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돈영 목사(BASE성경교육원 공동대표, CTS라디오조이‘찬양의자리’ 진행자)가 8일 복음과 도시 홈페이지에 ‘요소수의 절실함 그리고 기쁨’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김 작가는 “요즘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있다. 바로 요소수다. 경유 차에 넣어서 배기가스를 분해하는 역할을 한다. 보통은 요소수의 존재 자체도 몰랐으나 소위 ‘요소수 대란’을 통하여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다”며 “품귀 현상으로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요소수를 좀 전에 가득 넣었다. 차량 계기판에 요소수 부족을 알리는 불이 들어와서 긴장하고 있었는데, 가득 채우고 나니 뭐라 말할 수 없는 평안함마저 든다”고 했다.
이어 “그런데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이 든다. 가는 곳마다 품절이라 구하기 어려운 요소수를 얻은 기쁨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느끼지 못할 것”이라며 “시동 걸 때마다 알람이 들어오고, 계기판에 있는 경고등을 보면서 언제 멈출지 모르는 차를 운전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절박함이 없이는 절대로 맛볼 수 없는 기쁨이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는 “씁쓸한 첫 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귀한 요소수를 얻은 기쁨, 그러면 구원의 기쁨은?’이라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라며 “‘구원의 기쁨’, 물론 누구도 구원의 기쁨이 없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을 듣는다면 멈칫할 것이다. 그 기쁨을 삶에서 누리고 있는가? 지금도 느끼고 있는가? 그만큼 구원의 기쁨은 현실과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안개와 같이 뿌옇고 추상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고 했다.
이어 “왜 구원의 기쁨이 없는가? 왜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가? 아니다. 이 질문이 더 와닿을 것 같다. 요소수에서는 왜 기쁨을 느끼는가? 대답은 간단하다”며 “‘차가 멈출 수 있었는데 큰 문제가 해결되었다.’ 혹은 ‘구할 수 없는 귀한 것을 구했다.’ 앞에 던진 질문에도 답은 비슷할 것이다. 사실 이러한 대답은 결국 절박함, 절실함이라는 말로 귀결된다. 절실하게 원하는 것을 얻었기에 기쁜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그렇다면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우리는 절실함이 없다는 말이 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영원한 생명을 주신 구원의 은혜는 세상 무엇보다 귀한 것이다’라는 사실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라며 “그게 귀하고 중요한 것인지 모르기에 절실하지 않은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결국은 구원이 현재 나의 삶에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말일 것이다. 구원이 삶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한 성경을 믿지 않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라고 말씀하신 약속과 그것을 어긴 첫 사람의 죄를 믿지 않는 것이다. 죄로 인해 영원한 죽음에 놓인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에 긴장감이 없는 것이다. 경고등을 보는 듯한 떨림이 없는 것이다. 마음에 긴장과 떨림이 없기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라는 말씀에 기쁨이 없는 것”이라며 “죄를 모르고, 죽을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데 구원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이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여전히 같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사는 것이다. 죽으면 하나님 나라에 갈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만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배와 찬양을 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지만, 그것이 삶에 투영되지 않는 것이다. 믿는 것이라 착각하며 사는 것이다. 야고보는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1:22)라고 말씀한다. ‘이만하면 잘 믿고 있어’라고 자신을 속이며 살기에 구원이 삶에 별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김 목사는 “우리는 오직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다른 길이 없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가”라며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혈루증 여인은 다른 모든 문제를 ‘나중에’라는 곳, 차순위로 보냈다. 눈에 보이는 우선순위를 향해 나아간 것이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높은 벽을 넘게 했고,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의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뚫을 수 있게 했다. 실패할 경우 돌아올 모든 결과를 뛰어넘어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한마디로 ‘절실함’으로 행동했다는 것이다. 절실함, 다르게 말하면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이다. 그 믿음이 그를 이끈 것이고, 앞만 보고 가게 한 것이다. 기쁨을 가져다준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이다”고 했다.
이어 “우리는 어떤가? 정말로 구원이 없으면 안 되는가? 그런 절실함이 있는가? 요소수가 떨어지면 차를 움직일 수 없다는 절실함, 예수님만이 오랜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절실함 말이다. 그 절실함으로 인해 눈에 보이는 장애물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것을 찾았을 때 진정한 기쁨을 느끼며 평안을 누리는 그 절실함이 있는가 말이다”라며 “우리에게 진짜 믿음이 있다면 우리의 삶도 그러해야 한다. 우선과 차선의 구분이 명확해야 한다는 말이다. 급하게 생각되는 그 무엇도 절실함보다 앞설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절실한 것을 가장 먼저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한 가지 더 씁쓸한 것은 많은 사람이 요소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라며 “경유차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도 요소수가 무엇인지 궁금해 한다. 평소에 신경도 쓰지 않았던 요소수를 알게 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요소수로 인해 난리가 났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요소수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이 요소수를 찾기 위해 헤집고 다녔기 때문이다. 절실한 사람들의 행동으로 인해 관심도 없던 사람들마저도 궁금해 하고 관심을 쏟게 된 것”이라고 했다.
이어 “우리는 전도를 위해 많은 힘을 쓴다. 금전적인 비용은 물론이고, 시간과 인력 등 동원할 수 있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활동에 절실함은 얼마나 들어 있는가? 노방전도를 하거나 집을 방문하며 전도하는 일, 교회로 초청하는 일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전도를 한다. 그 안에 얼마나 절실함이 있는가 말이다”라며 “분명한 것은 우리는 많은 전도 활동을 해 왔지만, 교회 밖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음은 소위 ‘그들만의 리그’와 같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얼마나 중요한지 별로 관심이 없다. 그냥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어떤 활동 중 하나로 혹은 사람들을 귀찮게 하는 행동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요소수를 찾는 사람들의 행동은 다른 이들에게 보이기 위한 어떤 ‘행동’이 아니다. 그것이 없으면 정말로 차가 멈출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절실함이고 ‘진심’이다. 진심으로 했던 행동, 그 진심이 사람들에게 전해진 것이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뭔가 중요한 일이고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보고 느낀 것이다. 그래서 관심을 보이고 함께 안타까워한 것”이라며 “어쩌면 우리에게는 그러한 절실함, 복음을 대하는 진심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내게 있는 것을 진심으로 귀하게 여기지 않기에, 전하는 것을 보는 사람도 그렇게 귀하게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닌지, 구원의 소식을 스스로 기뻐하지 않기에 그것을 전달받는 사람 역시 크게 기쁜 일로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닌지, 복음이 없는 이들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지 않기에 그들도 그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질문해 봐야 할 문제”라고 했다.
아울러 “절실함, 진심, 믿음, 이 말들이 서로 다르게 들리지 않아야 한다”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두 한 의미로 여기며 행동할 때 참다운 삶이 될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스스로 속이는 사람이 아니라 온전한 믿음으로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 말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