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에 있는 사이프러스란 작은 섬나라가 연일 미디어의 조명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키프러스>라고 하고 성경에는 <구브로>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바울이 1차선교여행의 첫 기착지로 삼았던 나라다. 아마도 그 곳 출신으로 알려진 바나바의 권유가 있었을 것 같다. 인구는 70만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나라인데 일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가 넘는 관광의 천국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좋지 못한 일로 우리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국가부도사태가 예견되어 있었는데 한달전에 치른 대통령선거 뒤로 주요 결정들이 미루어지고 있었다. 유로존에 있으면서 이미 재정지원을 받은 그리스나 스페인에 비하면 규모가 작아서 만일의 사태에도 그 여파가 그리 크지는 않겠지만, 이번에는 재정지원의 대가로 예금에 대해 세금을 부담해야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10만유로가 넘으면 거의 10%에 해당하는 세금을 물어야 하니 일반일들에게는 경천동지할 일이다. 세상에 이런 법도 있나? 그런데 법이란 것이 그렇게 생기기도 한다. 이자에 대한 세금이 아니라 예금액에 대한 세금이다. 아무리 법이라고는 하지만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강도짓을 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모두가 앞을 다투어 예금을 인출하려고 했던 일은 쉽게 이해가 된다. 이런 일을 두고 소위 뱅크런 (bank run)이라고 한다. 은행에 대한 신뢰가 깨어지면서 은행으로 달려가서 내 돈을 되찾아오려는 집단행동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은행이 실제로 보유하고 있는 현금은 전체 예금액보다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에 뱅크런이 생기면 금융시장이 마비된다. 물론 예금인출기는 한도를 넘겼고 은행은 문을 닫았다.
지금 유럽에서 유로를 사용하는 나라는 모두 17개국이다. 화폐가 통합되고 유로의 가치가 급상승을 하면서 덩달아 부를 누린 나라들이 대부분이다. 사이프러스도 그 중에 하나다. 앉은 자리에서 화폐가치가 반이상 뛰어 올랐다. 호시절을 지나면서 사회보장을 늘리고 방만한 재정정책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나라는 금융규제도 완만해서 유럽의 검은돈이 흘러들어오기 쉬웠다. 그래서 금융권의 자산이 국민총생산의 8배가 넘는 기형적인 구조를 갖게 되었다. 급기야는 두개의 거대한 은행이 파산의 위기로 치닫으면서 국가경제 전체가 흔들리게 되었고 외부의 지원없이는 생존이 어렵게 된 것이다.
이런 나라들을 도와야 하는 프랑스나 독일국민들의 불만은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나온 방법이 손실분담금이다. 좋은 시절에는 개개인이 모두 혜택을 누렸으니 힘든 시절에는 모두가 짐을 나누어 지라는 뜻이다. 말은 맞지만, 현실은 달랐다. 사람은 소유를 통해서 추가로 얻게 되는 기쁨보다는 상실로 인해서 잃게 되는 슬픔을 더 크게 느낀다. 수십달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무장강도에게 과감히 맞선다. 잃게 되는 것이 돈이든지 아니면 자존심이든지 우리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크고 그 피해 또한 크다. 흥분한 국민들에게서 폭동의 조짐을 우려했는지 의회는 국민의 편을 들며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다. 물론 대책은 없어 보인다. 막다른 길은 국가부도다.
이번 사태가 어떤 식으로 결말이 나든지 이미 유로는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돈(화폐)이란 신뢰에 바탕을 둔다. 내가 제공하는 물건이나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종이(화폐)를 받는다는 뜻은 내가 이 종이(화폐)로 다시 물건을 사려고 했을 때에 아무런 문제없이 다른 사람들이 받을 것이라는 "믿음"때문에 가능하다. 만약에 500년후에는 아무도 이 화폐를 받지 않을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면, 그 일년전인 499년후에는 화폐를 받으려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거슬로 올라오면 오늘 당장 아무도 그 화폐를 사용하려고 하지 않게 된다. 은행에 맡겨둔 돈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결국에는 그 화폐의 유통을 막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흥청망청 재정을 탕진해버린 남부유럽의 나라들을 무작정 돕기는 싫으면서도 쉽게 극단의 처방을 내릴 수 없은 북유럽국가들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덕분에 미국의 달러는 더욱 힘을 얻었고, 맹추격을 하던 유로와 중국의 위안화를 쉽게 따돌리는 듯하다. 미국의 전성시대가 다시 열리는 전주곡이라고 섣부르게 기대감에 부푼 이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배워야할 교훈은 그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국의 달러도 영원할 수는 없다는 냉정한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