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범죄 후 인간의 상태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라 하시니라”(창 6:5~7)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29~31)
1. 신학과 신앙과 설교
우리가 신학을 공부해야 하는 가장 첫째 이유를 꼽으라면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런 신학적인 토대, 즉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형성한 다음에 정상적이고 복된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왜 관계 형성이 제일 중요하냐 하면 생각해 보세요, 두 사람이 원수 관계인데 서로가 서로에 대해 품고 있는 앙금들을 해소치 않으면 영원히 관계회복이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관계가 회복이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서로 사랑하고 소통하고 왔다 갔다 교제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믿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바르고 정확한 지식을 갖는 일입니다. 바로 이 일이 신학하는 일인 거지요. 그러므로 모든 성도가 신학하는 일은 숙명적인 책무라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구해주신 분에 대해 잘 모르고 지낼 수는 없습니다. 위기에 처한 나를 구해 준 분에게 감사치도 않다면 그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일 것입니다.
이 점을 설교자에게 그대로 적용한다면 설교자가 무엇을 설교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 그 자체이며(요1:1) 동시에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입니다. 말씀의 전달자요 운반자입니다. 하나님은 설교자에게 당신의 말씀을 대언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붙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였다 하라”(겔 37:9)
그렇다면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대언해야 합니까?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한 가장 바른 대답을 칼빈이 남겨놓은 한 문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강요 1권 16장 3항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전능자이심을 말씀하시며 그와 동시에 우리가 그분의 주권적 전능하심을 인정하기를 원하신다.”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파악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 즉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나는 존재. 출 3:14-이것을 70인 역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로 번역한 것은 오역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God is God)을 선포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주권적 전능하심입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적 권리이자 능력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이 천지 만물에 모든 일을 행하신 분이십니다. 마음에 품은 생각들을 모두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사 14:24)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10)
이 말씀들은 모두 하나님이 계획하신 모든 일을 자신의 기쁘신 뜻 가운데 주권적으로 이루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역사 가운데서 자신의 대리자들, 즉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을 통해 계속 반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구원의 일도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의 모든 구원은 물거품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앞의 두 가지 내용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즉 하나님은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존재 그 자체이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주권, 주인 된 권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 권리를 가지고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주권을 인정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스스로 결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고한 욥에게 이렇게 묻고 따졌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게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38:4)~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8)~ 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 밑으로 걸어 다녀 보았느냐(16)”
이 말씀 앞에 서 보세요. 인간이란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보잘것 없는 존재인가 자신을 살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배풀어주신 은혜 안에서 먹고 마시고 놀고 웃고 즐기고 복된 인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가장 진실 된 신앙고백의 노래가 있다면 찬송가 310장이라 생각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나 처음 믿음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본 모습을 바로 보고 바로 깨닫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번 시간에 우리는 흙으로부터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배신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배웠습니다. 오늘은 그 배신의 결과,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었는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고귀한 인간이 어떤 상태로 추락하고 망가졌는가 하는 내용을 다루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 왜 구원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절대적 필요성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2. 원죄와 전적 타락
하나님은 선한 일에는 상을 주시고 악한 일에는 벌을 주십니다. 이것을 ‘신상필벌’의 법칙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인간은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그 후손에게 죄의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 가지 죄책을 인간에게 추궁하였습니다. 하나는 이제 모든 인류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죄 아래에서 인간은 완전히 악한 존재가 되도록 허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에서는 “내버려두었다”(give them up, 롬 324, 26, 28)고 표현하고 있고, 도르트 신조에서는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이라고 명명했습니다. 한 마디로 원죄와 함께 모든 인간은 철저히, 전 영역에서, 모든 악의 집합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것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먼저 원죄의 문제입니다.
영어로 Original Sin이라 하는 이것에 대해 오늘은 우선 서너 가지로 정리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① 먼저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죄를 아담의 죄로 인해 그 후손에게 전가된 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논쟁이 있는데 일부 사람들이 이 원죄를 잘못 이해하여 아담이 죄를 짓기 전에는 죄의 개념도 없었고 죄가 무엇인지도 몰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 때문에 죄가 새롭게 생겼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이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결과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처음부터 인간 의식에 존재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므로 하나님의 선을 따르면 선이 되지만 하나님의 선을 어기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의 선택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에 맡기는 것입니다. 아담은 충분히 하나님의 선을 택할 자유의지를 가졌지만 불행하게도 하와와 함께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쪽으로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② 다음으로, 아담의 범죄의 결과는 이후 인류사회에 결정적이고 절대적인 죄의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원죄로 말미암아 첫째, 모든 인간에게 사망이 찾아왔습니다. 롬 5:12에서 바울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참으로 무섭고 설픈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건강을 챙기고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약재를 먹고 살아도 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둘째, 누구든 인간이라면 본성적으로 결함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어거스틴). 그래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 타락 전의 상태로 이때엔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자기 의지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였다는 것이고(posse non peccre), 두 번째로는 타락 후엔 이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으며(non posse non peccare), 셋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후엔 전혀 죄를 지을 수 없는 영화로운 상태로 성령님이 이끄시는 상태가 있다고 한 것입니다(non posse peccare). 그러므로 성경에 따르면 진정한 의미에서 완전히 정의롭고 선한 인간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이렇게 논합니다.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③ 한편으로 원죄로 인해 각 개인은 각자의 죄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죄’ 혹은 자범죄‘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이 죄는 원죄로 인해 본성적으로 인간은 죄를 향해 기울어지는 경향성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루터와 칼빈은 이 죄의 경향성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 인간이 가진 탐욕이라고 보았습니다. 참고적으로 카톨릭교회에선 7대 죄악을 선정하고 경계하는데 그것은 교만과 인색함, 시기, 분노, 음욕, 탐욕, 그리고 나태를 꼽습니다. 이 반대는 겸손, 자선, 친절, 인내, 순결, 절제, 근면이라 말합니다.
2) 다음으로 전적 타락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제 죄 아래에서 태어난 인간의 상태에 대해 성경과 신앙고백서들은 어떻게 논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러한 지식으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것인지를 실감하기를 원합니다.
전적 타락이란 뜻은 다른 용어로 ‘완전한 타락(utter depravity)’으로도 호칭됩니다. 이것은 인간성 전체가 완전히 타락했다는 뜻입니다. 즉 내 안에 어떤 형태로든지 타락에 오염되지 않은 부분이 한 곳도 없다는 말입니다. R.C. 스프로울 목사님은 생전에 전적 타락에 대해 “전적 타락은 더이상 죄를 지을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죄인이 되었다는 말이다”고 하였는데 참으로 심오한 해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주로 개혁신학에서는 이 상태를 ① 타락 ② 부패 ③ 무능력 ④ 불가능 등 4가지로 설명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것을 ① 선행불능 ② 악의 충만 ③ 자력구원불능 ④ 신법저항으로 풀이합니다. 즉, 인간은 철저히 안전히 타락하였기에 그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을 행할 수 없고 오직 악만 충만하다는 것이며, 나아가 완전히 구원의 능력을 상실한 상태이므로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며, 오로지 하나님의 법을 싫어하고 대적하는 본성만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혁신학자인 안쏘니 후크마는 특별히 인간의 부패를 강조하면서 “이 부패로 인해 인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특별히 그는 인간의 타락과 무능력함을 새의 날개에 비유하면서 타락한 인간의 상태는 비록 날개는 가졌지만 날지 못하는 날개일 뿐이라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태에 대해 논하고 있는 대표적인 성경 구절들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하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14:1~3) - 이에 오늘 창세기 본문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것을 왜 후회하신 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의 눈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0-23)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29~31)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 4:18~19)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계속)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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