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 대 초반 패니 크로스비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찬송가 작사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돈 박사와 계속 함께 동역했고, 그는 그녀의 평생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아주 재능이 많은 작곡가들이 그녀의 아파트를 찾았다. 그들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패니 크로스비의 찬송가를 원했다. 1875년에 복음전도자 드와이트 무디(Dwight Lyman Moody, 1837-1899)와 아이라 생키(Ira David Sankey, 1840–1908)를 만난 패니 크로스비는 복음전도자가 되었고, 본격적인 영혼구원의 사역에 뛰어들게 되었다.
시카고에서 YMCA 복음 전도사가 된 평신도 설교자인 무디는 다양한 도시에서 복음전도를 하기 위해 영국으로 갔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의 집회에 왔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영접했다. 무디가 설교하는 모든 곳에서 생키는 훌륭한 바리톤 솔로로서 공연했다. 그는 많은 패니 크로스비의 찬송가를 불렀고, 곧 ‘인애하신 구세주여’와 ‘주 예수 넓은 품에’는 영국의 가정에서 가장 인기 있는 찬송가가 되었다. 1870년에 무디는 인디애나폴리스의 YMCA 컨벤션에서 아주 우연히 생키와 만났다. 무디는 훌륭한 바리톤 목소리의 생키에게 펜실베이니아 서부에서의 일을 그만두고 자신과 함께 복음전도 사역을 감당할 것을 촉구했다. 1875년에 그들이 뉴욕으로 돌아왔을 때 국제적인 인물이 되었고 가는 도시마다 폭풍이 일게 했다. 그 때, 무디의 동역자 생키는 목소리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여러 해 무디와 함께 있으면서 훌륭한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패니 크로스비가 이스트사이드로 이사 왔을 때, 그녀는 비글로 & 메인 출판사와 더 가까이서 사역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일주일에 며칠을 사무실에서 보냈지만, 삶은 변하고 있었다. 저녁이 되면 그녀는 각 선교센터와 빈민가, 감옥을 방문했다. 점점 멀리서 그녀를 부르는 초청이 왔고,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는 곳이면 그 어느 곳이든 달려갔다. 맹인이라는 이유로 결코 패니 크로스비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주로 혼자 여행했고 사람들이 자신에게 병약자 취급하는 것을 차단했다.
무디와 생키가 브룩클린으로 왔을 때 패니는 그들이 설교를 하며 노래 부른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그녀는 그들을 만나지 않았었지만 생키의 작품은 익숙했다. 비글로 & 메인 출판사는 생키와 필립 블리스(Philip Paul Bliss, 1838-1876, 우리 찬송가에 모두 9곡이 실려 있으며 161, 200, 202, 204, 267, 311, 413, 510, 520장이다)가 쓴 복음 찬송가와 성가, 솔로 곡을 발표했고, 그 곡들은 기록적으로 많이 팔렸다. 패니는 블리스와 함께 일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작곡가는 무디 전도 집회를 돕기 위해 시카고로 가다가 열차 사고로 죽었다. 블리스의 죽음은 비록 패니의 영혼에 어두운 그늘을 만들었지만 주님은 그녀에게 여전히 무디와 생키를 도와주는 일을 하고 계셨다. 우리 찬송가에 실린 블리스의 찬송가는 161장 할렐루야 우리 예수, 200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202장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204장 주의 말씀 듣고서, 267장 주의 확실한 말씀 듣고, 311장 내 너를 위하여,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 510장 하나님의 진리 등대, 520장 듣는 사람마다 복음 전하여다. 그의 대부분의 곡들은 직접 작사 작곡한 곡이 많으며, 주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진리와 복음에 중요한 주제를 두었다.
비글로 & 메인 출판사는 블리스의 완성되지 않은 작품을 패니의 도움을 받아 무디와 생키와 함께 출간할 찬송가를 선택하고자 했다. 무디와 생키가 뉴욕에 왔을 때 비글로는 그들을 사무실에 초대했다. 무디와 생키는 그곳에서 패니를 발견하고 매우 놀라며 기뻐했다. 생키는 그녀의 찬송가를 불렀고 그녀의 작품을 알았으며 무디가 뉴욕에 있었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패니 크로스비를 빨리 만날 것을 촉구했었다. 그들은 곧 함께 일하기 시작했고, 그 관계는 평생 동안 지속되었다.
생키는 패니 크로스비를 가장 훌륭한 살아 있는 복음성가 작사가로 생각했다. 그는 그녀에게 수 백 편의 새 찬송가를 쓰도록 격려했고 복음 찬송가와 성가와 독창곡에 그녀의 작품을 많이 채우기 시작했다. 비글로 & 메인 출판사로부터 생키는 그녀의 많은 초기 작품에 대한 권리를 얻었고 그 곡들을 다시 유명하게 만들었다.
패니가 그의 옆에 있을 때 생키는 그녀의 복음 찬송가에 맞는 곡을 작곡했다. 그 때쯤 그는 목소리를 잃었고 노래를 거의 부를 수 없었다. 그는 오르간 연주법을 스스로 배웠고 이제 곡 쓰는 법을 배웠다. 패니는 자신의 시에 곡을 쓰기도 했고, 그래서 같이 일하는 것은 매우 흥미 있게 되었다. 그들 중 누구도 복잡한 음악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고, 종종 그들의 곡은 아주 훌륭하고 은혜로운 복음 찬송가가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패니 크로스비를 “복음 찬송가의 여왕”이라고 불렀지만, 그녀는 자신을 성가에만 가두지 않았다. 그녀는 다방면의 시를 썼고 서정시와 심지어 사랑에 관한 시도 썼다. 또한 설교할 때 그녀의 메시지는 마치 찬송가처럼 흘러넘쳤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더 인기 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연설과 간증을 듣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그녀는 인생의 기쁨과, 하나님의 큰 사랑, 그리스도의 축복을 통한 구원 등에 대해 말했다. 연설할 때 그녀는 항상 “하나님이 당신의 소중한 마음에 축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전 당신과 있게 되어 너무 행복합니다.”로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청중들을 결코 볼 수 없었지만, 그들을 가슴으로 느꼈고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연설할 때마다 그녀는 항상 대부분 덮여진 조그만 성경이나 소책자를 가지고 다녔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점자로 쓰여 진 그녀의 말이 들어 가 있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다만 버팀 목이었다. 패니 크로스비는 단지 자신의 깊은 마음으로부터 말했을 뿐이다.
패니는 그녀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특별히 가난한 자, 병든 자,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자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실명을 세상으로부터 차단된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곤 했다. 그리고 “난 최선을 다해 주님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라고 확신 있게 고백했다.
그녀는 종종 자신에게 성경을 가르치셨던 할머니의 축복을 말했다. 그리고 함께 얼마나 오래 그 멋진 낡은 흔들의자에서 몇 시간이고 앉아 있었는지를 기억했다. “주님은 내 영혼의 햇빛입니다.”라고 고백하곤 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사명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 “난 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삶을 원합니다.” 그녀에게 실명은 단순히 잃어버린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을 얻은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이었다. 그녀는 청중들의 대부분이 어떤 방법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난 항상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물론 그때마다 그렇게 했지요. 그러나 내가 아무리 원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그렇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았습니다.” 그녀의 메시지는 항상 그 장소를 감동시켰다. 청중 중 누구도 패니가 시력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늘 행복했으며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연설을 듣는 청중들 중 누군가가 그녀에게 시를 몇 편 암송해 줄 것을 부탁했다. 때때로 그녀는 그들에게 이야기를 했고, 때때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사람들은 빗속에서 또는 추위에 떨면서 그녀의 말을 듣기 위해 한 시간, 두 시간 은혜 속에 서 있곤 했다. 그리고 점점 더 멀리서 그녀와 은혜의 시간을 함께 갖고자 몰려왔다. 그녀는 많은 청중 보다 적은 청중을 더 좋아했지만, 인원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처음에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패니 크로스비는 그 당시의 가장 영향 있는 복음 전도자 중 하나가 되었다.
주님은 패니의 시력을 앗아 갔을지 모르지만, 그분은 그녀에게 끝없는 에너지를 주었다. 그 충만한 성령의 에너지는 그녀의 사명을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녀는 20년 또는 30년 젊은 사람들보다 더 오래 살았다. 생키도 그녀를 결코 바쁘게 하지 못했고 비글로 & 메인 출판사는 그녀의 찬송가보다 더 많은 찬송가를 만들 수 없었다.
언젠가 그녀는 뉴저지의 오션 그로브에 있는 감리교 캠프집회에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보통 때처럼, 그녀는 혼자 여행했다. 그곳에서 캠프기간 동안 해변 가 작은 텐트에서 살았다. 무릎을 기어야 들어 갈 수 있었지만, 패니는 기쁘게 받아들였다. 매일 많은 찬양과 말씀과 함께 집회가 열렸다. 그녀는 캠프의 손님으로 왔고 종종 연설의 부름을 받았다. 패니는 거의 쉴 수 없었지만 은혜 충만한 시간을 보냈다. 방문 기간 동안 그녀는 두 작곡가를 만났다. 존 스웨니(John Robson Sweney, 1837–1899, 우리 찬송가에는 9곡으로 148, 190, 240, 245, 313, 428, 453, 482, 521장이다)와 윌리엄 커크패트릭(William James Kirkpatrick, 1838–1921, 우리 찬송가에는 14곡으로 40, 154, 175, 185, 217, 273, 370, 391, 452, 518, 523, 539, 542장이다.)이었다. 그들은 그녀에게 함께 일하자고 간청했다.
패니는 스웨니의 평판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는 캠프에서 찬양을 이끌었다. 그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펜실베이니아 음악 아카데미에서 음악을 가르쳤고 자신의 밴드를 조직했다. 그리고 많은 음악을 작곡했고 때때로 찬송가를 썼다. 여름 동안 그는 캠프에서 캠프로 왔다 갔다 하면서 밝고 행복한 곡들을 연주했다. 비글로 & 메인 출판사처럼 그는 찬송가를 발표했고 그의 노래 중 일부는 패니의 시를 포함했다. 스웨니가 작곡한 찬송가는 다음과 같다. 148장 영화로운 주 예수의, 190장 성령이여 강림하사, 240장 주가 맡긴 모든 역사, 245장 저 좋은 낙원 이르니, 313장 내 임금 예수 내 주여, 428장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453장 예수 더 알기 원하네, 482장 참 즐거운 노래를, 521장 구원으로 인도하는이다. 패니와는 240장 주가 맡긴 모든 역사를 함께 작업했다.
커크 패트릭은 스웨니랑 일했지만, 노래, 하모니, 파이프 오르간이 포함된 작품에서 매우 훌륭했다. 사실 커키는(패니가 그를 부르는 이름), 그녀를 위해 쓴 어떤 작곡가보다 훌륭한 음악가였다. 그녀는 그가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고 그녀도 그 점을 좋아했기 때문에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고, 그들과 함께 사역하는 것에 동의했다. 패니가 뉴욕으로 돌아 왔을 때, 그녀는 스웨니와 커키가 그녀의 새로운 시로 찬송가를 쓰도록 해 그녀를 바쁘게 했다. 그들의 긴 관계 동안 패니는 스웨니와 커크패트릭이 편집한 찬송가의 시를 천 편 이상 썼다. 커크 패트릭이 작곡한 찬송가는 40장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 154장 생명의 주여 면류관, 175장 신랑 되신 예수께서, 185장 이 기쁜 소식을, 217장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273장 나 주를 멀리 떠났다, 370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391장 오 놀라운 구세주, 452장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518장 기쁜 소리 들리니, 523장 어둔 죄악 길에서, 539장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542장 구주 예수 의지함이다. 패니와는 40장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 391장 오 놀라운 구세주를 함께 작업했다.
그녀는 아직도 여유가 있었고, 생키가 더 많은 복음 찬송가를 출간할 것이라는 것을 알렸을 때, 패니는 매주 하루를 그와 함께 사역했다. 1870년대와 1880년대에 복음 전도자가 되면서 그녀는 자신의 가장 훌륭한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패니의 도움으로, 생키는 결국 복음 찬송가와 성가, 솔로 곡 6권을 출판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무디는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며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있었다. 무디와 함께 사역하는 사람들 중에 독학 음악가이고, 매우 훌륭한 성가대 지휘자인 조지 스테빈스(George Coles Stebbins, 1846-1945, 우리 찬송가에 9곡이 실려 있으며, 33, 90, 146, 272, 331, 420, 425, 531, 608장이다.)이 있다. 그는 커크패트릭이나 생키 같은 기술은 없었지만, 그의 음악 중 일부는 순수했다. 무디는 그에게 패니 크로스비를 소개해주었고 비록 스테빈스의 음악이 부족했지만 함께 많은 곡을 만들었다. 우리 찬송가에 실린 스테빈스의 찬송가는 33장 영광스런 주를 보라, 90장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146장 저 멀리 푸른 언덕에, 272장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331장 영광을 받으신 만유의 주여, 420장 너 성결키 위해, 425장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531장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608장 후일에 생명 그칠 때다. 패니의 두 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스테빈스와 함께 쓰였다. 우리 찬송가의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찬송가 531장)와 “후일에 생명 그칠 때,”(찬송가 608장)다. 스테빈스의 곡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향한 그의 순수성과 진실성이 느껴진다.
그리스도께서 온유하게 당신을 부르시네,
오늘도 부르시네, 오늘도 부르시네,
왜 사랑의 햇빛에 시들어 당신은
방황하는가?
더 멀리 더 멀리?
그리스도께서 지친 자를 평안하게 부르시네,
오늘도 부르시네, 오늘도 부르시네,
당신의 무거운 짐을 그에게 주고 당신은
축복을 받았으니
그분은 당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네.
<찬송가 531장>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부르시네 부르시네
사랑의 햇빛을 왜버리고
점점 더 멀리가나
고달파 지친 자 쉬라시네
쉬라시네 쉬라시네
무거운 짐 진 자 다 나오라
쉬게 해주시리라
60세가 넘는 나이에는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쉬려고하지만 패니 크로스비는 아니었다. 그녀는 이때 많은 찬송가를 썼고 그것은 그녀에게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또 다른 일을 찾았다. 열정이 그녀의 심장을 끊임없이 고동치게 했다.
가진수(월드미션대학교 예배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