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내년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외교적 보이콧 방침을 공식 결정한 데 이어 반인권 행위를 문제 삼아 북한에 대한 새로운 경제 제재를 발표했다. 미국 정부의 이 같은 일련의 조치들이 한반도 평화 이슈를 ‘종전선언’으로 매듭지으려던 문재인 정부의 외교 안보 구상에 커다란 암초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미국의 베이징 올림픽 보이콧은 사실 이미 예견됐던 일이다. 신장 위구르족 학살 등 반인도적 인권 범죄가 벌어지고 있는 중국에서 열리는 올림픽 개·폐회식에 인권 외교를 표방하는 바이든 행정부 대표가 참석한다는 자체만으로도 미국이 중국의 인권 탄압을 정치 외교적으로 묵인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어서다.
사실 전 세계 스포츠 제전인 올림픽에 정치적인 이슈가 개입하는 것을 바람직하다 할 수는 없다. 4년마다 돌아오는 올림픽만을 바라보며 땀 흘려 준비해 온 선수들을 정치적 희생제물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미국은 올림픽에 선수단은 정상적으로 파견하되 개·폐막식 등 행사에는 외교사절을 일절 보내지 않기로 함으로써 올림픽 정신을 훼손했다는 비난은 피해 가려 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올림픽을 6.25 전쟁 당사자인 남·북·미·중 4개국 정상이 한데 모여 ‘종전선언’을 하는 무대로 만들려던 정부의 구상이 단단히 꼬이게 됐다는 점이다. 미국이 정치 외교적 보이콧을 선언하며 중국행을 거부한 데다 다시 북한을 새로운 제재 대상에 올림으로써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김정은과 손잡고 한반도 평화를 합창하려던 부푼 기대는 사실상 물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이뿐만 아니라 미·중 간의 갈등 속에 어느 편에 서야 할지 양자택일을 앞에 둔 정부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결정 장애에 빠지게 됐다.
정부로서는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어느 나라 정상이 오고 못 오고 하는 문제보다 문 대통령이 공들여 온 ‘종전선언’의 무대가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다는 게 더 안타까울 것이다. 정치적 업적을 이벤트 무대에 올리기를 좋아하는 문 정부의 특성상 평창 동계올림픽에 이어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쏠리는 세계의 이목을 절호의 기회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중국의 인권 문제로 올림픽 불참을 선언한 데다 새로 북한에 대한 추가 제재를 발표한 것이 결과적으로 엎친 데 덮친 격이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문 대통령은 13일 한·호 정상회담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베이징 올림픽의 외교적 보이콧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개막식에 참석하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미국처럼 아예 불참하지는 않겠다는 의사표시지만 그 어떤 결정도 최종 목표인 ‘종전선언’의 성사에 무게를 싣기 어렵게 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문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과 교황 방문, G7 정상회의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종전선언’을 이슈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 왔다. 최근에는 미국과 중국에 외교부 차관과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각각 보내 미·중 양국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힘을 쏟는 등 임기 말 마지막 과업 완수에 모든 초점을 맞춘듯한 모습이다.
그러나 미국이 올림픽에 정치적 불참을 선언하고 북한도 IOC의 규제로 참가가 어려워진 이상 ‘종전선언’의 최고의 무대라고 여겼던 베이징 올림픽 스타디움은 의미가 없게 되고 말았다. 여기에다가 최근 미국 조야와 의회에서까지 비핵화 진전 없는 성급한 ‘종전선언’에 대해 반대하는 기류가 점점 강해지고 있어 미국 정부의 동의에 목을 걸고 있는 정부의 입지를 더욱 좁히고 있다.
미국의 소리(VOA)에 따르면 지난 9일 미국 공화당 하원의원 35명이 바이든 행정부에 6.25 한국전쟁 종전선언을 반대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동맹국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종전선언’에 의회 의원들까지 나서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한 것은 결코 단순하게 볼 문제가 아니다. 미국 조야의 시각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문 정부로서는 ‘종전선언’을 놓고 여야 대선 후보들 간에 극명한 온도 차를 보이고 있는 것도 영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다. 단순히 여·야, 진보·보수 간의 선명성 경쟁으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의미에서 보면 그만큼 국민 여론이 한데로 모이지 않고 있는 반증으로 해석될 수 있어서다.
‘종전선언’이란 말 그대로 전쟁이 끝났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 대통령과 정부는 ‘종전선언’을 완전한 종전을 이루기 위한 시작 단계의 정치적 선언으로 해석하고 있다. 법률적으로 효력이 없고, ‘종전선언’을 하더라도 군의 대비태세와 같은 기존의 정전체제는 그대로 유지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종전선언’이 정부의 말대로 정치적 선언 그 이상의 의미가 아니더라도 하고 나면 북한의 주장대로 미군 철수의 명분으로 작용할 거라는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그동안 정전체제를 유지·관리해왔던 유엔군사령부의 존재 의미가 사라지게 되고 결국 해체로 이어질 경우, 한반도의 안보 불안만 야기하게 될 거라는 주장이다.
정부는 ‘종전선언’이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를 위한 첫 걸음이라는 설명이다. 그런데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에 반색하고 있는 북한은 벌써부터 자신들에 대한 적대시 정책 철회를 선결 조건으로 못 박은 지 오래다. 즉 한미연합훈련과 주한미군 철수를 직접 겨냥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현실을 놓고 볼 때 정치적 선언만으로 항구적 평화가 올 거라고 기대하는 정부의 태도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언제든 깨질 수 있는 게 평화다. 그런 점에서 실효성도 없고 북한에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게 뻔한 ‘종전선언’을 이 시점에서 왜, 무엇 때문에 해야 하는지 국민 앞에 좀 더 솔직하게 밝혀야 할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