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9월에 조선예수교 장로회의 독노회가 결성되고 최초의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7인중의 한 명인 이기풍 목사가 1908년에 제주도로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된 이후 조선 장로교회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로도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지속적인 선교활동을 이어갔다. 이는 교회 연령으로 보면 아직 성년이 못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선교에 열정을 다한 선교하는 조선교회로 거듭난 것이었고 실제적으로 이를 더욱 확산하며 지속하여 국경을 넘어 그 복음의 지경을 넓혀갔다. 그 땅은 지금의 동북삼성 지역으로 고대에는 고구려와 발해로서 조상의 땅이기도 하였다.
그 중에 조선 반도와 가장 가까운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에 있는 조선 동포를 향한 전도 사역이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이 지역은 조선에 교회가 생기기 전과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두만강 건너편의 북간도(도문, 용정 및 연변)와 압록강 건너의 서간도인 지금의 단동과 통화, 집안 지역에 많은 조선인들이 오래 전부터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1860년대에 함경도 지역을 비롯한 조선 전역의 심한 흉년을 겪게 되자, 강을 건너 무주공산 같은 그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던 곳이다. 그러나 그 당시 그 땅은 청나라의 땅이기도 하였고 조선인들의 땅이기도 하였다.
1876년에는 지금의 심양의 '동관문교회'에서 조선 청년서상륜과 김청송을 비롯한 5명이 죤 로스 선교사의 제자가 되어 조선어 성경을 번역하였고 1883년에 김청송은 고향이 압록강변의 집안현으로 그곳은 고구려의 최초의 수도이기도하여 조선어 성경을 메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 마을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들은 세례를 받기 원하게 그 먼 길을 걸어서 심양의 죤 로스선교사를 찾아와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 마침내 그 후에 정식 교회가 세워졌다. 지금도 그 교회가 세워진 것을 기념한 집안현 이양자 마을 계곡의 바위에 <1898년 >라고 세워진 기념비가 있다.
1905년에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압적으로 을사늑약이 맺어짐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게 되었고, 일본은 청국과 국경선을 새로이 정하면서 그 간도 지역을 일방적으로 넘겨주었다. 그 이후에는 일제 치하에서 살기 어렵고 농지를 일본에 빼앗긴 동포들이 만주 지역으로 많이 흩어지면서 북간도와 서간도 지역으로도 이주민들이 증가되어 1918년에는 그곳에 약 20만명 이상이 그곳에 정착하였다.
조선에 들어 온 선교사들은 압록강 건너의 서간도 지역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맡게 되었고, 두만강 건너편의 북간도는 함경도 교회와 캐나다 선교회가 맡아서 선교 활동을 하여 복음을 전하고 교회와 학교와 병원도 세웠다.
이 만주 지역에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01년 만주 지역의 자생적 기독교인들이 사역자들을 보내달라고 하여 평안북도 여선교회의 후원을 받아 조선인 사역자들을 파송하였다. 1902년 가을, 그곳을 방문한 휘트모아(WHITTEMORE, 1870~1952)선교사가 상당수의 기독교인이 그 지역에 살고 있는 것을 본 후에는 선교사들과 조선인 사역자들이 자주 방문 사역을 하였다.
1910년 제4회 독노회 때 북평안대리회에서 서간도 선교사를 청원했고 함경도대리회에서 김영재를 북간도 선교사로 청원하였으며, 평북대리회에서 김진근을 서간도에 파송 결정했다. 1915년에는 조선인 사역자의 지도 아래 45개 교회와 2천7백50명의 기독교인 신앙 공동체를 형성되었다. 이들 중에는 9개 교회는 성도의 수가 100여명이 있었고, 큰 교회는 2백 명 이상이 모이기도 하였다.
1920년에는 교인이 약 3천 3백 여 명과 주일학교가 66개와 성경학교가 1개소가 있었으며 51개의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2개소가 세워졌고, 1925년에는 '동만주노회'가 결성되었다. 북만주 지역에서는 10년 후인 1931년에는 27개의 교회와 1,776명의 교인과 4명의 목사와 16명의 장로와 33개의 주일학교와 51개의 초등학교가 세워졌고 '북만주노회'도 설립되었다. 이로 인해 만주 지역에 3개의 노회가 조직되는 놀라운 교회 성장이 있었다.
이러한 만주 지역의 조선이 교회의 부흥은 그 지역의 원주민인 만주인들과 중국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그들의 교회도 세워지게 되었다. 이때에 조선인들 가운데에는 일부 중국인으로 국적을 취득하여 그들과 동화되었고 그곳에 태어난 2세대 기독교인들은 중국어에도 능통하여 중국인 선교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로인해 현지 토착인들의 교회 개척과 부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때에 조선 평양을 방문했던 중국 기독교인들이 이에 자극을 받았으며, 소문을 듣고 이를 확인하러 온 중국인 사역자들도 큰 은혜를 받고 돌아가 그 지역의 부흥에 기여하기도 하였었다.
이는 사도행전에 초대교회가 핍박을 받자 사마리아와 소아시아로 흩어져 빌립 집사를 비롯한 평신도들이 흩어져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사례와도 같은 것이다. 특히 안디옥으로 흩어진 무리들이 현지인들과 합류되어 교회가 개척되었고 크게 부흥되었다. 이 교회가 세계 교회사에서 최초로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한 기록을 갖고 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13:1~3) (계속)
강석진 목사(「근현대사로 읽는 북한교회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