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넷째 주를 지나고 있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사순절 기간 동안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무엇보다도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시간으로 삼아 왔습니다. 사실 오늘의 시대가 스펙의 시대이기도 하여 더욱 그러 하겠지만, 시대를 떠나 사람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내면 보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거울로 자신의 외모를 하루에도 수 십번을 보는 것에 비하면, 아니 외모로부터 오는 컴플렉스를 덮어보기 위해 엄청난 비용과 시간 고통까지도 감수하는 시대의 모습을 보노라면, 정말 내면 보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이같이 내면 보기가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첫 단추가 듣기와 말하기 그리고 보기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듣기, 말하기, 보기는 얼핏 서로 다른 영역같이 보이지만, 마치 얼굴에 귀와 입, 눈이 같이 모여 있는 것 같이 결국 하나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즉, 잘 듣는 사람이 잘 말하게 되고 잘 말하는 사람이 결국 잘 보는 이치입니다. 즉, 이 세 영역의 다스려짐과 조화로움은 그 사람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것이고, 나아가 그 사람의 인격과 수준, 깊이와 영향력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의 성숙도 이 세가지에서부터 시작됨 입니다.
몇 년 전, 시카고에서 열린 [이민사회 미래 심포지움]에 참석했던 적이 있습니다. 앞에 나온 한 분에게 사회자가 "이민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더니, 이 분이 한 순간의 지체도 없이 "그 놈의 말입니다." 하여 한바탕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당연히 그 말은 사회자나 회중이 기대했던 대답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얘기는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한 동안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 놈의 말"이라... 아마 당시 그 분은 그 놈의 '말' 때문에 뭔가 많이 힘들고 심지어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알만큼 알고 배울 만큼 배운 자기의 수준과는 전혀 다른 '그 놈의 말'을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로 생각한다 해도, 생각보다 좁은 이민사회 가장 큰 문제는 '말'이라는 것에 반대 의견을 낼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말이 많습니다. 특히 남의 말하기를 너무 좋아합니다... 일전에 저희교회에 오셨던 분으로, M J Kim으로 더 익숙하신 김명종목사님이 계십니다. 한국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1960년대 초, 그리고 이 땅에서 만난 파란 눈의 사모님, 또한 수 십년 동안 미국교회에서의 목회로 인해 거의 한국말을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국 목사님이 기도 중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키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에 감동을 받고,"아, 언젠가 이 말을 사용해야지" 생각하셨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교회에 가셨는데, 설교 전에 기도하면서 이 말을 하려고 하는데, 이 '눈동자'라는 말이 영 생각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를 눈.... 눈...." 하다가 생각난 단어는 영어로 'eye ball'로 연상된 '눈알'이었답니다. 결국, "우리를 눈알처럼 지키시는 하나님"이라고 했고, 성도들은 기도하다가 참지 못하고 웃음 폭탄이 터졌고, 당황한 목사님은 그 날 설교를 죽을 쒔다는 것입니다.
단어 하나 때문에 웃고 울고, 참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이후, 김목사님은 한국교회 갈 때 마다 이 얘기를 단골로 하셔서 자신의 부족한 한국말 실력의 이해를 구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그 정도로 한국말을 잊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후에 알게 된 것은 목사님은 한국말을 잘 못하신다는 장점(?)을 이용하셔서, 한국교회만 가면 듣게 되는 남의 얘기, 다른교회 얘기를 들으시면 일부러 모른척 하셨다는 것입니다. 근거도 없고 끝도 없는, 정말 영양가라고는 하나 없는 호기심과 추측에 반응하면서 당신의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는, 특히 이민사회에는 이다지도 말이 많을까요? 아마 여러분도 말의 피해자가 되신 적도 있었을 것이고, 한편 여러분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의 가해자 역할을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좀 더 근본적으로는 듣기와 말하기, 보기가 약한 것은 내면의 보챔이 약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독 듣는 것에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말하는 것에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듣지 않아도 될 것들을 너무도 쉽게 잘 듣습니다. 또 말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늘 말합니다. 왜 그럴까? 한 마디로'허'하기 때문입니다.
'허'하다는 것은 충만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면이 아름답고 고상한 것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내면은 스스로 자생력을 발휘해 그런 것이 아닌 다른 이상한 것들로 채우기 시작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일을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지지 않은 내면이 얼마나 추잡하고 어리석은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좋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걸러내는 분별력에도 이상이 생깁니다. 남의 얘기 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고, 루머에 관심을 쏟게 되어 아무 생각없이 듣게 되고, 사람과 세상을 보는 것도 삐딱하게 되는 안타까운 병이 생깁니다.
이번 사순절, 부디 저나 여러분 우리 모두가 듣는 것과 말하는 것, 보는 것의 내면 보기에 성숙함이 일어나기를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1:19)... 이런 사람이 귀한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