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익 목사(벧샬롬교회 담임)가 15일 복음과도시 홈페이지에 ‘다시 나그네로’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김 목사는 “성경이 가르치는 신자의 정체성은 분명히 그리고 언제나 거류민과 나그네”라고 했다.
이어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라고 밝혔다(벧전 1:1). ‘나그네’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당시 역사적 상황에서 소아시아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이었겠지만, 이 표현은 하늘에 본향을 두고 잠시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신자의 정체성을 염두에 둔 영적, 비유적 표현이기도 하다”며 “우리가 마이너리티로 존재해야 하는 지금 이 시대에 불편하고 낯설더라도, 성경을 오독하지 않고 복음의 본질을 직면하고 나그네와 거류민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면 오히려 이 시대는 우리에게 축복이 될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그는 “거류민과 나그네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담지한 표현”이라며 “베드로전서의 일차 독자인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은 사도가 말하는 나그네로서의 신자의 영적인 정체성을 오해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매일의 일상에서 경험하고 사는 현실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거류민’(파로이코스)은 자기 집이 아닌 곳에 사는 사람인데, ‘더부살이를 한다’는 뉘앙스를 가진다”며 “그리스도인의 집은 하늘 본향에 있기에, 우리가 잠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우리는 거류민일 수밖에 없다. ‘나그네’(파레피데모스)는 외국에 머무는 임시 거류자를 지칭한다. 사실, 사도 베드로가 세상 속의 신자를 가리켜 거류민과 나그네라고 한 것은 그만의 독특한 관점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김 목사는 “히브리서 기자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동일하게 말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 11:13). 여기서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야곱 등을 가리킨다. ‘외국인’(크세노스)은 말 그대로 외국인”이라며 “주인이 아닌 손님, 낯선 곳, 낯선 문화, 낯선 언어의 불편을 감수하고 사는 외국인이다. ‘나그네’(파레피네모스)는 사도 베드로 가 말한 나그네, 곧 임시 거류자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말을 쓸 때,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얻기 위해서 헷 사람들에게 했던 말을 기억했을 것”이라고 했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앞에서(히 11:9) 이들이 ‘장막에 거하였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정체성을 보여 주는 거주 방식이었다”며 “윌리암 레인(William Lane)은 히브리서 주석에서 ‘(장막에 거한)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문화 속에서 영구적인 정착을 이루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설명한다. 가나안이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불편을 감수하면서 장막 생활을 한 것은 자신의 영원한 본향,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히 11:10)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거류민과 나그네로 살면서 드러내는 가시적 삶의 방식, 곧 장막에 거주한 삶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보여 주는 일종의 ‘증거’였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그네 됨은 신자들의 정체성이라면, 장막 생활은 그 정체성에 대한 증거였다. 이것은 대부분의 복음 증거를 말에 의존하는 오늘날의 기독교가 잃어버린 증거 방식”이라며 “사도 베드로나 히브리서 기자의 논지는 나그네의 정체성은 신자의 선택 사항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은 나그네의 삶의 방식을 통해 세상 앞에 증거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씀은 나그네의 삶의 현실을 매일의 일상에서 경험하는 소수자로 살아야 했던 초기 교회의 성도들과 달리, 오늘날의 많은 신자들에게는 직면하기 불편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거류민과 나그네로 사는 일은 무엇보다 불편한 삶”이라며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거류민과 나그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불편함을 전제하는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편안해지는 것과 나그네가 되는 것 사이에는 묘한 긴장이 존재한다”고 했다.
이어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는 두 나라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많이 가르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세상은 낯설고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사도 베드로의 말씀대로, 우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을 대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이라며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선한 행실, 그리고 삶의 방식의 증언이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삶의 방식이 육체의 정욕(욕심)을 따라 사는 것이었다면(엡 2:3),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된 신자들은 거류민과 나그네로서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한다’(벧전 2:11). 악행한다고 우리를 비방하는 세상이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도록 거류민과 나그네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불편함을 신자의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면서 말이다”라고 했다.
김 목사는 “신자는 거류민과 나그네이자 동시에 모범 시민으로 사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며 “이미 탈기독교 시대에서의 기독교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고민한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윌리엄 윌리몬은 1989년에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을 공저하면서, 신자는 불신앙의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나그네 된 거류민이라고 말했다. 월터 브루그만이 구약 시대에 바벨론에서 살아가던 유대인과 같이, 이 세상의 신자들은 ‘유수자’(exiles)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했다.
아울러 “우리가 거류민과 나그네의 삶의 방식을 적대적인 세상 앞에 보여 주기 전에, 먼저 일어나야 하는 일은 신자들인 우리가 이 세상에서 거류민과 나그네로 부름 받은 존재임을 자각하는 일일 것”이라며 “사도 베드로는 나그네의 신학을 신자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선택지 중 하나라고 말하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조국 땅에서 2등 시민으로 살아야 했던 우리의 역사적 경험, 슬픈 우리 근현대사의 과정에서 전 세계로 퍼져나가 살게 된 디아스포라 한인들의 삶의 역사는 우리가 나그네의 신학과 그리 멀리 있지 않음을 증명한다. 시대가 어렵다고 한탄하지만 말고, 우리가 나그네의 정체성을 회복함으로써 복음 안에 나타난 삼위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이 세상 앞에 풍성하게 보여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