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수 칼럼] 십자군과 까울레

한국교회는 언제 시작되었을까?(2)
전 미주장신대 총장 김인수 목사

경교가 한국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전회(前回)에서 기술한 바 있다. 만일 경교가 한국에 들어왔다면 한국 기독교의 역사는 1200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경교가 한국에 들어왔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그렇다면, 그 다음 한국과 기독교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올 가능성은 고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징키스칸으로 대표되는 몽골 제국이 아시아와 유럽에 이르기까지 파죽지세(破竹之勢)로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을 때, 이 상황을 다행스럽게 그러나 걱정스럽게 바라다보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로마 교황청이었다.

무함마드는 주후 610년 경 알라의 계시를 받고 이슬람교를 창시한다. 다신교 사회에서 유일신 알라를 선전하는 그를 박해하자, 무함마드는 622년 메카에서 메디나로 도망을 갔는데 이 사건을 가리켜 '헤지라'라고 한다. 따라서 622년은 이슬람 연대의 기원이 된다.

메디나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무함마드는 630년 메카 함락에 성공하여 이슬람 공동체를 형성하고 전투적 전도에 나선다. 이렇게 해서 아라비아 각지를 평정한 그는 그 세력을 넓혀 중동 지방을 넘어 유럽 지역까지 점령하면서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진격해 나갔다.

이슬람 세력은 급기야 주후 638년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이스라엘 각지에 세워진 성당 첨탑 높은 곳에 달린 십자가가 내려지고, 이슬람의 상징인 초승달 모형이 대신 올려졌다. 이렇게 근 400년 이상 지난 후 무슬림에 점령 당한 성도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 운동이 교황청 주도로 전개된다.

제1차 십자군이 1099년 예루살렘을 탈환 했으나, 주력군이 귀향한 후 다시 이슬람 군에 점령 당한다. 그 후 7차례나 거병했으나 모두 실패로 결말났다. 십자군은 십자가의 기치를 높이 들고 성도 탈환을 위해 진군하면서 각지의 무슬림들을 무차별하게 살육했다.

군인은 말할 것 없고, 부녀자, 노인 심지어 어린 아이까지 잔혹하게 진멸하고, 그들이 소유한 각종 보화를 탈취하였으며, 성폭행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무슬림들뿐만 아니라, 유태인들을 비롯해 나중에는 동방교회(희랍정교회) 교인들까지 죽이는 만행을 자행하기도 했다.

이 십자군운동에서 비롯된 기독교권과 이슬람권의 피로 얼룩진 원한은 오늘까지 이어져, 9·11사태를 비롯한 각종 테러와 자살폭탄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들은 여전히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기독교권에 대한 앙갚음의 칼날을 더욱 예리하게 갈면서 복수의 날을 갈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200여년에 걸쳐 해결하려 했던 무슬림 세력의 진멸과 성도의 탈환이라는 십자군의 목표는 좌절되었다. 십자군이 남긴 역사적 교훈은"교회는 땅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개인의 심령을 점령하는 것이다."였다. 성도를 탈환 한다는 명목으로 일으킨 십자군 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나면서 이슬람의 기독교에 대한 끝없는 원한만 남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동쪽으로부터 진격해 오는 몽골군은 십자군이 해결하지 못한 이슬람권을 초토화 시키면서 서쪽으로 진격해 오고 있었다. 이렇게 역사속의 숙적을 대신 물리쳐 주는 몽골군을 고마운 눈으로 바라다보는 곳은 십자군 운동을 선도한 로마 교황청이었다.

그러나 만일 몽골군이 이탈리아까지 진격해 온다면 자기들만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이에 교황청은 몽골군과 화해를 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내리고, 1245년 교황 인노세트 4세는 프랑스 리용에서 공회의를 개최하고, 몽골과의 화친을 위해 사절단을 파송하기로 결의하기에 이른다.

성 프란시스의 제자인 카르피니(P. Carpini)를 단장으로 한 3명의 사절단이 1245년 리용을 출발하여 이듬해 7월 몽골의 수도 카르코름에 도착했다. 이들은 몽골 황제 정종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교황의 친서를 전달했다. 그들은 넉 달이 지난 후 정종의 답신을 받아 1247년 가을 무렵 다시 유럽으로 귀환했다. 이로써 교황청과 몽골은 화친을 맺어 우호적인 관계가 정립되었다.

이처럼 가톨릭의 정식 사절단이 몽골을 다녀간 후 한동안 로마교회와 몽골과의 우호적인 관계는 지속되었다. 그런데 이런 우호적 관계가 지속되는 중 우리와 깊은 관계가 있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두 번째 교황청 사절인 프란시스칸 소속 신부 루브룩(W. Rubruck)의 몽골 파견이었다.

그는 1253년 몽골 수도 카르코름에 도착하여 몽골 황제 정종의 환대를 받았다. 정종은 루브룩 신부에게 친절을 베풀면서 겨울을 지내고 귀국하라고 권면하였다. 루브룩 신부는 여러 차례 정종을 알현하고 기독교 신앙을 전하려 했지만, 황제를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데는 결국 실패하고, 1253년 7월 귀국길에 올랐다. 루브룩 신부가 몽골을 다녀가면서 한국과 깊은 연관이 있는 일을 하나 남겼는데, 그것은 한국을 서구 세계에 처음으로 소개한 일이다.

그가 귀국한 후 여행기를 썼는데, 그 여행기 속에 교황청에 써 보낸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 편지에서 그는 자기가 중국 동북부에 있는 어떤 강(압록강)에 이르렀는데, 강 건너에 "까울레"(Caule)라는 나라가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까울레는 중국식 발음으로 "고려"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이 서구에 소개되는 첫 번째 일이다.

루브룩 신부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윌리엄 부커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 자신도 까울레(Caule)와 만스(Manse)라고 불리는 민족들이 사절단을 직접 목격했는데, 이들은 겨울이면 동결해 버리는 바다에 둘러싸인 곳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타타르 족들은 그곳을 침략할 수 있습니다."

루브룩 신부가 까울레라는 나라를 알렸는데, 이 "Caule"가 "Corea"가 되고, "Corea"에서 오늘의 "Korea"가 되었다. 그러므로 루브룩 신부는 한국 즉 "코리아(Korea)"가 있다는 사실을 세계에 알린 첫 번째 사람으로 기록된다.

역사에서 "만일"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만일 루부룩 신부가 압록강을 건너 한국 땅에 발을 들여 놓고, 전도하여 세례 교인을 획득했다면 그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시작이 되는 것이고, 한국교회의 역사는 12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될 터이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 오지 않았고, 복음도 전해지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이 때 전해지지 못한 복음의 흔적은 그 때로부터 약 400년이 지난 임진왜란 때로 내려가게 된다.

#김인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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