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공동체의 영: 살아 움직이는 교회
1. 하나님 선교와 교회의 생명
55. 교회의 생명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은 사랑이라"(요일 4:8). 선교는 창조와 구속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Caritas Christi urget nos). 이러한 친교(koinonia)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운동에 함께 참여하는 형제와 자매들을 향해 우리의 마음과 삶을 열게 한다(고후 5:18-21).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교회는 모든 사람을 위한 좋은 소식이 되도록 부름 받는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넘쳐흐르는 사랑의 나눔은 모든 선교와 전도의 근원이다.
56. 성령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에서 모든 문화와 상황을 위하여 온 인류에게 주시는 영감 있는 선물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성령의 강력한 임재는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의 충만함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하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에 내주(內住) 하시면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계시하시고 교회의 성도들에게 권능을 주시어 그러한 목적들이 실현되도록 참여하게 하신다.
57. 교회는 역사 안에서 항상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신학적, 경험적으로, 선교를 위해 탄생되었다. 교회와 선교는 그 기원과 목적에 있어서 서로 분리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선교적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다. 교회와 선교의 관계는 매우 친숙한데 그것은 교회에게 선교하도록 권능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또한 교회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상에 파송 하시는 것과 동시에 교회 안에 성령을 불어넣으셨다(요 20:19-23). 그러므로 마치 불이 타면서 존재하는 것처럼 교회는 선교함으로써 존재한다. 만일 교회가 선교하지 않으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58. 하나님 선교에서 출발하면 것은 "아래로부터"(from below)의 교회론적 접근으로 인도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교회가 선교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교가 교회를 소유하는 것이다. 선교는 교회 확장 계획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구현하는 교회의 계획이다. 이러한 이해로부터, 교회의 사도성에 대해 역동적인 이해가 나온다. 사도성은 시대를 통해 교회의 신앙을 보호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사도직에 참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교회들은 가장 우선적으로 선교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
2. 하나님 선교와 교회 일치
59.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믿음을 삶으로 나타내는 것은 선교에 참여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속해 있는 형제와 자매가 된다(히 10:25). 교회는 모든 사람을 환영하는 포용적인 공동체가 되도록 부름 받았다. 교회는 말씀과 행동을 통해 그리고 그 존재 안에 다가오는 하나님 통치의 비전을 미리 맛보고 증언한다. 교회는 성도들의 함께 모임(coming together)이고 평화 가운데 흩어짐(going forth)이다.
60. 선교와 일치는 실천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서로에게 속한다. 이런 관점에서 1961년 국제선교협의회(IMC)와 세계교회협의회(WCC)가 통합된 것은 중요한 발판이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경험은 선교와 교회가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을 믿도록 격려한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이 아직 완전히 성취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교회가 진정으로 선교적이 되도록 새롭게 시도하면서 우리의 세기(世紀)에 이 여정을 지속해 가야 한다.
61. 오늘날 교회는 여러 면에서 아직도 하나님 선교의 적절한 구현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때때로 선교와 교회 분열의식은 여전히 팽배하다. 선교에서 온전하고 진실한 일치가 부족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 선교의 성취에 대한 진정성과 신뢰성이 손상되고 있다. 주님은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기도하셨다(요 17:21). 이처럼 선교와 일치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교회와 일치에 대한 성찰을 더 광범위한 일치이해로, 즉 인류의 일치 및 하나님의 피조세계의 전체의 우주적 일치로 개방할 필요가 있다.
62. 자유시장경제의 지나치게 경쟁적인 환경은 불행하게도 일부 교회들과 파라처치(para-church) 운동들이 남을 이기고 "승리자"가 되기를 추구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이런 환경은 심지어 기존교회 교인들에게 소속교파를 바꾸라고 설득하는 공격적인 전술을 채택하게 할 수도 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양적 성장을 이루겠다는 태도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필요한 타인 존중의 태도와 양립될 수 없다. 예수님은 권력과 돈이 아니라 자기 비움(kenosis)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셨다. 선교에 대한 이러한 겸손한 이해는 우리의 선교 방법을 형성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의 본질이며 진수가 된다. 교회는 하나님 선교의 종이지 주인이 아니다. 선교적 교회는 자기 비움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63. 기독교 공동체는 다양성 속에서, 서로 존중하고 책임지는 전도형태를 포함하여, 동반자 관계와 협력 정신을 가지고 공동 증언하는 방법을 확인하고 실천하도록 요구 받는다. 공동 증언이란 "비록 분열되었지만, 교회들이 공동의 노력을 통해, 그들이 어떤 진리와 생명의 거룩한 은총을 함께 나누고 경험하였는지 표명함으로써 함께 전달" 하는 것이다.
64. 또한 교회의 선교적 본성은 교회와 파라처지 조직이 더 친밀하게 관계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IMC와 WCC의 통합은 교회일치와 선교에 대해 사고하는 새로운 틀을 제공했다. 일치에 대한 논의는 주로 제도적인 문제에 관계되지만 선교 단체들은 선교에 유연성이 있고 자체 결정구조를 갖는다. 파라처치 운동은 교회의 중심 진리를 통해서 책임성과 방향성을 찾을 수 있는 반면, 파라처치 조직은 교회가 그들의 역동적인 사도적 특성을 잊지 않도록 도울 수 있다.
65. 협력과 일치에 솔선을 보였던 1910년 에든버러 선교대회의 직접적인 계승자인 세계선교와전도위원회(CWME)는 교회와 선교 단체들이 선교 안에 일치(unity in mission)를 표현하고 강화시키는 방법을 찾도록 도와주는 구조이다. WCC의 필수적인 부분이 된 이후, CWME는 세계도처의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개신교, 복음주의, 오순절, 토착교회들로부터 나오는 선교와 일치에 대한 새로운 이해들과 만날 수 있었다. 특별히 WCC의 상황은 로마가톨릭교회와 가까운 실무관계를 촉진시켰다. 복음주의자들과의 협력증진은, 특히 로잔 세계복음화운동(LMWE)과 세계복음주의연맹(WEA)과의 관계는 일치 안에 선교(mission in unity)라는 주제에 대해 에큐메니칼 신학적 성찰을 풍요롭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우리는 전 교회가 전 복음을 전 세계에 증거 해야 한다는 공동의 관심을 함께 가지고 있다.
66. 일치의 영이신 성령은 또한 다양성 속에 일치를 알리기 위해 주도적이고 건설적으로 사람들과 교회들을 연합시키신다. 성령은 포용적이고 상호책임적인 공동체를 성장시키도록 하기 위해 안전하고 적극적인 육성환경(nurturing environment)에서 서로의 차이를 탐구하도록, 사람들에게 필요한 역동적 상황과 자원을 제공하신다.
3. 교회에 선교하는 권능을 주시는 하나님
67. 하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에 내주하시며 성도들에게 권능을 주신다. 그래서 선교는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의 요구에 근거한 절박한 내적 충동이 되고(고전 9:16), 심지어 그리스도 안에 진실한 삶을 평가하는 시험이며 척도가 되기에, 예수께서 주신 생명의 충만함을 나누기 위해 이웃을 초대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선교에 참여하는 일은 특별한 개인들이나 전문단체들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에게 당연한 것이다.
68. 인류와 모든 피조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풍부한 사랑을 전하는 기독교 메시지를 신뢰성 있게 하는 것은 가능한 곳에서 일치된 소리를 내고, 공동으로 증언하고, 우리 안에 있는 소망(벧전 3:15)을 공동으로 증언하고 설명하는 우리의 능력이다. 그래서 교회는 풍부한 공동선언을 발표해왔는데, 그 선언들의 일부는 연합교회(uniting) 혹은 연합된 교회(united)들로부터, 또한 일부는 교회 간 대화 모임들을 통해 생산되었는데 하나의 살아있는 치유와 화해의 유기체 안에서 모든 기독교인들의 일치 회복을 추구하였다. 성령의 사역을 치유와 화해 안에서 재발견하는 일은 오늘날 선교신학의 중심이 되었으며 중요한 에큐메니칼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69. 교회들 사이에 "가시적" 일치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 구조 차원에서만 일치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선교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 선교의 대의에 도움이 되는 것을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선교 안에 일치는 교회의 가시적 일치를 위한 근거가 되며 교회 직제를 위해서도 의미가 있다. 일치를 성취하려는 시도는 정의를 찾으라는 성경적 요구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정의를 실천해야 하는 우리의 소명은 때로는 침묵을 강요하고 억압하는 거짓된 일치를 타파하는데 관련된다. 진실한 일치는 항상 다른 사람에 대한 포용성과 존경을 수반한다.
70. 오늘날 광범위한 규모의 세계적인 이민 현상은 교회가 아주 실천적인 방법으로 일치에 헌신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는 말씀을 듣고 있다. 교회는 이민 공동체를 위한 피난처가 될 수 있고, 또한 문화 간의 교류를 위해 의도적인 중심지가 될 수도 있다. 교회는 인종과 문화의 장벽을 넘어서 하나님 선교를 섬기는 존재가 되도록 부름 받았고, 다양성 속에서 구체적으로 공동 증언을 하는 다문화 목회와 선교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은 이민정책에 대해 정의를 옹호하고, 외국인혐오증과 인종차별에 대해 저항하는 것을 포함한다. 여성, 어린이, 미등록노동자는 모든 상황의 이주민들 사이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다. 유감스럽게도 여성들은 또한 자주 새로운 이민정책의 첨단에 서게 된다.
71. 하나님의 환대는 문화적으로 유력한 집단을 주인으로 이주민과 소수자를 손님으로 보는 우리의 이원적 개념을 극복할 것을 요청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환대 안에서 하나님은 주인이고 우리는 모두 겸손하게 우애를 가지고 하나님 선교에 참여하도록 성령의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다.
4. 지역교회: 새로운 주도자
72. 하나의 교회(the one Church) 안에서 성령의 일치를 소중하게 여겨야 하지만, 각 지역교회가 자신들의 구체적인 정황에 응답하기 위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방법들을 존중하는 것도 중요하다. 오늘날 변화된 세계는 지역교회가 새로운 주도권을 발휘 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세속화되고 있는 북반구에서 "신수도원주의"(new monasticism), "이머징 교회"(emerging church), "프레쉬 익스프레션"(fresh expression)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상황적 선교(contextual mission)가 교회를 재정의하고 재활성화 하고 있다. 상황에 알맞게 교회를 개척하는 것은 특별히 젊은 사람들에게 적절하다. 북반구에 있는 일부 교회들은 대중술집(pubs), 커피숍, 개조된 영화관에서 모이고 있다. 온라인을 교회의 삶에 끌어들이는 것은 비선형적(non-linear), 시각적, 실험적 방식으로 생각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이 되고 있다.
73.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같이 지역교회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내는 공동체를 조직할 특권을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교인되기를 수용하거나 거절 하는 것은 지역교회에 대한 그들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경험과 연관이 있다. 그러한 경험은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변혁의 동인(動因)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지역 교회가 지속적으로 갱신되고 선교의 성령에 의해 감동을 받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지역교회는 선교의 전선이며 주요 대리자이다.
74. 예배와 성례전은 변혁적 영성과 선교를 교육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상황적 성경읽기는 지역교회가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전하는 메신저와 증인이 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원이다. 우리가 공동체 안의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 선교를 삶으로 실천할 때에 만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가 온전한 정직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지역교회는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서 편안한 자리를 벗어나야하고 경계선을 넘어가야 한다.
75. 오늘날 지역교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문화와 인종의 경계를 넘도록 강조하고, 문화적 차이를 성령의 선물로 확신시키는데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교회는 이민을 문제로 인식하지 말고 오히려 자신을 새롭게 재발견하기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받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민은 지역 차원에서 문화간 교회와 다문화교회를 설립하는 기회를 창조하기 위한 기회를 준다. 모든 교회는 다양한 문화공동체들이 함께 모이는 공간을 제공하고, 우리 시대에 상황에 알맞게 문화간 선교를 할 수 있는 재미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76. 지역교회는 또한 과거에는 결코 불가능했던 세계적 연결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다. 지리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매우 다른 상황에 거하는 교회들 사이에 영감(靈感) 있고 변혁적인 연결들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위험이 없지는 않지만 혁신적인 가능성을 제공한다. 점점 대중화 되는 단기 "선교여행"은 전 세계의 서로 다른 지역에 있는 교회들 사이에 동반자 관계를 발전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으나 일부의 경우에 가난한 지역교회들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거나 현지 교회들을 전부 무시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여행은 위험과 염려가 있기만 다양한 문화적, 사회경제적 정황에 노출되는 기회는 그 여행자가 자국 공동체로 돌아갔을 때 장기 사역을 결정하도록 인도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각 지체 안에 전 교회(the whole church)를 건설하는 영적 은사들을 행사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고전 12-14).
77. 정의를 옹호하는 일은 국회나 중앙 관청들만의 특권이 아니라 지역교회가 참여해야 하는 증언의 한 형태이다. 예를 들면, WCC의 폭력극복 10년(WCC Decade to Overcome Violence, 2001-2011)은 국제 에큐메니칼 평화회담(International Ecumenical Peace Convocation)에서 "교회는 인권, 젠더 정의, 기후 정의, 그리고 일치와 평화를 악용할 수도 있고 진척시킬 수도 있는 일상의 선택을 분별하는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탄원으로 결론을 맺었다.
일상생활에서 교회가 제공하는 기초 원리들은 지역교회들이 정의와 평화를 위해 투쟁하는데 명분과 동기를 제공한다.
78. 교회는 각 지역의 정치적, 사회경제적 정황 가운데서 봉사(diakonia)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것을 증언하면서,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지닌 신앙과 소망을 삶으로 사는 것이다. 교회는 종 되신 주님의 길을 따르면서 봉사를 통해 하나님 선교에 참여한다. 교회는 봉사의 힘이 지배의 힘보다 우월함을 나타내고, 생명 가능성을 육성하며, 하나님 통치의 약속을 설명하는 봉사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변혁하는 은총을 증언하는 봉사공동체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79. 교회가 자기 정체성을 선교적 공동체로서 더 깊게 발견할 때, 자신의 외적인 특성이 전도 안에 나타나게 된다.
Ⅳ. 오순절의 성령: 모든 사람을 위한 좋은 소식
1. 전도의 소명
80. 증언(martyria)은 전 세계 안에 있는 전 인류에게 전 복음을 전한다는 구체적인 전도의 모양을 갖는다. 그 목적은 세계구원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이다. 전도는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은총에 대한 한계를 설정하지 않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고난, 그리고 부활의 중심성을 명백하고 확실하게 하는 선교활동이다. 전도는 아직 복음을 접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나누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의 삶을 경험 하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81. "전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마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흘러넘치는 것이다." 오순절에 제자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사역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행 2:4, 4:20). 전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과 제자도를 향해 개인적 회심으로 초대" 하는 것을 포함해서 선교의 다른 차원들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명백하고 의도적으로 복음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성령은 어떤 사람들을 전도자로 부르시지만(엡 4:11), 우리 모두는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설명하도록 부름 받았다(벧전 3:15). 개인들뿐만이 아니라 전 교회가 함께 전도하도록 부름 받았다(막 16:15, 벧전 2:9).
82. 오늘날 세계는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과 신념에 대해 과도한 확신을 가진 단체들이 공동체를 치유하고 양육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파괴하고 잔인하게 대하는 특징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개종(proselytism)은 전도를 실행하는 합법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성령은 사람들의 설교와 복음의 증언과 동역하시기를 선택하시지만(참조. 롬10:14-15, 고후 4: 2-6), 새 삶을 창조하고 거듭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이 하신다(요 3:5-8, 살전 1:4-6). 우리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폭력적 수단이나 권력의 남용으로 개종을 강요하였기 때문에 때때로 전도가 왜곡되고 그 신뢰성을 잃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일부 상황에서, 정체성이 억압된 비인간적 조건에서 살아가는 약자들을 그대로 유지시키려는 지배 집단의 의도에 따라 강제 개종에 대한 고발이 일어나기도 한다.
83. 전도는 우리의 믿음과 확신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며, 그들이 자신들의 종교 전통을 고수하던 하지 않던 간에 그들을 제자의 길로 초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눔은 신뢰와 겸손으로 세상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는 표현으로서 발생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면서 끈기 있게 지속적으로 그들과 복음을 나누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 혹은 사람에 대한 사랑의 정직성에 대해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우리의 동료 인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에 대해 나누고 소개하는 것보다 우리가 줄 수 있는 더 큰 선물은 없다.
84. 전도는 회개와 믿음과 세례로 인도한다. 죄와 악에 직면하여 진리를 듣는 것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반응을 요구한다(요 4:28-29, 참조. 막 10:22). 전도는 회심을 일으키며 태도와 우선권과 목적에 변화를 수반한다. 그것은 잃어버린 자의 구원, 병든 자의 치료, 억압된 자와 온 피조물의 해방을 가져온다.
85. "전도"는 선교의 다른 차원들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과 제자도를 향한 개인적 회심으로 초대"하는 것을 포함해서 명백하고 의도적으로 복음을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 서로 다른 교회들 안에는 성령께서 우리의 상황에서 전도하도록 우리는 부르시는 방법에 대해 다양한 이해가 있다. 일부 사람들에게 전도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개인적 회심으로 이끄는 것에 관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전도는 억압받는 사람과 연대하고, 그들과 함께 함으로 기독교적 증언을 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전도란 하나님 선교의 한 구성요소로 생각한다. 서로 다른 기독교 전통들은 선교와 전도의 양상에 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leitourgia)가 증언(martyria), 봉사(diakonia), 친교(koinonia)와 엉켜있는 지역교회의 삶 속에 근거를 둔 전도에 대해 이해하도록 성령이 우리 모두를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2.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전도하기
86. 전도는 말과 행동으로 좋은 소식을 나누는 것이다. 언어적 선포 혹은 복음설교(kerygma)를 통한 전도는 완전한 성경적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의 언행이 일치하지 않으면 우리의 전도는 신뢰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말의 선포와 가시적인 행동이 결합되어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증언하게 된다. 전도는 일치와 밀접하게 관계된다. 즉 서로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선포하는 복음의 증명이다(요 13:34-35). 반면 분열은 복음에 방해가 된다(고전 1장).
87. 생명의 충만함을 가져오기 위해 성령의 동역(同役)을 받아 자신의 지역 현장에서 일하는 기독교인들의 충성되고 겸손한 섬김의 본보기들이 역사 속에 있고 현재에도 있다. 또한 자신의 문화적 상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선교사로서 살면서 사역했던 많은 기독교인들은 겸손과 상호성, 그리고 존중의 태도를 가지고 일을 했다. 하나님의 성령도 또한 변혁을 가져오기 위해 이러한 공동체들 안에서 활동하셨다.
88. 유감스럽게도 이따금 복음을 성육화하기 보다 배반하는 방식으로 전도가 실천되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회개가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선교하는 일은 다른 사람의 존엄성과 권리를 긍정하는 것이 수반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섬기도록 부름 받았고(참조. 막 10:45, 마 25:45) 선전이나 어떤 형태의 미끼사용도 없어야 한다. 현대처럼 개인주의화된 상황에서는 전도를 사고파는 "상품"과 혼동할 가능성이 있고, 어떤 모습의 기독교인의 삶을 택할 것인지 자신이 결정하려 한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한 예수의 복음이 자본주의적 용어들 아래 소비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거절하신다. 또한 성령은 개인적 차원에서 우리에게 회심과 변혁을 일으키고 만인을 위한 생명의 충만함을 선포하도록 인도하신다.
89. 진정한 전도는 모든 사람에 대한 겸손과 존중에 근거하고 있으며 대화 속에서 잘 이루어진다. 전도는 말씀과 행위 속에서 복음의 메시지 및 치유와 화해의 메시지를 촉진 시킨다. "연대 없는 전도는 없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의 메시지를 나누지 않는 기독교 연대는 없다." 그러므로 전도는 개인 간 관계성과 공동체 관계성을 건설하도록 고무시킨다. 그러한 진정한 관계성은 지역 신앙공동체 안에서 가장 잘 육성되어지고, 지역의 문화적 맥락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기독교인의 증언은 말뿐만이 아니라 현존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신앙을 공개적으로 진술하면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는 단순하게 복음을 따라 사는 것이 아마도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90. 서로 다른 종교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 공동체들 사이에 그리고 기독교 증언에 관한 다른 해석들 사이에 긴장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진정한 전도는 아래의 진술처럼 항상 생명을 긍정하는 가치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 (세계교회협의회, 교황청종교간대화평의회, 세계복음주의연맹의) 공동성명서 "다 종교적 세계 안에서 기독교인의 증언: 행동지침"(Christian Witness in a Multi-Religious World: Recommendations for Conduct)의 진술:
a. 심리적 혹은 사회적인 권력 남용을 포함해서 종교적 권위와 세속적 권위에 의해 가해지는 모든 형태의 폭력과 차별과 억압을 거부한다.
b. 보복이나 협박에 대한 어떠한 두려움 없이 신앙을 준수하고 고백할 수 있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다. 정의와 평화와 모든 사람을 위한 공동의 선을 증진하는 일에 서로 서로 존중하며 연대한다.
c. 모든 사람들과 인류문화에 대해 존중한다. 반면, 우리의 문화 안에 가부장제도, 인종차별제도, 카스트제도 등등 복음에 도전을 받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분별한다.
d. 거짓증언을 포기하고 서로 존중하는 가운데 이해하기 위해 들어야 한다.
e. 개인과 공동체가 결심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분별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한다.
f. 더 깊은 서로 간의 이해와 화해, 공동선을 위한 협력을 증진하기 위해 다른 종교인들 혹은 종교 없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정립한다.
91.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도전하는 개인주의, 세속주의, 물질주의 그리고 다른 이념들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복음은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지만, 기만과 부정의와 억압을 일삼는 세력들에게는 나쁜 소식이다. 전도는 또한, 그 영향력의 범위만큼, 소망과 사랑 속에서 권력을 향하여 진리를 선포하는 예언자적 사명이다(행 26:25, 골 1:5, 엡 4:15). 복음은 해방적이고 변혁적이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정의롭고 포용적인 공동체들을 창설한다는 전망을 가지고 사회 변화에 관계해야 한다.
92. 악과 부정의에 대항하고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때때로 억압과 폭력과 만나게 되며, 그 결과 고난과 박해, 심지어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진정한 전도는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비우신(빌 2:5-11)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연약하게 되는 것과 관계된다. 로마의 박해 아래서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 되었던 것처럼 오늘날 정의와 공의를 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강력한 증언이 된다. 예수는 주님을 따르라는 부름과 영원한 구원을 자기부인(self-denial)과 연결시키셨다(막 8:34-38).
3. 전도, 종교 간의 대화와 기독교인의 현존
93. 오늘날 세계의 다원성과 복잡성 속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많은 신앙과 이념과 신념을 만난다. 우리는 생명의 성령이 기쁨과 생명의 충만함을 주신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은 생명을 긍정하는 모든 문화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성령은 신비로운 방법으로 일하시기에 우리는 다른 신앙전통들 안의 성령의 활동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다양한 영성들 안에 고유한 가치와 지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선교는 "다른 사람"을 선교에 동반자로 만들며, 선교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는다.
94. 대화는 생명과 피조물의 통전성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공동의 삶과 목표를 확증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대화란 종교적 차원에서 볼 때 우리보다 앞서서 구체적인 삶의 정황 속에서 그들과 함께 해 오신 하나님을 만난다는 기대와 더불어 시작할 때만 가능하다. 하나님은 우리 보다 앞서 그곳에 계시기에(행 17장),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을 모셔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곳에 계신 하나님을 증언하는 것이다. 대화는 서로가 개방적이고, 참을성 있고, 존중하는 태도로 테이블로 나올 수 있게 진솔한 만남을 제공한다.
95. 전도와 대화는 별개이지만 서로 관계가 있다.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살아있는 지식을 알게 되기를 소망하고 기도하지만, 전도가 대화의 목적은 아니다. 그렇지만 대화는 "서로 간의 책임 있는 만남"이기 때문에, 대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는 것은 정당하다. 더 나아가 진정한 전도는 삶과 행동의 대화라는 맥락에서 이루어지며, "대화의 정신" 즉 "존중과 우정의 태도"에서 이루어진다. 전도는 우리의 가장 깊은 확신을 선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 다른 사람에 의해 도전을 받고 경험을 넓히는 것까지 포함한다(행 10장).
96. 특히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대화는 다종교적 상황 안에서 뿐만 아니라 특정 종교 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에서도 중요하다. 소수집단의 권리와 종교적 자유를 보호해서 모든 사람이 공동의 선에 기여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종교의 자유는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창조되었다 사실에 근거한(창 1:26) 인간존엄성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 모든 종교와 신앙의 신봉자들은 동일한 권리와 책임을 가진다.
4. 전도와 문화
97. 복음은 특별한 문화적, 정치적, 종교적 실제들과 관계하면서 서로 다른 상황들 안에 뿌리를 내린다. 복음이 그러한 다양한 실제들 안에 뿌리를 내리려면, 그 사람들과 문화적 · 상징적 삶의 세계를 존중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이미 그곳에 어떻게 현존하시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이미 어디에서 활동하고 계시는지 분별하기 위해서 복음은 더 넓은 상황에 참여하고 그 상황과 대화하면서 시작해야 한다.
98. 선교역사에서 복음과 식민지 권력의 결합은 서구형 기독교를 표준으로 삼아서 다른 사람들의 복음에 대한 충성을 판단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만들었다. 경제적 힘이나 문화적 패권을 즐기는 사람들의 전도는 복음을 왜곡시키는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난한 사람, 소유를 빼앗긴 사람, 소수자들과 협력해야 하며 그들의 신학적 자원과 비전을 통해 다듬어져야 한다.
99. 획일성을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창조된 개인의 유일성을 손상시킨다. 바벨은 획일성을 강요하려고 시도하였던 반면에 오순절 날에 제자들의 설교는 개인의 특수성과 공동체의 정체성이 손상되지 않고 존중되는 일치를 가져왔다. 그들은 각기 자신의 방언으로 복음을 들었다.
100. 예수님은 우리에게 더 큰 비전을 보여 주시고 "땅 끝까지" 가서 각자의 시대와 장소에서 하나님의 정의∙자유·평화의 증인이 되라고 성령으로 권능을 주심으로, 우리 자신의 왕국, 우리 자신의 해방, 우리 자신의 독립(행 1:6)이라는 좁은 관심으로부터 우리를 불러내신다. 우리의 사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제도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지시하는 것이고, 자신의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돌보는 것이다(참조. 빌 2:3-4). 우리는 특정 지배문화의 관점을 가지고 성경의 복잡성을 장악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문화의 다양성은 우리의 믿음과 서로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하는 성령의 선물이다. 가령, 다문화공동체들이 함께 예배드리는 문화간(intercultural) 신앙공동체는 다양한 문화들이 진정하게 서로 연결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고 문화가 복음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장소이다. 동시에 복음은 문화우월주의를 비판한다. 그러므로 "복음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그 자체로 진실해야 하고 사람들의 문화 속에 성육화(肉化)하거나 뿌리를 내려야 한다 … 우리는 어떤 곳에서 복음이 문화에 도전을 주는지, 문화를 승인하는지, 문화를 변혁하는지 더 잘 분별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성령의 통찰을 추구해야 한다." 생명을 위하여.
생명의 잔치: 결론적 확언
101. 우리는 모든 인류와 피조물에게 특별히 생명의 충만함을 고대하는 억압받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사명을 주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종이다. 선교는 그리스도에 대한 공동의 증언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눅 14:15)로 부르는 초대이다. 교회의 선교는 그 연회를 준비하고 모든 사람들을 생명의 잔치로 초대하는 것이다. 그 잔치는 풍요로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흘러넘치는 창조와 풍작에 대한 경축이다. 그것은 선교의 목적인 온 피조물의 해방과 화해에 대한 징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의 선교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가지고 이 성명서의 처음에 제시했던 질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확언한다.
102. 우리는 하나님 선교의 목적은 생명의 충만함(요 10:10)이며 그것이 선교를 분별하는 기준임을 확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만한 생명이 있는 곳에서, 특히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해방, 깨어진 공동체의 치유와 화해, 그리고 온 피조물의 회복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분별 하도록 부름 받는다.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 안에서 생명을 긍정하는 영들을 식별하고 생명을 긍정하고 보존하는 선교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과 연대하도록 도전받고 있다. 우리는 또한 죽음의 세력들과 생명에 대한 거부가 경험되는 곳에서 악령들을 분별하고 대적한다.
103. 우리는 선교가 하나님의 창조행위로부터 시작되고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능력을 통한 재창조 가운데 지속됨을 확언한다. 오순절에 불의 혀와 같이 부어진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교회로 만드신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계셨던 성령은 우리를 감동시켜 자기를 비우고 십자가를 지는 삶의 스타일로 이끄시며, 우리가 말씀과 행동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하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의 사람들과 동행하신다. 진리의 성령은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이끄시고 권능을 주사 귀신의 권세를 물리치고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게 하신다. 구속 받은 공동체인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생명수를 나누며 온 피조물을 치유하고, 화해시키고, 갱신하기 위하여 일치의 영을 찾는다.
104. 우리는 영성이 선교적 활동력의 근원이며 성령 안에서 선교는 변혁적임을 확언한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와 영성과 피조물 사이에 우리의 관점을 재정위(定位) 하려고 노력한다. 예전과 예배로부터 흘러나오는 선교 영성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 그리고 우리와 더 넓은 피조물을 재연결 한다. 우리가 선교에 참여하는 것, 우리의 존재가 창조세계 안에 있는 것, 그리고 우리가 성령의 삶을 사는 것은 상호 변혁적이기에 함께 엮여 있다고 이해된다. 창조와 함께 시작된 선교는 우리를 초대하여 모든 차원에서 생명을 하나님의 선물로 경축하도록 한다.
105. 우리는 하나님의 영의 선교가 온 피조물을 새롭게 하는 것임을 확언한다. "땅과 거기에 속한 모든 것은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생명의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보호하시고, 사랑하시고, 보살피신다. 인간은 땅의 주인이 아니라 창조를 보전하는 책임자이다. 지속되는 자연파괴를 가져오는 과도한 탐욕과 무절제한 소비는 중지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구원을 온 피조물의 갱신에서 분리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중심적인 목적을 넘어서 하나님 선교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 하나님 선교는 모든 생명을 향하고 있기에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새로운 선교방법으로 그것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회개와 용서를 위해 기도하지만 또한 지금 행동해야 한다. 선교는 창조세계가 그 중심에 있다.
106. 우리는 오늘날 다방향적이고 다양한 양상을 지닌 선교운동이 남반구와 동양으로부터 출현하고 있음을 확언한다. 기독교의 무게 중심이 남반구와 동양으로 이동한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이 지역의 상황, 문화, 영성에 근거한 선교학적 표현들을 탐구하도록 도전하고 있다. 우리는 상호우애와 동반자 관계를 더 발전시켜야 하고, 선교와 에큐메니칼 운동 안에 상호의존성을 확언해야 한다. 우리의 선교적 실천은 고난 받는 사람들과의 연대 및 자연과의 조화를 보여주어야 한다. 전도는 자기 비움의 겸손 가운데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으로, 또한 다른 문화와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의 대화 가운데 이루어진다. 또한 전도는 이러한 지형 변화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라는 가치에 모순되는 억압과 비인간화의 구조와 문화에 대해 맞서야 한다.
107. 우리는 주변화된 사람들이 선교의 대리자이며 선교를 만물의 생명의 충만함으로 이해하는 예언자적 역할을 감당한다고 확언한다. 사회에서 주변화 된 사람들은 하나님 선교의 주요 동역자들이다. 주변화 되고, 억압당하고, 고난 받는 사람들은 무엇이 그들에게 좋은 소식이고, 무엇이 그들의 위험해진 삶에 나쁜 소식인지를 구별하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살리기 선교에 헌신하기 위해서 생명을 긍정하는 것과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 무엇인지 주변부로부터 나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우리는 주변부 사람들이 취하는 행동을 향해 선교의 방향을 돌려야 한다. 정의와 연대와 포용성은 주변부로부터의 선교의 중요한 표현들이다.
108. 우리는 하나님의 경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사랑과 정의의 가치에 기초해 있으며, 변혁적 선교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우상숭배에 저항해야 한다고 확언한다. 경제 지구화는 사실상 생명의 하나님을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신, 돈으로 대체하였다. 그것은 부당한 부의 축적과 번영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교는 그러한 우상숭배적인 비전에 대해 대안을 제시하면서 반-문화적이 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선교는 생명, 정의, 평화의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사람과 자연에게 불행과 고난을 가져오는 이러한 거짓 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교는 탐욕의 경제를 규탄하고 사랑과 나눔과 정의의 거룩한 경제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109.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좋은 소식이고, 사랑과 겸손의 성령 안에서 선포되어야 한다고 확언한다. 우리는 우리의 메시지와 복음을 전하는 방법에서 성육신, 십자가, 부활의 중심성을 확언한다. 그러므로 전도는 제도를 가리키기보다 항상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전도는 교회의 본질에 속한다. 교회의 예언자적 소리는 선포되도록 요청 받는 그 때에 침묵해서 안 된다. 교회는 설득, 감동, 확신을 가지고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전도방법을 갱신해야 한다.
110. 우리는 생명을 위한 대화와 협력이 선교와 전도에서 필수적이라고 확언한다. 진정한 전도는 하나님의 형상인 모든 인류를 위하여 종교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를 존중할 때 이루어진다. 폭력적인 수단, 경제적인 이익제공, 혹은 권력남용을 통해 이루어진 개종은 복음의 메시지와 반대된다. 전도할 때에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존경과 신뢰 관계를 정립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각각의 혹은 모든 문화의 가치를 존중하며 복음은 특정 단체에 의해 소유될 수 없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우리의 임무는 선교지로 하나님을 모셔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증언하는 것이다(행17: 23-28). 성령과 연합한 우리는 생명을 향해 함께 일하기 위해서 문화적 · 종교적 장벽들을 극복할 수 있다.
111.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교를 위해 교회를 살아 움직이게 하며 권능을 주심을 확언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으로서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할 때에 역동적이 되고 변화가 가능하다. 이러한 사실은 세계 기독교의 다양성을 반영하는 다양한 형태의 공동증언들을 낳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선교하면서 함께 여행하고, 사도들의 선교를 지속하며 살아 움직여야 한다. 실천적으로 이 사실은 교회와 선교가 일치해야 하며, 서로 다른 교회와 선교단체들은 생명을 위해 함께 일해야 함을 의미한다.
112.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요10:10)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고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사 65:17)라고 하나님의 통치의 비전을 확증하시는 성령을 통해 온 피조물을 생명의 잔치로 초대하신다. 우리는 겸손과 소망 가운데 만물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화해시키는 하나님의 선교에 헌신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한다.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학교, 세계기독교미래연구원 원장) 번역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연구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