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창12:7-10)
제가 2003년부터 섬기고 있는 인터넷 목회를 통해 신자들로부터 수많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가장 궁금해 하는 주제는 ‘구원’과 ‘기도’였습니다. 질문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수준을 알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이 성경이 계시하는바 진리와 멀다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잘 알지 못하니까 질문했겠지만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를 성경과 다르게 이해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그동안 기도의 능력 은혜 열매 등 긍정적인 측면은 더 보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충분히 가르쳐져 왔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미처 다루지 않아서 신자들이 기도에 대해 부족하게 이해하고 있는 부분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아브라함이 행한 기도부터 점검해보려 합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었기에 그가 행한 기도 안에 하나님의 기도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뜻이 드러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행한 최초의 기도
아브람은 먼저 세겜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습니다.(7절) 단을 쌓는다는 것은 예배를 드렸다는 뜻인데 예배드리면서 기도하지 않았을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여호와가 그에게 나타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약속을 주셨기에 감사의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이때는 성경은 물론 유대교도 형성되기 전이라 여러 방식의 직통계시는 일상적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아브람 쪽에서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달라고 간구한 것은 아닙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넓은 의미에서 보면 감사와 경배의 고백도 기도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면 절로 감사가 나오며, 그분의 위대하심을 맛보면 경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발적으로 기꺼이 행하는 감사나 경배에는 신자 쪽의 소망과 계획은 포함되지 않고 또 그래서 신앙적으로 잘못될 요소가 개입될 소지가 거의 없습니다.
반면에 신자들이 자신의 필요나 목적에 의해서 어떤 구체적인 내용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신자가 하나님 당신과 그분의 뜻과 당신의 백성을 다스리는 원리를 모르거나 오해하면 기도 또한 비성경적인 내용으로 변질 될 소지가 다분해집니다. 이런 이유로 아브람 쪽에서 하나님께 간구한 기도를 살펴봐야 하는데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8절)가 그런 기도입니다.
문제는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만 했지 기도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감사와 경배의 단을 쌓은 것은 아닙니다. 그분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자체가 뭔가 그분께 개인적으로 간구한 용건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너무나 위급한 상황에서 “주여! 주여!”라고 반복해 외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지금 너무 힘들어 죽겠으니 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제발 나를 건져달라는 내용이 생략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만 부른 것으로 아주 훌륭한, 아니 가장 순전한 기도가 됩니다. 생사가 걸린 마당이라 다른 아무 것도 필요 없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만 바랍니다. 이 사망의 골짜기에서 구출해 달라는 것 말고는 자기 이기심이나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계산이 전혀 섞이지 않습니다.
언젠가 간증한 적이 있는데 오래 전에 저희 가족이 록키국립공원에 차로 여행 갔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험준한 산의 꼬부랑길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아서 정말 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할 절대 절명의 순간이 닥쳤고 아내가 다급하게 “주여, 주여!”라고만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제가 의도적으로 핸들을 꺾어 차를 길가 언덕에 들이박았는데도 달려오던 속도 때문에 질질 미끄러져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큰 SUV가 그 낭떠러지 앞 공터에 주차하고 있었고 저희 차가 그 차와 충돌하면서 겨우 멈춰 섰습니다. 두 차만 손상이 갔고 아무도 머리털 하나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 큰 차가 마침 그 시간 그 자리에 서있게 된 까닭이 있었습니다. 그 동네에 사는 한 가족이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자기들만 알고 있는 산 밑의 폭포를 보고 싶어져서 그곳에 정차해놓고 계곡 밑에 내려가 있었던 것입니다. 저희가 목숨을 건지게 된 것을 확률로 따지면 수백만 분의 일도 안 될 것입니다. 이는 결코 우연의 일치일 수 없으며 하나님이 모든 상황을 미리 아시고 저희를 구해주려고 그 가족의 생각까지 주관하여 다 예비해 놓으신 너무나 큰 은혜였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렇게 미리 조치했다면 “주여! 주여”라고 외치지 않았어도 어차피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단순하게 판단해선 안 됩니다. 신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미리 다 아시는 하나님이신지라 만약 그렇게 외치지 않았다면 다른 시나리오를 마련해놓았을지도 모릅니다. 생명은 구해주되 크게 다치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아뢸 시간과 여유가 없다면 또 그런 시간과 여유가 있어도 너무 큰 절망에 휩싸여 제대로 기도가 안 된다면 ‘주여’라고 이름만 불러도 됩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입술의 말은 물론이고 마음의 생각과 깊숙한 심령의 상태까지 우리보다 더 잘 아십니다.
간혹 하나님이 신자의 형편을 다 알고 계시다면 구태여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냐라고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어떤 어려운 처지에 있는지 다 알고 있지만 자식이 먼저 도움을 청하길 기다립니다.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니 기도하지 않는다면 부모와 대화하는 것이 귀찮고 싫다는 뜻이 됩니다. 땅 속에 아무리 생수가 풍족하게 흘러도 우물을 파지 않으면 마실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당신만의 큰 권능으로 신자를 보살피고 계셔도 기도로 그 은혜의 생수를 퍼내어 마셔야만 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이유
아브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야만 했던 이유는 앞뒤 기록으로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가 거주하는 장소를 계속 바꾸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6절),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겼으나”(8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다”(9절)고 세 번이나 말합니다.
한마디로 아브람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번 옮겨 다니고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다고 약속하고 지시한 땅을 지나거나 떠나버렸습니다. 먼저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는데도(5절) 그 땅을 통과해 세겜 땅에 이르렀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라고 했으니 하란 땅에서 여호와의 지시를 받아서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을 거쳐 갔다고 합니다. 뭔가 만족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물론 세겜과 베델 둘 다 가나안 땅에 속하니까 처음부터 세겜으로 가라고 지시 받았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세겜의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렀는데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으므로”(6절) 다시 옮겼습니다. 아브람이 하란에서 얻은 사람은 나중에 가나안 9개 나라들이 전쟁을 벌일 때 보면 그의 집에서 기른 군사가 386명이나 되었습니다.(창14:14) 가나안 족속들로선 이방인인 아브람이 그만큼 많은 식솔들을 데리고 나타났으니 순순히 환영해주었을 리 없고 경계하면서 배척 핍박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겠다고 약속하신 ‘이 땅’은 세겜이라는 한정된 지역이 아닙니다.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준다고 했으니 가나안 땅 전체를 말합니다.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다는 설명도 나중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지 않을 때가 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먼 훗날 아브람의 후손으로 하여금 그 땅을 완전히 차지하게 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거기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나무인 상수리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우상 신의 산당이 있는 곳을 뜻합니다. ‘모레’라는 별칭의 뜻도 ‘종교적으로 가르치는 자’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우상을 숭배하고 아이를 산 채로 불에 태워서 바치는 갈대아 우르 땅이 너무 싫어서 떠나왔는데 가나안에서도 동일한 모습을 봐야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여호와는 특별히 우상 신들의 소굴에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로선 썩 내키지 않았겠지만 그곳에 단을 쌓고 감사의 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네 자손에게 주신다고 했다면 어쨌든 선조로 그곳에 정착해 가문을 일으키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세겜 사람들의 천대와 그곳의 음란하고 타락한 생활 여건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겼던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그곳에서도 제단을 쌓았는데 이 때 처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가 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는지 또 그가 기도한 내용이 밝혀졌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평을 토로했을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입경한 이후 지금껏 제대로 장막을 칠 만한 장소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들판이 아닌 산 위로 올라와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서 가나안으로 이끌면서 분명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고 약속했습니다. 아브람으로선 그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곳의 모든 사정이 특별히 영적인 상태가 자기가 떠나온 우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굳이 나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따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임시방편으로 가나안 사람들의 훼방을 받지 않는 산으로 올라왔지만 여전히 자신의 생업이라고 할 수 있는 목축에 적합하지 않은 곳입니다. 기도란 자신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를 아뢰는 것입니다. 그로선 지금 가나안 사람들의 방해가 없고 목축도 잘 할 수 있으며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거처가 절실합니다. 그래서 어서 빨리 자신의 식솔들이 온전히 자리 잡을 수 있는 장막 터를 달라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계속)
2022/1/2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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