거의 없습니다. 주로 신자가 개인적으로 소망 혹은 계획하는 일이나 현재 당면한 고난에서 구원해달라는 기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가장 먼저 자신의 소망과 계획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부터 따져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하는 기도라 해도 때와 방식은 그분께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일치한다면 그분이 신자에게 계획하신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분이 계획하신 일이면 당연히 그분의 때와 방식도 따로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도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기도하면서 내 때와 방식대로 고집하는데 마치 자동판매기에 동전만 넣으면 원하는 물건이 나오길 바라는 식입니다. 하나님은 자동판매기이고 신자의 기도는 동전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아무리 기도를 뜨겁게 해도 하나님과 친밀한 개인적인 관계는 생성되지 않습니다.
아브람의 경우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당신만의 특별한 의도가 없는 한에는 당신의 계획에 대한 계시를 점진적으로 조금씩만 밝혀주십니다. 신자도 기도를 계속하면서 영적 분별력과 지혜를 키워나가야만 그분의 뜻을 조금씩 더 넓게 알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에서 천재나 영웅이 없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실제로 원죄로 타락한 인간의 본성상 그렇게 되지도 않습니다. 베드로에게 십자가 처형을 미리 말해주지 않았지만 삼년의 가르침과 훈련을 받게 했고 처참한 실패를 거쳐 성령의 능력으로 붙들어주었기에 기꺼이 순교를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란 그래서 일차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하나님 그분을 천천히 알아나가는 영적인 씨름입니다. 아무리 그분이 계속 침묵 외면하는 것 같아도 그분의 약속은 반드시 이뤄집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기도했다면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심지어 기도자가 죽은 후에 응답되는 일도 있습니다. 기도응답이 오래 지체되어서 하나님의 뜻인지 의심이 간다면 성령님의 인도를 구하면 그분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도 주십니다.
우리는 대체로 위급한 일이 생겨야만 기도하니까 응답도 급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고집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곧바로 의심 불평부터 하기 바쁩니다. 엄밀히 따지면 급한 일은 신자가 해결해야 하고 먼 장래에 하나님이 이루실 큰일을 두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컨대 당장 아파트 월세를 낼 돈이 모자라면 기도하기 이전에 막노동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하고 단순히 그런 일자리를 구해서 잘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만 하면 됩니다. 대신에 수십 년 후에 자신과 자식이 함께 하나님의 헌신된 종으로 서게 해달라는 기도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송하지만 많은 신자들이 조금만 힘든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무작정 떼쓰듯이 자기 사정을 쏟아놓기만 합니다. 예수 믿은 본전을 찾겠다는 뜻인지, 예수 믿어도 계속 고생만 하니까 분풀이라도 하겠다는 것인지, 내가 이 바쁜 중에 이렇게 짬을 내어서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기도하는 정성을 알아달라는 것인지, 그래서 마치 외상값 청구하듯이 당연히 응답되어야 한다고 우기는 것인지, 솔직히 분간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열매인 복만 받으려들지 그분과 계속해서 오래 동안 영적인 씨름을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기도가 그런 과정이라는 사실도 알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라.
물론 교회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라는 가르침을 받기는 했습니다. 그래서 주로 기도할 때 붙드는 말씀이 몇 가지로 정해져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을 들자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9;23)입니다. 문제는 이 구절만 따로 떼어내어서 문자적으로만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소원을 간절히 기도해도 응답이 안 되니까 왜 약속의 말씀대로 해주지 않느냐고 불평불만을 쏟아냅니다.
이는 약속의 말씀이 아닙니다. 어떤 부모가 귀신 들린 아이를 데려와 주님께 할 수 있거든 도와달라고 요청하니까 예수님이 곧바로 고쳐주면서 당신에 대해 깨우쳐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겐 할 수 없는 일이 없다고 즉, 당신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능히 못 할 일이 하나도 없다면 그 안에는 당신이 고쳐주지 않겠다고 마음먹을 가능성도 포함시켜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신자들이 너무 좋아하는 또 다른 말씀은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7)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이 아니고 욥의 친구 발닷이 욥이 당한 고난의 원인에 대해 자기 의견을 제시한 것입니다. 욥이 죄를 지어서 그런 벌을 받았으니까 믿음이 좋아져 죄를 짓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 보상으로 창대케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다 그대로 되려면 신자들은 전부 백만장자나 큰 권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닐 뿐 아니라 문맥의 흐름 상 욥을 조롱하는 의미였습니다.
반면에 성령에 영감을 받아 하나님의 진리를 대언한 바울은 어떻게 말합니까?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1:26) 또 그렇게 하는 이유는 세상의 미련한 자 비천한 자들로 세상에서 지혜가 있다는 자나 고귀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이를 하나님 앞에 똑같이 겸손하게 만들고 나아가 당신께서도 세상 기준으로 사람을 절대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자를 향한 첫째 뜻은 세상의 죄와 사망의 권세 앞에 당당하고도 거룩하게 서게 하는 것이지 현실적으로 축복해서 사람들 위에 신자를 높이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여호와가 세겜에서 아브람에게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겠다고 재확인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동일하신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상황에서 동일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정작 신자가 붙들고 기도해야 할 말씀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을 위로한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지만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겠다는 약속과 함께 주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스승과 이별하고 이 땅에 자기들만 있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는 아브람을 상수리나무 아래 세겜 땅에 홀로 보내면서 네가 당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축복하면 네 이름이 창대케 해준다고 약속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사방에 주님의 대적들로 가득 찬 곳에서 외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만을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이 살았던 삶대로 따라가면서 천국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주님처럼 핍박을 당하게 되겠지만 주님이 십자가에서 사탄에게 완전히 승리하셨고 성령이 곧바로 오셔서 모든 신자에게 주님처럼 세상을 이길 권능을 입혀줄 것입니다.
신자는 사탄에 미혹되어 죄의 노예였던 자리에서 예수님의 은혜 가운데 불려 나왔지만 현실적으로는 여전히 가는 곳마다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세겜 땅입니다. 신자가 서있는 곳이 바로 땅 끝이며 복음을 전해야 할 선교지입니다. 그럼 세상 사람들로 자기들이 사는 방식이 틀렸다는 인식이 들도록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방식으로 생명의 빛을 비춰내야 합니다. 어둠을 더 좋아하는 그들은 어차피 신자를 핍박하겠지만 신자 본인은 주님을 따라가지 않으면 최종 도착지가 달라질 것입니다. 행위구원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열매는 하나님이 책임질 것이므로 신자는 그 과정을 그분의 방식대로 준행만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너무 거창하고 경건하게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세겜 땅에 보내어진 아브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라곤 혼자뿐이었으므로 그 믿음을 끝까지 유지하기만 해도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도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가장 강조한 말씀이 끝까지 참으라는 것이었지 않습니까?
믿음이란 지금 내가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언제 어디서나 주변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여서 그들로부터도 동일한 축복을 돌려받는 일을 잘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아브람에게 그랬듯이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신자의 이름을 창대케 해줄 것입니다.
202/1/9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박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