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할 이유는?
본문에서 정작 주목해야 할 사항은 예수님이 제자들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해주겠다는 이유입니다. 이 또한 간단하고 본문에 나와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간단히 말해서 그분이 통치하시는 시공간의 모든 영역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지 않았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 때까지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분의 영광을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대체하여 음란하게 숭배했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 유대인들마저 여호와와 함께 우상을 섬기며 온갖 죄를 범했습니다. 세상에 종교는 넘치도록 많았으나 사람들이 참 하나님의 참된 거룩한 통치는 끝까지 완악하게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삼년 간 거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직접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특별히 요한이 잡힌 후에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했습니다. 비록 헤롯이 요한을 체포했지만 유대 땅을 다스리는 왕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세상만사를 다스리는 유일한 왕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메시지는 참으로 민감한 주제입니다. 당시 상황에선 유대인이라면 쉽게 말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헤롯의 왕권이 부인되면 로마의 권위가 무너집니다. 그럼 로마가 지금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어도 로마 황제 또한 세상의 진짜 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칫 로마에 반기를 드는 메시지라고 오해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나중에 유대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처형해달라고 넘길 때 고소한 죄목이 바로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꿔 말해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에 처형당할 구실을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그들에게 당당하게 미리 알려준 셈입니다. 십자가에서 너희를 위해 죽으려고 이 땅에 왔고 이제 삼년 뒤면 너희를 살리려고 골고다로 올라가는 것을 너희가 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온 자들로 헤롯이 아니라 예수님만을 왕으로 모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고 그런 자들로 구성된 새로운 사랑의 공동체를 세상 속에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의 현실적 역사는 주님 오시기 전에도 하나님이 주관하셨지만 이젠 죄인들을 흑암에서 건져내는 새로운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약시대에도 이스라엘에게 당신만을 왕으로 모시는 나라를 세우게 인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은 아예 배척했고 유대인들끼리도 자기들이 만든 정한 기준에 따라 판단 정죄함으로써 하나님 나라 건국에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우실 새 왕국의 예표의 역할만 하고 그쳤는데 그마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들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제 참된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올해를 회상하는 마음은?
올해를 마감하는 이 시기에 여러분은 솔직히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현실적으로 풍요롭고 좋았던 일과 궁핍하고 나빴던 일,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았던 일과 반대로 억울하게 상처 받은 일, 예상치 않은 행운과 아니면 이유도 없이 불시에 닥친 불행 등만 떠올려서 그 무게만 비교하고 있습니까? 코비나로 인해 집에 묶여서 불편하고 생업에도 큰 손해가 있어서 힘들었던 것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좋은 일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고난과 억울한 일은 하나님이 왜 그런 일들을 허락했는지 따지고 의심 원망 불평하고 있습니까?
물론 올해는 누구에게나 정말로 힘든 일들이 많았습니다. 신자라도 세상 속에 살아야 하므로 당장의 생업과 현실 삶에 따라 감정적인 기복도 심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궁핍함과 가난함과 연약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죽을병에 걸려서 간절히 기도했더니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고 응답하시면서 십오 년을 더 살게 해주시는 분입니다.(왕하20:5)
그러나 주님이 오신 목적이 현실적인 복을 주시는 것이라면 공사역의 방향과 결과가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은 그와 완전히 정반대되는 결론입니다. 제자들도 체포될까 두려워서 뿔뿔이 흩어졌고 그들이 앞으로 엄청난 핍박을 겪을 것을 다 아시고도 주님은 항거는커녕 한마디 항변도 없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십자가야말로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현실 형통과 안락을 보장해주는 것과는 정반대의 표상이지 않습니까?
올해를 회상하면서 현실 삶의 문제에만 국한하면 엄밀히 말해서 불신자 시절과 전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서두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대로 올해를 살았는지 점검해봐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정말로 바울처럼 십자가 복음 안에 거하면서 복음으로만 살고 죽었는지 그래서 그처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살았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이 지금은 승천해서 하늘 보좌에 계시므로 바울과 같은 극적인 체험과 완전한 변화는 사실상 불가능 할 것이라고 여겨선 안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어떻게 약속했습니까? 당신께서 천국보좌로 돌아가는 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인데 그 이유는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이 오면 당신께서 가르치신 구원에 관한 비밀의 경륜을 더 정확히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 그러면 세상으로부터의 어떤 환난도 이겨내는 권능을 입고서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까지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행하신 일보다 신자들이 더 많이 할 수 있다고까지 보장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신약성경도 다 작성되지 않았고 극히 일부만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게 회람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구약 성경 66권이 완비되었기에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에 대해서 더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겸손해져 성령의 조명을 구하면서 성경을 통해 예수님과 그 대속 죽음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면 그분과 실제로 인격적인 대면이 일어납니다. 십자가 앞에서 나 자신의 너무나 가난하며 추악하며 벌거벗겨진 실존을 발견합니다. 성령이 간섭해 주어서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 깨끗하게 씻음 받고서 마음이 완전히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회심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럼 제일 먼저 생기는 반응은 삶의 목적과 방향이 이전과는 완전히 뒤바뀌는 것입니다. 본문 약속대로 주님이 그렇게 바꿔주십니다. 알기 쉽게 말해서 삶의 목적이 내가 고기를 얼마나 많이 낚느냐가 아니고 사람을 얼마나 낚느냐로 바뀐 자가 신자입니다. 생업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단지 수단으로 활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삶에서도 어떤 방식으로든 복음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하며 구원으로 초대하게 됩니다. 신자인데도 올해의 현실적 삶만 되돌아보는 것은 여전히 생업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탓일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살았는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일이 사도들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당신께서 가르치신 것을 지켜 행하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사도들이 제자들을 만들어 자기들이 행한 것처럼 하게끔 만들어야 하고 그 제자들도 자기들과 같은 제자들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 일이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이어집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서 죽었다 살아나는 체험을 하자마자 신자들을 체포하려 했던 그 다메섹 성에서부터 곧바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자기가 만난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키려 자기를 찾아왔고 또 그분만이 모든 인간이 반드시 믿고 따라야 할 구주임을 실제로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도 물론 하나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단순히 현실에서 먹고 마시는 차원에서만 주인으로 모셨고 나아가 자신의 도덕적 종교적 의를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는 용도로만 자기 믿음을 활용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종교적 명분만 있는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헛되고 헛되다 못해 사실상 영원한 죽음으로 가는 첩경임을 절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헤롯도 로마 황제도 세상의 왕이 아니라고 선포한 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이천 년 전에 이미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결과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예수님은 바로 내 곁에, 아니 성령의 권능으로 내 속에 이미 와있습니다. 실제로 주님과 말씀과 기도로 교제하며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다 보면 기쁨과 감사와 경배와 자유와 평강이 넘쳐납니다. 예수 믿은 이후의 삶이 정말로 이전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좋기 때문에 그 복된 소식을 예수를 모르는 이웃에게 어서 빨리 그대로 전해주고 싶어집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신자더러 올해 얼마나 전도를 많이 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그분이 신자를 판단하는 기준은 하나뿐입니다. 계속해서 복음을 소지하고 있느냐, 그래서 올해도 복음에 걸맞게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 있다면 자연히 복음이 가진 생명력으로 인해 예수님의 빛이 주변으로 새어나가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이 지닌 생명과 죽음으로 나누는 냄새는 자연히 주변에 번져 나가므로 초대교회 때처럼 복음의 염병을 세상 어떤 세력도 막을 수 없습니다.
죄송하게도 신자들은 올 연말에도 어김없이 현실 문제만 회상하고 있겠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남은 자 한 명이라도 찾고 계십니다. 물론 하나님이 현실적으로 올해도 어김없이 바로 내 곁에 항상 계셨습니다. 좋은 일에만 그분이 함께 해주셨거나 나쁜 일에는 그분이 부재했던 것이 아닙니다. 올해에 돈이 조금 부족하다고 해서 주님이 나를 덜 사랑한 증거도 아니며 돈이 많다고 해서 더 사랑한 증거도 아닙니다. 그러나 신자가 올해도 믿음으로 현실문제 해결에만 급급했다면 정작 신자가 누려야 할 복음의 생명력은 자기 주변은커녕 자기 자신에게도 전혀 발휘되지 못했습니다.
신자의 믿음을 판별하는 기준도 간단합니다. 세상에 아무리 돈과 권력과 명예가 많아도 예수가 없다면 전혀 부럽지 않고 오히려 너무 불쌍하게 여겨지는지 여부입니다. 돈 권력 명예가 쓰레기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불신자들도 인간 세상을 위해서 선한 일을 많이 합니다. 그들이 유달리 욕심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예수 십자가를 모르기에 무슨 일을 해도 참된 만족이 없을 뿐입니다. 영혼의 평강은 없고 항상 갈급합니다. 더더욱 불쌍한 점은 그들은 그 원인을 끝까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를 믿기 전과 후를 비교해보고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와 원인과 그 해결책이 무엇인지 깨달은 자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죽을 고비를 많이 겪고도 끝까지 그의 마음에 안타깝게 걸리는 것이 연약한 교회와 성도와 아직도 미혹된 영혼들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이 있는지가 바로 순전한 믿음의 척도입니다.
예수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에겐 참 생명이 그 안에 없습니다. 정말로 인간답게 살지 못합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된다는 것이 단순히 전도를 많이 해서 기독교 교세를 많이 늘리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 흑암 속에 갈 바 모르고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려져 있는 이런 자들을 단 한 명이라도 예수님의 참 빛 쪽으로 건져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구약 이스라엘의 실패를 다시 되풀이해선 안 됩니다. 절대로 어떤 사람이라도 외모로 판단해서 차별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로만 대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올해 연말은 이렇게 회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올해 내가 행한 일과 내 삶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했을까, 십자가로 마음 문을 열게 하는데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 최소한 그런 일을 위해서 얼마나 많이 기도했는가, 기도마저 할 시간이 없었다면 내가 온전한 어부가 되도록 얼마나 많이 말씀을 공부하며 묵상했는가, 혹시라도 내 코가 석자라 신자의 본분을 잊고 있거나 등한히 했어도 계속해서 현실 고난보다 사람 낚는 어부라는 정체성이 마음의 가장 큰 짐이 되어 있었는가?”
하나님께 감사할 일도 현실 풍요보다는 그 일을 하는데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기회와 사람들과 자원과 지혜를 부어주셨는가 여부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연말을 보내는 신자의 태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현실의 고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왜 그런 일에 더 많이 쓰임 받게 해주지 않았느냐고 원망 불평하는 것입니다. (끝)
2021/12/12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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