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림 감신대 교수(기독교윤리학)이 아벨라르의 속죄론의 두 기둥을 이루는 객관적 속죄론과 주관적 속죄론을 통전적으로 연구한 논문을 『ACTS 신학저널』 제48집(2021)에 게재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아벨라르의 속죄론을 연구한 후학들 그 중에서도 아울렌의 연구에 의해 아벨라르의 속죄론의 주관적 속죄론으로 왜곡, 축소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아울렌의 이 같은 왜곡은 "아벨라르가 그리스도를 "위대한 스승과 모범"으로만 봤다는 (아울렌의)잘못된 전제에서 기인한다"고 평가하며 "아울렌의 주장과 달리 아벨라르는 "스승이며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살아간다면 속죄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아벨라르의 속죄론에서는 칭의와 성화가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연결 되어져 있다. 그에게 있어서 칭의 없는 성화는 눈먼 성화고 성화 없는 칭의는 허무한 칭의다. 아벨라르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을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렇게 하나님과 화해한 인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진정한 화해를 완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이 교수는 "아벨라르는 객관적 속죄이론이 중심이었던 이전 속죄론에 주관적 속죄이론을 더함으로써 속죄론을 좀 더 통전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며 "주관적 요소의 결여된 속죄이해는 결국 성화의 결여로까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아벨라르는 주관적 요소를 포함한 통전적 속죄론을 통해서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실제적으로 도움을 주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이어 "안타깝게도 아울렌의 속죄론 연구에서는 아벨라르의 주관적 속죄론만 강조되었고, 이렇게 성립된 아울렌의 속죄론 연구를 토대로 한국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속죄이론을 발전시키게 된다"고 짚었다.
이에 이 교수는 "비평적 방법으로 아벨라르의 속죄론에 대한 잘못된 오해와 편견을 바로잡고, 아벨라르의 속죄론을 아벨라르의 신학에 근거하여 재구성하려한다"며 "그리고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 한국 교회와 신학계에 신앙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아벨라르의 사랑의 속죄론을 제공하려고 한다"고 했다.
아울렌의 속죄론 연구에 따르면 기독교의 속죄론은 크게 세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 이레네우스의 고전적 속죄론으로 죄로 인해 악마에게 포로 된 인간을 위해 그리스도가 몸값이 되셔서 악마로부터 속박된 인간을 속량시키셨다는 대속물(ransom) 이론이다. 둘째, 안셀름(Anselm of Canterbury, 1033-1109)의 라틴 속죄론으로 인간은 죄로 인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데 그리스도가 대신 처벌 받음으로 인간의 빚을 갚아주셔서 인간을 구속하셨다는 대리(substitution) 또는 보상(satisfaction) 이론이다. 셋째, 12세기 학자이며 수도사인, 또한 한때는 수도원장이었던 아벨라르(Peter Abelard, 1079-1142)의 주관주의적 속죄론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인간을 감화시켜서 인간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게 함으로 인간을 구속했다는 도덕감화 이론 등이 그것이다.
이 교수는 특히 아울렌이 자신의 기념비적인 속죄론 연구에 있어서 아벨라르의 속죄론을 주관주의적 모범주의로 축소, 왜곡한 것을 두고 "이 속죄론은 기독교 속죄론으로 간주되기에는 매우 심각한 위험을 안고 있다. 이것은 펠라기우스주의로의 회귀이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아벨라르의 신학은 "은총과 원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어거스틴의 전통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반(反)펠라기우스적이라고 볼 수 있다"며 "또한 그의 신학은 객관적 속죄이론이 중심이었던 이전 속죄론에 주관적 속죄이론을 더함으로써 속죄론을 좀 더 통전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고 밝혔다.
아벨라르의 속죄론을 왜곡한 또 다른 인물로는 러쉬달을 들었다. 이 교수에 의하면 라쉬달은 아벨라르의 속죄론을 통해서 타자의 희생을 통해서만 속죄될 수 있다는 대리/대속적 속죄 개념에서 마침내 벗어날 수 있으며, 또한 보편적 인류라는 거짓된 개념에서도 인간이 해방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라쉬달이 이해한 아벨라르에 의하면, 죄를 짓는 주체는 '나'이기 때문에 내 죄를 속죄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가 희생해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라며 "누구도 대속물이나 대리적 희생을 요구해서도 안 되고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그가 이해한 아벨라르의 속죄론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벨라르의 속죄론에 대한 러쉬달의 잘못된 이해 몇 가지를 들어 설명했다 이 교수는 "첫 번째로 아벨라르가 대리적 혹은 대속물 속죄론을 부정한다는 라쉬달의 이해를 살펴보자"며 "실제로 아벨라르의 신학에서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가 더 요청된다. 아벨라르는 죄를 정의함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죄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로 본다. 다시 말해,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에 동의하여서 생긴 것이 죄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만 이 죄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어 "죄에 대한 인간의 주체적인 책임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죄의 책임성은 있으나 인간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속죄에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에 전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게 된다"고 했다.
또 "두 번째로는 아벨라르가 인간이라는 보편 개념을 포기했다고 주장한다는 라쉬달의 이해를 살펴보자"며 이 교수는 "그는 아벨라르를 유명론자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아벨라르는 유명론자가 아니었다. 아벨라르는 도리어 보편 개념을 거부하는 로스켈리누스(Roscelin of Compiegne, 1050-1125)의 유명론을 비판한다. 로스켈리누스에게서는 보편에 해당하는 일체(一體)가 존재하지 않고 삼위(三位)만 개별적 실재(res)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삼위일체론은 삼신론(tritheism)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 밖에 러쉬달이 아벨라르를 계몽주의적 펠라기우스로 만드는 행태에 대해서도 "아벨라르는 그리스도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신앙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흉내 냄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한 적이 없다. 라쉬달의 해석이 오히려 아벨라르의 신학과 정면으로 충돌할 만큼 잘못된 것이라는 것은 아벨라르가 로마서 9장 21절에서 설명한 은총이해를 조금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아벨라르의 속죄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추구한 이 교수는 먼저 대표적인 속죄론 중 하나인 대속물 속죄론을 살펴봤다. 그는 "이 고전적 대속물 속죄론은 그 당시의 언어로 속죄론을 설명하였다. 로마제국 시대에서 자유인이 빚으로 인해 노예가 된 경우, 그를 다시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서는 그 노예의 빚을 갚아주어야만 했었다. 이러한 맥락으로 볼 때에 속량, 또는 속전은 노예를 자유인으로 만들 때 사용하는 언어인 것이다"라고 전했다.
아울러 "이레네우스는 그리스도 자신이 대속물이 되어 마귀에게 속박된 모든 인간을 속량했다고 설명했으며 오리겐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마귀에게 미끼가 되어서 그리스도가 마귀를 잡게 되셨다고 설명하였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전통적 설명을 수용하면서도 그리스도는 참 생명의 모범이 되셨다는 것을 잊지 않고 증언했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대속물 속죄론에 반대하며 대안으로 제시된 안셀름의 대리적 속죄론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 교수는 "안셀름이 기술한 속죄론은 봉건시대의 법률관계를 반영하고 있다"며 "그는 하나님은 마귀에게 빚을 질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속물 되어서 마귀에게 구속된 인간을 속량했다는 고전 속죄론은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고 했다.
안셀름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에게 잘못한 것이지 마귀에게 잘못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죄가 마귀에게 인간을 속박할 권리를 만들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구속사건이 일어난 것인가? 왜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것인가?
이 교수는 "이점에 대해서 안셀름은 보상설로 대답을 한다"며 "인간은 죄로 인해 벌 받을 빚이 생겼고, 그 빚을 인간이 감당할 수 없기에 죽어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인간의 멸망은 하나님의 공의를 집행하는 것이었으나 무한한 자비의 하나님은 인간의 멸망을 집행할 수 없어서 스스로 즉 대리로 벌을 받음으로써 인간의 빚을 탕감하신 것이라고 안셀름은 설명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아벨라르는 고전이론과 안셀름의 이론에 문제점이 있음을 비판하면서 속죄 사건으로써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다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며 "아벨라르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은총과 의의 완전함이라고 주장하는 사도 바울에 근거하여 자신의 속죄론을 전개하였는데 이때 그가 주해한 성경 말씀이 로마서 3장 26절이다"라고 했다.
이 교수는 "이 본문에서 아벨라르는 "하나님의 관용하심"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속히 처벌 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속죄하길 오랫동안 기다리고 계셨다는 뜻으로 주석을 했고 은혜의 시간, 즉 사랑의 시간으로써의 "이때"는 두려운 하나님에서 사랑의 하나님으로 바뀌는 시간을 의미한다고 그는 설명했다"고 전했다.
아벨라르의 속죄론에 대해 이 교수는 "아벨라르의 속죄론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리스도 자신이 대제사장으로 인류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삼으신 곳이며 죄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신 곳이며, 하나님의 의를 회복하신 곳이며, 동시에 그를 믿는 우리들을 의롭게 하신 거룩한 장소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아벨라르의 속죄론을 "사랑의 속죄론"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이 속죄론은 객관주의도 주관주의도 아닌 문자 그대로 이 둘의 연합(at-one-ment)을 의미한다. 객관적 속죄 사건에 의해서 주관적 속죄 사건이 발생하였고, 또 주관적 속죄 사건으로 객관적 속죄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알게 되었다. 이 점에서 아벨라르는 "알고 싶으면 믿어라"(crede ut intellegas)라고 주장한 어거스틴과 안셀름의 전통을 이어받는다. 믿음은 지식을 낳게 된다"며 "그리고 그 지식은 믿음을 풍성하게 해준다. 이처럼 아벨라르의 속죄론을 주관주의적 도덕감화론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의 신학을 통전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내린 속단일 뿐이다. 아벨라르의 속죄론을 엿볼 수 있는 그의 성 금요일 찬송시가 있다. 실제 예배에 사용하였던 찬송시에서 그는 속죄의 희생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와 속죄의 신비를 찬송하고 있다"고 했다.
아벨라르의 속죄론이 교부들의 속죄론이나 안셀름의 속죄론보다 신자들로 하여금 보다 통합적인 신앙의 실체에 참여하도록 인도한다고도 강조했다. 이 교수는 "교부와 안셀름의 속죄론이 요리책을 읽어주는 것에 비유한다면, 아벨라르의 속죄론은 요리를 직접 먹게 해주는 것이다. 아벨라르는 그리스도 수난과 죽음을 과거의 한 객관적 사건으로 환원시키거나 제한시키는 것을 배척한다. 즉 그에게 있어 속죄 믿음은 과거의 사건에 대한 지식적 믿음이 아닌 현재 일어나는 사건으로서의 실천적 믿음이 되어야 한다. 이처럼 아벨라르는 이전 속죄론에서 빠져있거나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가면서 속죄론을 통전적으로 재구성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