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리더에게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추진력’이다. 추진력에 대해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다 갖춘 다음에 추진하려고 한다. 제대로 준비된 다음에 펼치려고 한다. 기획하고, 다시 하고, 완벽하게 갖추고 난 후에 진행하려고 한다.
책 <아포슬>을 읽고, 다음 세대 사역에 도전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로 도전받은 내용대로 실천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면에 도전을 받았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더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피곤하기도 하고, 힘들 것 같아 주저하는 사람도 문제지만 다 따라 하려고 하는 사람도 문제다. 벤치마킹할 때 자신의 상황과 여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카피하려다가는 큰코다치게 된다. 무언가를 배우려면 각자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에 맞게 적용하며 시도해야 한다.
나는 유학 후 한국에 들어와서 대구에서 영어 예배부를 5년 동안 섬겼다. 그런 뒤 청년부를 5년 섬기게 되었다. 2013년 9월 16일 갑자기 청년부를 맡게 되었는데, 10여 년 정도 정체된 전통적인 공동체였다. 그런 청년부를 맡기 시작하면서 사실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새벽 한 두시에는 눈이 번쩍 떠졌다. 마치 주님이 새벽 한 시, 두 시에 깨우시고,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주시는 듯하였다. 그럴 때마다 스마트폰 S다이어리에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둘 기획을 하고, 실행해 나갔다. 첫해에는 많은 것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5가지 정도만 했다. 양육, 제자훈련, 단기선교, 성경베스트, 결혼학교를 시작했다. S다이어리에 더 많은 것들을 적어 두었지만, 처음부터 다 하지 않았다. 점차 늘려가면서 많은 것을 하였다. 그래서 5년째 섬길 때는 한 학기에 35가지 정도를 하였다.
청년부이다 보니 인생에 큰 계획인 결혼에 대한 것을 마련했다. 결혼학교를 시작으로 아직 결혼하지 못한 지체들을 위한 결혼예비학교를 했다. 그 다음에는 막 결혼한 커플들을 위한 신혼부부학교, 마지막으로는 부모로 잘 준비될 수 있도록 예배부모학교를 진행했다. 처음부터 결혼과 관련된 것 4가지를 준비하고 한꺼번에 시작하지 않았다. 한 가지를 오픈하고, 진행하다 보니 다른 것들도 교육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더 오픈하게 되었다.
꼼꼼하게 그림을 그리고 완벽한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고, 출발하는 것이 추진력이 아니다. 이렇게 하면 출발 자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다 갖춰지지 않아도 작은 것부터 시도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너무 많은 것을 접목하려고 해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교회와 공동체의 특성과 필요를 고려하여 시작해야 한다. 혼자 하는 것은 추진력이라고 할 수 없다. 같이 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새벽을 깨우겠습니다. 새벽 기도를 하겠습니다.” 이렇게 선포하고, 나아가는데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다면 기획력은 있을 수 있으나 추진력이 없는 것이다. 기획력이 뛰어난 리더들은 많다. 웬만하면 교회 혹은 기관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구상한다. 그러나 정작 바로 적용을 할 것인지가 문제이다. 그냥 탁상공론으로 보기 좋은 서류는 만들었지만, 현실에서는 전혀 반영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나 자신이 추진력이 있는 리더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면 자신의 옆과 뒤를 돌아보면 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주위에서 그리고 뒤에서 따라 오려고 하고, 따라오고 있는지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추진한 것을 제대로 가게 하려면 리더 혼자 하겠다고 하면 안 된다. 얼마든지 혼자서도 추진할 수 있지만 멀리 갈 수 없다. 행여 멀리 가더라도 그 영향력이 크기가 어렵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추진력이 강력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추진할 때 그 타이밍을 잘 기다려야 한다. 예전 스타일에 이미 굳은 사람들과 함께 무엇인가를 추진하려면 서로 힘들기 때문이다.
영화감독 김상철 목사님을 만나 뵙고, 몇 시간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목사님, 리더는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한 부류는 이미 있는 판에서 놀다가 가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판을 짜서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김 목사님은 새롭게 판을 짜는 스타일입니다.” 나 자신도 나에 대해 잘 몰랐던 말씀을 하셨다.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았다. 틀을 만들고 그 틀을 계속 진화시키고 진행하는 데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게 했을 때 제대로만 되면 파급 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판을 잘 짜야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찢어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새롭게 공동체를 잘 이끌어 가려면 새 틀을 짜고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도 추진할 때 어떻게 하면 스스로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더불어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얻을 수 있을까? SNS에 자신의 결단을 선포하면 된다. 그러면 추진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저, 새벽을 깨웁니다!” 이러면 안 나올 수가 없다. 뒤에서 욕이 들리는 것 같다. 새벽 예배에 안 나가면 자신의 마음이 굉장히 어려워진다. 이렇게 하는 것은 지속해서 추진할 수 있도록 그 틀 안에 자신을 넣는 방법이다. 섬기는 자리로 가면 더 그런 사람이 된다.
나는 청년 때 새벽 예배에 나오고 싶었다. 한두 번이 아니라 계속 규칙적으로 나오고 싶었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차량 운전이었다. 그 당시 담임 목사님께 새벽 차량 운전을 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권사님들, 집사님들 차 라이드를 해드렸다. 새벽예배 후에도 라이드를 하고, 집으로 갔다. 그렇게 하니까 새벽 예배에 빠지지 않게 되었다. 기도를 드리고, 다 마친 뒤 운전을 하니 기도 시간을 일정하게 갖게 되었다. 더 감사한 것은 차가 한 대 생긴 기분이었다. 목사님이 새벽예배 후 라이드를 하고 다시 교회로 오지 말고 바로 집으로 갔다가 새벽예배 올 때 타고 오라고 하셨다. 추진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포하고, 그다음 자신이 정말 그 일을 계속하도록 자신을 그 틀 안에 집어넣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같이 동참할 사람들도 붙는다. 비전을 나누고, 자신을 그 틀에 넣을 때 이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함께하고 싶어 한다. 기꺼이 동참하게 된다.
이와 같이 추진력은 나 혼자의 힘을 되는 것이 아니다. 혹 일이 된다고 하더라도 힘이 든다. 함께 해야 한다. 어떤 지체는 새벽 예배에 늘 친구들을 태우고 나왔다. 그 지체는 자신이 그 친구들을 태우러 간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닌 걸 알게 되었단다. 그들이 자신을 깨웠고, 새벽 예배에 참석하게 해 주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혼자 새벽을 깨우면 지속해서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이 새벽을 깨우다 보니 더 잘 참석하게 되었다. 추진력은 혼자 하다 보면 지치기도 하고, 중도에 포기하기 쉽기 때문에 같이 해야 한다.
리더의 특권은 섬김을 통해 자신이 더 성숙해진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섬김을 받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 섬김이들은 착각한다. 자신이 뭔가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지만 사실 리드하면서 더 앞으로 나아가고, 제대로 성숙해져 가야 하는 것이다. 리더는 어떤 섬김을 추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내가 살아가는구나, 이것 때문에 내가 깨어있구나. 이것 때문에 내가 눈물을 흘리고 내가 깎이고 있구나’ 이렇게 자각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무엇인가를 더욱 교육하고 훈련하려고 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누군가를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막상 나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되고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이 맞는 말이다.
리더는 무엇인가를 추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더 깎이고 성숙해야 함을 늘 기억해야 한다. 성숙한 리더일수록 사람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섬김을 통해서 깎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일수록 남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교회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잘못되었을 것이라고는 아예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리더는 어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못 해 먹겠다고 한다. 힘들어 죽겠다고 한다. 자기가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인 줄은 모른다. 자신이 성숙해야 함을 알지 못한다. 이런 리더는 추진력을 가지고 앞으로 절대 나아갈 수 없다. 그냥 중도에 포기한다. 자기 생각대로 풀리지 않으니까 낙담하고 실망하고, 결국은 포기한다.
앞서 리더가 아닌 사람은 절대 리더로 세우면 안 된다고 하였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리더가 아닌 사람도 시작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중도에 하차 선언을 한다. 끝까지 추진력을 낼 수 있는 엔진이 없다. 조금만 경사진 곳이 나타나면 그냥 어렵다고 포기한다. 리더가 팔로워를 맞추어 주고, 섬겨야 하는데, 사람들이 자신에게 맞추어 주기를 바란다. 전혀 자신이 깎일 생각이나 수고하고 애쓸 생각을 하지 않는다. 희생, 수고, 헌신을 하려니 부담스러운 것이다. 얼굴에 오만 가지 인상을 다 쓰고 다닌다. 세상 근심 걱정을 얼굴에 담고 다닌다. 이런 사람의 얼굴은 보기가 상당히 부담스럽다. 밝고 건강한 추진력보다는 어둠의 그늘이 임재해 있다. 결국엔 스스로가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고 공동체 전체를 위기에 넣을 수 있다.
이런 리더는 추진력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통해 공동체를 반대 방향으로 가게 한다. 두 진영이 축구 시합을 할 때 상대편 진영에 가서 골을 넣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의 진영에 골을 넣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추진력은 있지만, 공동체의 전체 사기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는 섬김이가 있다.
리더라면, 셀 그룹에, 사랑방 안에, 구역 안에 있는 사람보다 먼저 고민해야 한다. 그러면서 공동체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파악하고 추진해야 한다. 리더는 먼저 보고, 고민하고,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가만히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하고, 방관하는 자가 아니다.
아주 멀리 타 도시에서 새벽예배를 나오는 리더가 있었다. 그 지체에게 물었다. “너는 왜 집 앞에 있는 교회에서 새벽예배를 나가지 않고 이렇게 멀리까지 새벽예배를 오니?” 지체는 이렇게 얘기했다. “목사님, 제가 와야 누가 왔는지를 체크 할 수 있잖아요. 사랑방 멤버 중에서 누가 새벽예배를 왔는지 알면 같이 밥이라도 한 끼 먹을 수 있잖아요.” 마인드 자체가 굉장히 달랐다. 스스로 은혜받으려고 오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거기에 사랑방 멤버들을 케어 하기 위해서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교회까지 오는 것이다. 얼마나 귀한 일인가. 누군가에게 뭔가를 챙겨 주기 위해서 리더는 더 열심히 움직여야 한다. 리더가 ‘귀차니즘’에 빠지면 자신도 죽고, 구성원들도 죽는다. 추진력의 반대가 ‘귀차니즘’이다. 귀찮아서 사양하고, 귀찮아서 거절한다. 귀찮아서 회피하고 포기한다. 이것은 결코 바르지 않다.
추진력이 없는 사람은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 새벽 예배에 못 나오는 이유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멀어서, 밤에 늦게 자는 올빼미형이라서가 아니다. 마음이 없어서다. 청년부를 섬길 때‘대희’라는 친구가 있었다. 대희는 새벽예배에 늘 지각을 했다. 늘 6시 15분에 들어왔다. 그에게는 그 시간에 오는 이유가 있었다. 대희는 새벽 4시면 일어났다. 하지만 어렸을 때 소아마비에 걸려 온몸이 뒤틀렸다. 그래서 손과 발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그런데“새벽 예배 나옵시다. 밤의 문을 접고 새벽을 깨웁시다!” 외칠 때 대희가 반응을 했다. 4시에 일어나 한 시간을 걸려서 옷을 입고, 첫 지하철을 타고 오면 제일 이른 시간이 6시 15분이었다. 그래서 늘 새벽예배 설교 중에 들어왔다. 그렇게 대희가 새벽을 깨우니까 집 근처, 교회 근처에 있는 지체들은 할 말이 없었다. 사지 멀쩡한 지체들이 도전을 받았다. 추진력은 외치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이렇게 반응해 주는 지체들이 있을 때 더 강력해진다.
추진할 때 어떤 리더는 탱크처럼 혼자 하는 사람이 있다. 가능은 하다. 그러나 지칠 수 있다. 주변에 아무도 없이 혼자서만 할 수 있다. 추진력은 기러기처럼 되어야 한다. 기러기가 편대로 갈 때 리더 기러기는 선두로 맨 앞에 선다. 제일 먼저 바람을 맞는다. 그러면 뒤에 있는 기러기들은 30% 이상의 바람이 감소한다. 70%의 바람만 맞으면서 가게 되어 편하다. 그러나 뒤에 기러기들은 “꾸우 꾸우” 울어 댄다. 앞에 선두가 지치지 않도록 격려의 메시지를 날리는 것이다. 이렇듯 진짜 추진력은 리더 혼자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팔로워들이 함께 동참해 주어야 한다.
추진력이라는 것은 솔선수범에서 나온다. 그런데 더 큰 추진력을 가지고 가려면 반응을 해 주는 멤버들이 있어야 한다. 대구에 있으면서 반응이 정말 느리고 없어서 2018년 표어를 “반응하라! 2018!!!”이라고 했다. 대구에서 사역할 때, 청년부의 부흥이 있었지만, 처음에는 상당히 고전했다. 얼핏 보면 쉽게 이루어진 것 같지만 이끌고 나가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무엇보다 무반응이었다.
아무리 오리데이, 볼링데이, 영화데이 행사를 해도 참석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수백 명인 청년 공동체에 오리 배를 태워주고, 오리고기를 먹여 준다고 해도 신청자가 없었다. ’볼링은 좋아하겠지, 영화는 괜찮겠지’ 시도를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무반응이었다.
추진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같이 가는 것이다. 같이 할 때 극대화된다. 로켓을 쏴 올릴 때 연료가 언제 제일 많이 필요한지 아는가? 처음 떠오를 때이다. 장시간 움직일 때 많이 들어갈 것 같지만 제트 기류를 타기 때문에 오히려 연료가 거의 안 든다.
청년부를 섬길 때 세팅을 하고, 소통할 채널을 만들었다. 홈페이지를 만들고, 페북과 인스타로 소통하기, 문자로 말씀 나누기 등을 시작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감사하게도 함께 뛸 리더들이 거의 다 세워지게 되었다. 연말이나 혹은 부임한 공동체 초반에 설교할 때 비전을 나누고, 동기 부여를 하고, 함께 할 수 있도록 메시지를 나눈다. 그런 후 추천을 받아 리더로 함께 하자고 하면... 추천받은 사람들 거의 100%가 다 같이 뛰겠다고 한다. 정말 큰 격려가 되고, 감사하다. 공동체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리더들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그런데 그 섬김이들이 세워지게 되어 감사할 뿐이다.
이것은 이래서 안 되고, 저것은 저래서 안 된다고 그랬는데, 비로소 되는 것을 경험한다. 풀어야 할 과제가 없겠는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같이 소통하면서 한다면 못할 일도 아니다. 처음에 추진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이걸 어떻게 띄울지는 리더에게 어려운 난제이다. 그러나 어렵더라도 한 번 발동이 걸리고, 출발하면 굉장히 쉽게 갈 수 있다. 그러므로 리더는 이 난제를 잘 풀어내야 한다.
모든 리더는 넘어서야 할 언덕이 있다. 조금 부흥을 해도 더 나아가려면 넘어야 할 산이 있다. 이것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 어린아이가 자전거를 탈 때 턱에 걸려서 못 갈 때가 있다. 그 때 부모가 뒤에서 살짝 밀어주면 그 턱을 넘어선다. 그러면 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달려간다. 밀어주는 아빠와 엄마를 돌아보지도 않고 전진한다.
리더의 역할이 바로 이런 것이다. 둔 턱을 넘도록 ‘톡’하고 밀어주고, 같이 달려가게 하는 것이다. 추진력은 리더 혼자 해서 잘 나가는 것이 아니다.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웅덩이 혹 넘어야 할 둔 턱을 넘어서 같이 달리게 하는 것이다. 추진력은 그래서 리더십의 요소 중 두 번째로 중요한 요소이다.
김영한 목사(품는 교회 담임, Next 세대 Ministry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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