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도 목사와 김일성의 관계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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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목사(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손정도는 감리교 목사이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임시의정원 의장(현, 국회의장에 해당)을 지낸 독립운동가다. 따라서 그의 삶은 기독교와 독립운동의 두 영역에서 많은 자취를 남겼으며, 이로 인해 ‘신앙적 양심에서 민족 구원의 책임감으로 자신을 희생한 목사’(남한, 이덕주) ‘그리스도교 정신을 독립운동으로 승화시킨 애국의 거성’ (북한, 최상순) ‘악에 대한 저항과 투쟁의 조선 신학을 수립한 인물’(중국, 원시희) 등 남북한은 물론 중국 조선족 사회에서도 존경을 받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직 손정도를 미스터리한 인물로 인식하는 경향이 존재한다.

임시정부 시절의 손정도 목사 - 좌는 도산 안창호, 우는 우남 이승만과 함께 ©김형석 교수 제공

그것은 김일성과의 부정확한 일화가 휴먼스토리로 회자되고 있기 때문이다. 손정도와 김일성의 관계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1992년 북한의 조선노동당출판사에서 '김일성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가 출판되면서부터이다. 이전에도 손정도 목사의 가족과 지인들에 의해 단편적으로 일화들이 소개된 적은 있지만, 『세기와 더불어』에 「손정도 목사」라는 별도의 절을 만들고 다양한 일화를 소개한 사실이 알려지자 연구자들은 물론이고 일반 독자들에게도 큰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 때문에 북한의 대표적인 '손정도 연구자'인 최상순은 「손정도 목사는 그리스도교정신을 독립운동으로 승화시킨 애국의 거성」이라는 글에서 김일성이 손정도 목사를 항일독립운동사에서 부활시켰다고 주장한다.

"손정도 목사님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우리나라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차지하는 그 분의 응당한 지위와 역할을 정확하게 평가하기 위한 사업이 활발하게 벌어지게 된 데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2권의 맨 앞에 <손정도 목사>라는 독립된 절을 설정하고 소개한 것과 때를 같이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수령님께서는 회고록에서 손정도 목사님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높이 일러주시고 세상에 널리 소개해 주심으로써, 역사의 망각 속에서 점차 희미해지던 손정도 목사님을 다시 민족사의 복판에 세워주셨습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교적인 의미에서 볼 때 손정도 목사님은 우리 수령님에 의해 부활하셨습니다."

김일성의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는 편년체로 기술된 역사서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모두 8권에 총 24장으로 구성되었다. 손정도 목사와 관련된 내용은 1권 제3장 「길림시절」 중에서 10절 "철창 속에서"와 제4장 「새로운 진로를 탐색하던 나날에」 중에서 1절 "손정도 목사"이다.

그 가운데『세기와 더불어』 2권의 첫 머리에 나오는 「손정도 목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만주의 정세가 매우 험악한 때에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감옥을 나와 내가 맨 처음 찾아간 곳은 우마항에 있는 손정도 목사의 집이었다. 일곱 달 동안 꾸준히 옥바리지를 해온 손정도 일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고 떠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였다. 손정도 목사는 자기 자식이 감옥에 있다가 나온 것처럼 기뻐하면서 나를 맞아 주었다."(2권, pp.1-2)

1930년 5월 7일 길림감옥에서 출옥한 김일성은 곧장 손정도 목사 집으로 찾아갔다. 그것은 손정도 목사가 옥고를 치룰 때, 자기를 옥바라지해주고 석방이 되도록 도와 준 은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이다.

"(손정도) - 군벌이 자네를 일본 놈들에게 넘겨줄까봐 우리는 가슴을 조였네. 형을 지지 않고 무사히 풀려 나왔으니 천만다행일세."

"(김일성) - 목사님께서 후원을 잘해 주신 덕에 저는 감옥생활을 한결 헐하게 했습니다. 저 때문에 옥리들에게 돈도 많이 찔러주셨다는데 그 신세를 무엇으로 갚을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의 은혜를 일평생 잊지 않겠습니다."(2권, p.2)

김일성은 이렇게 손정도와의 인연을 회고한다. 그리고 1991년에 손정도 목사의 차남 손원태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그를 만난 김일성은 '손정도 목사님은 나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부연 설명한다.

"(9.18사변 후) 길림을 점령한 일본 군경들은 그때 나부터 찾았다. 그들은 길림감옥의 명부를 뒤지면서 군벌들에게 김성주를 넘겨달라고 요구하였다. 손정도 목사를 비롯하여 고원암, 오인화, 황백하와 같은 독립운동자들의 후원으로 감옥에서 제 때에 석방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붙잡혀 10년쯤 옥중생활을 더했을 것이다. 10년만 철창 속에 더 갇혀 있었더라면 무장투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손 목사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2권, pp.15-16)

위의 설명은 김일성의 석방을 뒷바라지 한 손정도 목사의 헌신적인 수고가 '김일성의 항일 무장투쟁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은 역사 발전 과정을 김일성의 항일무장혁명사와 연결시키는 전형적인 주체사관의 서술방법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필자는 아주 불편한 '역사적 사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정말로 손정도 목사는 옥리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김일성을 구출했을까?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면 그동안 한국교회사에서 만난 손정도 목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평소 그는 모범적인 '신행일치의 삶'을 살아가면서 개인들의 '종교적 정화'가 사회의 '윤리적 성화'로 이어진다고 설교하던 목회자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손정도 목사가 김일성을 감옥에서 구해내기 위해 옥리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주장은 액면 그대로 믿기가 어렵다.

이에 대해 <김일성 회고록>은 그 이유를 손정도 일가와의 특별한 인연으로 설명한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김일성이 회고하는 손정도 목사 일가에 얽힌 일화들을 살펴보자.

"나는 감옥생활 할 때 손정도 목사한테서 많은 방조를 받았다. 손 목사는 내가 길림에서 혁명 활동을 한 전 기간 나를 친혈육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후원해 준 사람이었다." "손정도(목사)가 류길학우회 고문이었으므로 그와 자주 상통하였다. 그는 나를 만날 때마다 우리 아버지가 너무도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나신 것이 분하고 애석하다면서 아버지의 뜻을 이어 독립운동 선봉에 서서 민족을 위해 투신하라고 격려하곤 하였다." "손정도 목사는 어머니의 삯바느질로 겨우 유지되어가는 우리 집의 구차한 살림살이를 걱정하면서 나에게 학비를 여러번 보태주었다. (손) 목사의 부인도 나를 몹시 사랑해주었다. 명절 때면 나를 청해 다가 조선식으로 맛있는 음식도 해주었다."- (1권, pp.354-355)

이런 설명은 손정도가 옥리를 매수하여 김일성을 구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변증이다. 『세기와 더불어』는 1권에서 이렇게 손정도 일가와의 인연을 소개한 후 2권에서는 다시 김일성의 항일혁명사와 연결을 짓는다.

"그는 새 세대 청년들과도 잘 어울렸으며 젊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성의를 다하여 후원해주었다. 그가 교직을 차지하고 있는 대동문 밖의 예배당은 우리의 전용 집회 장소나 다름없었다. 나는 이 예배당에 자주 찾아가서 풍금도 타고 연예선전대의 활동도 지도하였다. 손정도 목사가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면 무엇이건 다 해결해 주고 우리의 혁명 활동을 충심으로부터 지지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친아버지처럼 따르고 존경하였다. ... 손 목사는 나를 친구의 자식으로 뿐 아니라, '일가견을 가진 혁명가'로 대해 주었다. 그는 독립운동자들 속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어 해결을 보지 못하는 어려운 가정문제까지도 내 앞에 서슴없이 털어 놓고 조언을 구하였다."(2권, p.6)

​그런데 여기서 또 다시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손정도 목사가 공산주의 혁명을 후원하면서 10대 후반의 김일성을 '일가견을 가진 혁명가'로 대해주었다는 말도 믿기가 어렵지만,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독립운동가들 속에서 해결하지 못한 가정문제를 김일성의 도움으로 해결했다는 말이다. 김일성이 말하는 손정도의 가정문제는 맏딸 손진실과 윤치호의 이복동생 윤치창의 혼사와 관련한 문제이다.

"그 당시 손 목사는 맏딸 손진실과 윤치창과의 혼사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길림의 독립운동자들은 누구나 그 혼사를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손 목사 자신도 딸이 배우자를 잘못 선택하였다고 못마땅해 했다. 그는 딸이 윤치창에게 시집을 가게 되면 가문 망신을 시킨다고 생각하였다. 윤치창은 친일파이며 매판 자본가인 윤치호의 동생이었다. 목사가 딸을 설복하지 못해 속을 썩이고 있을 때, 독립군 보수파들이 윤치창에게서 자금을 뽑아내려고 한 주일동안 그를 억류하였다. '이 사람. 이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손 목사는 내 의향을 물었다. 나는 어른들의 혼사에 간참하는 것이 주제 넘는 일 같아서 얼마간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하였다. '저희들끼리 눈이 맞아서 연애를 하는데 떼놓을 방도가 없지 않습니까. 본인들의 의향에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런 조언을 해준 다음 독립군 보수파 인물들을 설복하여 윤치창을 풀어주도록 하였다."(2권, pp.6-7)

​이에 대해 국내 북한학계에서 '김일성 연구'의 개척자로 인정받는 고 이명영 교수는 『세기와 더불어』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당시 손정도 목사는 49세, 金은 18세였다.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장까지 지낸 독립운동의 대 원로가 아들 뻘 밖에 안 되는 사람에게 딸의 결혼 문제를 의논했다는 것이다. 1920년대 후반은 윤치창이 미국에 유학하고 있을 때여서, 만주에 갈 턱도 없고 독립군에게 붙잡힐 일도 없었다. 이때 손진실은 건축학을 전공하던 외삼촌 박인준을 따라 미국에 유학 중이었는데, 외삼촌의 소개로 윤치창을 만나서 아무 잡음 없이 1929년에 결혼했다."

이명영은 <김일성 회고록>의 오류를 지적한데 덧붙여 김일성이 투옥 당했다는 자체가 날조되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김일성의 옥중 투쟁에 관한 북한의 주장은 1946년 한설야가 김일성의 구술로 지은 『김일성 전기』부터 1952년 『김일성 약전』, 1958년의 『해방투쟁사』, 1973년의 『정치사전』까지 그 시기와 기간이 모두 다르다. (이명영, 『세기와 더불어는 어떻게 날조되었나』도서출판 세이지, 2021, pp.51-52)

 ©김형석 교수 제공

국가가 역사 편찬사업을 통제하는 전체주의국가 북한에서 그것도 수령의 혁명 활동에 관한 시기가 다르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이 때문에 김일성의 투옥사건이 사실인지, 왜곡되었는지 검증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세기와 더불어』 제4장 1절 '손정도 목사' 바로 앞의 제3장 10절에는 김일성의 옥중투쟁을 다룬 '철장 속에서'가 수록되었다. 이곳에 소개된 내용을 살펴보자.

"나는 옥중에서도 투쟁을 멈추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혁명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감옥은 하나의 투쟁 부대라고 할 수 있다. 감옥을 단순히 죄인을 가두어두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피동에 빠져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감옥을 '세계의 한 부분'이라고 여기게 되면, 그 비좁은 공간에서도 혁명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옥중에서 투쟁을 벌이자니 외부와 연계를 취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것을 해결하자면 간수를 교양하여 우리의 동정자로 만들어야 했다. 간수들을 쟁취하려는 나의 의도는 예상 외로 쉽게 이루어졌다."(1권, pp.349-350)

이어서 김일성이 길림감옥에서 간수들을 굴복시킨 사실을 소개하는데 그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김일성은 길림감옥 간수들 가운데 성격이 온순한 李 간수는 동생 약혼식 때 례장감을 마련해주어 순종케 하였고, 난폭한 간수장은 뾰족하게 깎은 참대 젓가락으로 눈을 찔러서 굴복시켰다. 그 후로 간수들은 학생들의 요구에 굴복하였고, 학생들은 감방에서 하고 싶은 것을 다하였다. 심지어 학생들이 감방에서 나가겠다고 말하면 간수들은 어서 가보라고 문까지 열어주었다.(1권, pp.351-4)

한 마디로 소설 같은 황당한 이야기다. 이런 일화를 검증도 없이 사료로 채택하는 것은 부적절한 일이다. 그렇지만 국내 역사학계에서는 '김일성 회고록'의 내용을 검증 없이 그대로 인용해 온 것이 지금까지의 관행이었다.

김일성 투옥사건의 진실을 확실하게 검증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손정도 목사 일가의 증언이다. 그런데 손원태의 '회고록'과 손인실의 '전기'에는 김일성과 관련한 여러 일화들을 소개하면서도, 정작 김일성의 감옥생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게다가 세간에서 김일성의 옥바라지를 한 것으로 알려진 손인실은 생전에 그런 적이 없었다고 부인했다.(<경향신문> 1994.12.18일자 6면)

​그러면 왜, 손정도 목사 가족은 김일성의 감옥생활에 대해 부인하였을까? 이유는 김일성이 투옥되었다고 주장하는 시기(1929.10-1930.5)에 길림에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신병 치료 차 봉천의 동복대학병원에 입원한 둘째 딸 손성실을 간병하려고 1929년 1월에 봉천으로 이사했다가, 1930년에 다시 북경으로 이주하였다.

손정도 목사 가족- 손정도, 부인 박신일, 장녀 손진실(우측), 장남 손원일(왼쪽), 차남 손원태(가운데) ©김형석 교수 제공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주목되는 것이 손원일의 회고담이다. 그는 1991년 한국일보에 전재한 회고록에서 김일성이 길림에서 투옥되지 않고 도주한 것으로 증언하였다.

"김성주(김일성)는 1929년 5월까지 길림에 있다가 전부터 연고가 있는 극렬 좌익의 군소 독립군 부대이던 이종락 부대 휘하로 도망쳐갔다."(손원일, "나의 이력서⒀" 한국일보, 1991.10.16)

따라서 김일성의 옥중생활에 관한 얘기는 주변 정황상 맞지 않는 내용이 대부분이고, 출처도 불분명하다. 김일성의 일방적인 주장일 따름이다.

그러면 손정도 목사와 김일성의 실제 관계는 어떠했을까? 손정도와 김일성의 처음 만남에 관한 기록은 1991년에 평양을 방문한 손원태가 김일성을 만나 나눈 대화에 등장한다.

"나는 길림에 가서 우리 아버지와 친한 사이였고 연계가 깊었던 손정도 목사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손정도 목사의 집은 길림시 우마항에 있었습니다. 내가 찾아가니 손 목사는 몹시 반가워하였습니다....나는 김강의 소개로 시험도 치지 않고 길림 육문중학교에 입학하였는데 한 학년을 뛰어넘어 2학년에 편입하였습니다."

이 대화의 내용처럼 손정도 목사가 김일성의 학업을 도와 준 배경에는 '숭실중학교 동문'인 그의 아버지 김형직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나이차가 열두 살인 손정도 목사와 김형직은 숭실중학교를 함께 다닌 적은 없다. 그러나 김형직이 국민회에서 활동하던 1917-18년 어간에는 손정도가 서울의 정동교회를 사임하고 평양에 내려와서 중국 망명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 두 사람이 교류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런 추측에 근거하여 손정도와 김일성 사이에 여러 일화가 등장하였다.

그런데 손원태는 "1925년 길림에서 고려혁명당을 출범시키기 위한 회합이 열렸을 때, 손정도 목사가 김형직을 깊이 알게 되고 남다른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증언한다. 이것은 손정도 목사와 김형직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새로운 주장으로 주목된다. 손원태는 김일성과 만나 나눈 대화를 소개하면서 손정도와 김형직의 관계 뿐 아니라, 김일성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일화를 증언하고 있다.

"손정도 목사는 우리 아버지와 친한 사이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니실 때부터 손정도 목사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우리 아버지는 평양에서 105인사건 때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그때 손 목사도 감옥에 잡혀 들어갔습니다. ... 우리 아버지는 감옥에서 나온 다음 중강으로 가셨습니다.... 아버지는 거기에서 오동진과 손 목사를 비롯한 여러 동지들과 연계를 가지고 활동하셨습니다."(손원태, 「내가 만난 김성주 - 김일성」, 동연, 2020, p.63)

위의 내용은 1991년 손원태를 만난 김일성이 두 집안의 인연을 소개한 대화이다. 김일성이 손원태에게 말한 것처럼 각색이 된 대화에 "우리 아버지는 105인 사건 때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주장은 '105인 사건'의 자료는 물론 『세기와 더불어』에도 근거가 없다. "우리 아버지는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니실 때부터 손 목사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는 주장도 김형직이 숭실중학교를 다니던 시기(1911-1913)에 손정도는 중국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전남 진도로 유배된 사실과 배치된다. "김형직이 감옥에서 나온 후 중강에서 손정도와 연계를 가지고 활동했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손원태가 전한 김일성의 얘기는 전부 다 신뢰하기가 어렵다.

한편 <손원태 회고록>에서 "손정도 목사가 김형직을 깊이 알게 되고 남다른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25년 길림에서 고려혁명당을 출범시키기 위한 회합이 열렸을 때였다"고 한 증언도 신뢰할 수 없다. 고려혁명당은 1926년 3월부터 정의부의 양기탁·현정경·오동진 등과 소련파인 이규풍·주진수, 천도교혁신파·형평사의 김봉국·이동락 등이 논의를 거듭한 결과 4월 5일 창당하였다. 손원태가 말한 1925년 출범과 시기적으로 맞지도 않고, 이제까지의 연구 성과는 김형직이 고려혁명당 결성을 주도했다는 근거도 없다. 손정도가 고려혁명당 창당에 간여했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이 같은 점들을 고려할 때, 김일성과 손정도 목사의 관계를 '김일성 회고록'에 의존하여 판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김일성 회고록인『세기와 더불어』에서 손정도 목사와의 관계를 강조한 것은 다른 정치적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김일성의 혁명사를 서술할 때, 1926년 소위 'ㅌㄷ사건'(타도제국주의동맹 사건) 이후 1931년부터의 유격대 시절까지를 연결해 줄 징검다리로서 길림감옥의 옥중 투쟁 경력이 필요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국의 독립과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손정도 일가의 헌신 ©김형석 교수 제공

필자가 지난 한달 여 국립중앙도서관의 통일부 북한자료센터에서 김일성 일가에 관한 자료를 살펴본 결과 나름으로 얻은 결론은 손정도 목사와 김형직과의 관계는 동향 출신의 후배이자 숭실중학교 동문으로서의 친분관계 이상으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발견할 수 없었다. 김일성과의 관계 또한 김일성이 손정도 목사를 찾아가 길림에 유학하는 동안 경제적 도움을 받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손정도 목사 입장에서는 목회자로서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도와 준 것이지, 김일성을 전도유망한 혁명가로 인정해서 특별대우를 해준 것은 아니다. 특히 감옥에 갇힌 김일성을 옥바라지하고 뇌물을 써서 구출해주었다는 일화는 완전히 날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처럼 북한은 위대한 항일 민족운동가 손정도 목사를 '김일성 우상화'를 위한 회고록 집필에 활용하였다. 때마침 북한을 방문한 여든살 고령의 손원태에게 회고록을 집필하도록 권유하고, 북한 학자의 도움을 받아 완성케 한 것도 주체사관 정립을 위한 일련의 과정이었다. 그 결과 기독교민족운동가 손정도 목사는 어느 듯 기독교사회주의자로 변모되었다.

더욱이 손정도 목사가 말한 '기독(基督, 그리스도의 한자어)의 사회주의'는 신약 성경 사도행전 2장에 소개된 '초대 교회 공동체'의 신학적인 해석인데, 일부 연구자에 의하여 '기독교사회주의'로 오역되면서 그가 기독교사회주의를 설파한 것으로 오해를 받게 되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올곧은 성품과 걸레정신으로 조국 독립을 위한 희생적 삶을 산 손정도 목사가 사회주의자라는 오해를 벗고, 민족운동가로서 올바르게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해군과 해병대 창설 당시 진해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과 손원일 제독(1948.10) ©김형석 교수 제공

*이 글은 필자가 2021년 11월 26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개최된 '애국지사 손정도 목사 기념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역사적 인물 손정도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의 일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김형석 목사(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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