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의 기적들⑫-이승만은 선조인가, 드골인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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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목사(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3. 이승만은 왜, 북진을 주장하는 거짓 방송을 했을까?

6월 27일 저녁 이승만 대통령이 충남 도지사 관저에서 HLKA 서울중앙방송의 전파를 이용하여 전국에 방송했던 연설은 6.25전쟁사에 가장 유명한 역사적 사건의 하나이다. 대통령이 전쟁 중인 국군과 국민을 향해 국영방송으로 발표한 담화가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이로 인해 지금까지도 시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에 필자는 장영민 박사의 논문(장영민,「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라디오 특별방송 관련 자료」, <한국근·현대사연구> 67, 2013)의 내용에 기초하여 정확한 사실 관계를 규명하고자 한다.

국방부가 펴낸 『한국전쟁사』를 보면 6.25가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혼란을 막기 위해 전황 보도에 노력을 기울였다. 25일 오전 7시 국방부 정훈국 보도과장이 중앙방송을 통해 북한군의 남침 사실을 처음 보도한데 이어, 12시에는 국방부 담화가 발표되었다. 26일에는 무초 대사가 오전 6시, 신성모 국방장관이 8시에 방송했는데, 모두 국군이 북한군을 격퇴 중이라는 주장이었다. 그 와중에 ‘국군 제17연대의 해주 돌입’과 '국군의 의정부 탈환'이라는 오보에 뒤이어, 27일 오전에는 정부가 수원으로 이동할 계획을 발표했다가 혼란이 야기 되자, 다시 '서울 사수'로 번복 발표했다.

©김형석 교수 제공

그러면 이렇게 전황이 불투명하여 오보가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왜 이승만은 계속하여 방송을 고집했을까? 무초는 국무부에 보낸 전문에서, "이 대통령은 총력전을 구상하고 있다. 국가가 위기일 때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막대기와 돌맹이를 가지고라도 나와서 싸우라고 호소하겠다고 말한다"고 기록했다. 미국에 살면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경험한 이승만은 국가가 국난을 당할 때는 국민과 함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소신을 가졌고, 그렇게 실천하기 위해 '대 국민 방송'을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날 저녁 이승만의 방송은 충남 도지사 관저-대전방송국-서울중앙방송국 라인을 통하여 HLKA 서울중앙방송의 전파로 전국에 중계되었다. 국민을 안심시키자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당시 전황과 미국의 해·공군 참전 및 원조 소식을 알리고, 국군과 경찰의 수고에 대한 감사를 표하면서 끝까지 싸워 승리하자고 호소하였다. 연설문은 이철원 공보처장이 기초하고, 황규면 대통령 수행 비서가 받아 쓴 것을 이승만이 녹음 방송한 것이다. 이 특별 방송은 27일 저녁 10시부터 11시까지 3차례에 걸쳐 방송되었다.

문제는 불과 몇 시간 뒤에 서울이 북한군의 수중에 넘어가는 절박한 형편이었는데, '서울 시민은 안심하라'는 방송을 수 차례나 거듭함으로써 거짓말 방송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서울 시민들을 안심 시키려던 계획은 이 날의 특별방송으로 인해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피난을 준비하던 시민들은 방송을 듣고 안심이 되어 서울에 주저 앉았다가, 한강다리가 폭파되면서 피난도 못간 채 북한군 치하에서 3개월 동안 고통스런 세월을 보내게 된 것이다. 국민을 안심시키고 국난 극복에 동참을 끌어내려는 의도와는 달리 국민들에게 고통만 안겨준 결과였다.

한강 다리가 폭파되고 있는 모습 ©김형석 교수 제공

이렇게 전쟁 중에 오보를 남발한 책임 소재를 따지면 공보처장 이철원과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 보도과장 김현수 대령 등의 잘못이었다. 그러나 급기야 이승만 대통령까지 나와서 '대 국민 오보 방송'을 한 것은 누구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국가적으로 전쟁에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이 크게 부족한 탓이었다. 경무대 비서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신성모 국방장관까지도 대통령에게 "크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미국 역시 무초 대사가 국무부에 보낸 전문을 보면 당시 상황을 크게 오판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승만으로서는 국내 보고 시스템은 물론 미국 대사관까지도 사태를 오판하고 있는 마당에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방법이 없었다. 이런 점에 비추어 6월 27일 저녁에 행한 이승만 대통령의 대 국민 방송을 놓고서, 대통령의 무능을 나타내는 증거라거나, 28일 새벽에 발생한 한강인도교 폭파와 연관시켜 부도덕한 지도자로 매도하는 것은 올바른 주장이 아니다. 결과론적으로 서울 방어의 실패로 인해 대 국민 방송이 가짜 뉴스가 된 것이지, 의도적으로 거짓 방송을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울 진공에 앞장 선 인민군 탱크 부대 ​ ©김형석 교수 제공

4. 이승만의 일본 망명설은 사실일까?

2015년 6월 24일 KBS TV는 '이승만 정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일본 망명 타진'이라는 제목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일본 망명설을 보도했다. 요지는 1950년 6월 27일 다나카 타쓰오 야마구치현 지사가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전보를 받았는데, "북한군이 부산의 북쪽 낙동강까지 진격해 왔다. 이대로 가면 부산이 '제2의 덩케르크'(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이 독일군에 포위당했다가 프랑스를 탈출한 해안 도시)가 될 수 있다. ... 한국 정부가 6만 명 규모의 망명을 희망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다나카 지사는 야마구치현에 '한국인 피난 캠프'를 설치할 계획을 추진했다는 것이었다.

이 보도가 나가자 사실 여부를 놓고 큰 논란이 빚어졌으며 결국 오보로 판명되었다. 이 기사를 보면 6월 27일자 전문에 우선 "북한군이 부산의 북쪽 낙동강까지 진격해 들어왔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27일은 아직 북한군이 서울에 입성하기도 전인데, 낙동강까지 진격했다는 내용은 전혀 맞지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기사는 이미 10년 전에 경향신문에서 "1950년 9월에 한국 망명정부를 일본 야마구치현에 구상했다"고 보도한 내용이었다. 그러면 이 일본 측의 자료는 전혀 사실이 아닐까, 아니면 사실이 다르게 와전된 것일까?

이승만 정부의 망명설을 다룬 기사<경향신문>(1996.4.14) ©김형석 교수 제공

이승만 정부가 일본 망명을 타진했다는 얘기는 무초가 국무성에 보낸 전문(1950.6.27)에 나온다 "신성모는 이승만 대통령과 내각을 일본으로 보내 망명 정부를 세울 수 있는지 여부를 내게 타진했다. 이에 대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신성모는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 하는 점이 궁금해지는데, 그 단서가 될만한 자료가 지난해 공개되었다. 바로 신성모가 육필로 쓴 <6·25전쟁 전황 보고서>이다.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이 소장한 자료의 내용이 《월간 조선》(2020.8)에 소개되었다. 이승만이 대전에서 떠나던 6월 29일 보고한 내용을 살펴보자.

"명조(明朝)까지 미 육전대(陸戰隊)가 일선 전투에 참가하게 되어 시국 만회가 확실하겠습니다. 추측건대 미 육군 폭격이 불가능하고 미 상륙부대에 일선 진출이 더 늦어진다면 황송한 말씀이오나 수원까지라도 지키긴 어렵습니다. 고령(高齡)하신 각하를 우중(雨中)에 배별할 때 죄송한 마음 무어라 아뢰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에 큰 원조를 얻고 군경 일치단결로서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끝. 국방장관."

신성모 장관이 올린 <전황 보고서>(월간 조선 2020.8) ©김형석 교수 제공

여기서 흥미로운 내용이 등장한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가 참전한 것처럼, 미 해병대가 일선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으니 시국의 만회는 확실하겠습니다"라고 언급하면서 6.25의 상황을 임진왜란에 비유한 것이다. 그렇다면 신성모가 6월 29일 이승만에게 피신을 권유한 것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에 피난한 것처럼 대통령을 먼 곳으로 피신시킨 다음 미군의 전면적인 참전을 통한 수복작전을 염두에 둔 조치였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신성모의 개인적 생각으로 이로 미루어 그는 친분이 두터운 무초에게도 망명 정부에 관한 의사를 타진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따라서 무초는 이런 내용을 국무부에 보고한 6월 27일자 전문에 기록하였고, 8월 14일 무초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한국 정부를 제주도로 옮기는 방안을 제안하였다. 프란체스카는 일기에 그날의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무초 대사는 대구가 적군의 공격권 안에 들어갔다면서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그의 주장은 제주도가 적의 공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최악의 경우 남한 육지의 전부가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가도 망명 정부를 지속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이승만의 반응도 기록하였다. "무초가 한참 열을 올려 얘기하고 있을 때, 대통령이 슬그머니 허리춤에서 모젤 권총을 꺼내 들었다. 대통령은 권총을 아래 위로 흔들면서 '공산당이 내 앞까지 오면 이 총으로 내 아내를 쏘고, 적을 죽인 다음 나머지 한 알로 나를 쏠 것이오. 우리는 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길 생각이 없소. 모두 총 궐기하여 싸울 것이오. 결코 도망가지 않겠소'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 같은 프란체스카 일기 내용에 대해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도 있지만, 전반적인 사실관계를 따져보면 대부분의 내용이 사실과 부합됨을 확인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과 무초 대사(좌에서 4번째) ©김형석 교수 제공

이상에서 이승만의 일본 망명설은 신성모 국방장관이 개인적인 생각으로 무초의 입장을 타진한 것이고, 제주도 망명설은 무초의 제안을 이승만이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이승만의 생각과 행동으로 주장하지만, 그것을 입증할 근거는 없다. 역사는 모름지기 사료에 근거하여 역사적 사실로만 판단해야 한다.

5. 6.25전쟁에서 이승만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6.25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에 대해서는 '국민을 버리고 도망한 무능하고 무책임한 지도자'라는 부정적인 평가와 '정확한 정세 판단과 뛰어난 외교력으로 국난을 극복한 위대한 지도자'라는 긍정적인 평가가 상존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가 이 글에서 규명한 6.25의 진실을 토대로 이승만의 역할을 다시 한번 살펴 보면서 그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고자 한다.

그동안 이승만을 비난하던 네 가지의 행적 - ①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도망 갈 궁리만 했다. ②이승만은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피난 열차에 올랐다. ③이승만은 고의로 북진을 주장하는 거짓 방송을 했다. ④이승만은 개전 초기에 일본으로 망명하려고 했다 - 은 모두 사실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반대로 이승만의 행적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가 초기 3일 동안 보여준 역할을 평가하면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것으로 주장한다. 남정옥 박사의 「북한군의 남침 이후 3일 동안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을 다시금 살펴보자.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으로부터 남침을 당한 직후 국가 원수로서, 국군 통수권자로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침식을 거르면서 행한 전쟁 지도는 매우 적절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군사외교를 통해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을 설득해 미국의 군사 지원과 조기 참전을 이끌어 낸 것은 '외교의 신(神)' 이승만 대통령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다만 북한이 남침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전에 대비하지 못한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비판에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개전 초 3일간 전쟁 지도의 업적에서 탁월했다고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남정옥의 평가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승만이 6.25전쟁을 사전에 대비하지 못한 것은 비판 받아야 하지만 전쟁이 발발한 이후의 대응은 매우 적절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6.25전쟁은 그렇게 단순하게 평가하기에는 너무 상처가 큰 사건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논란이 된 것이 한강다리 폭파사건이다.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한강다리가 부서졌다. 교각으로 연결된 상수도관이 터지고 물이 쏟아져 내렸으며, 다리를 건너던 사람들은 강물로 추락했다.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다리 폭파로 인해 적게는 200명에서 많게는 8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 방어에 참가한 국군 3개 사단의 퇴로가 끊기고 피난을 가지 못한 서울 시민들은 북한군의 치하에서 부역을 강요 당하거나 납북되었다. 이 때문에 이승만 정부는 6·25 전쟁 이후에도 '조기 폭파'에 대한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부모와 형제, 그리고 삶의 터전을 잃은 피란민의 절규였다.

끊어진 한강인도교(1953.1.1) ©김형석 교수 제공

한강다리가 폭파된 지 70년이 지난 오늘까지 조기 폭파의 논란은 정리되지 않았다. 8월 28일, 한강다리가 폭파된 지 2개월 만에 최창식 공병감을 적전비행(敵前非行)의 죄목으로 전격 구속하고 9월 16일 총살했다. 판결문의 요지는 "6월 28일 오전 2시경 아군이 전선에서 후퇴하게 되자 육군 참모총장으로부터 교량 폭파에 대한 전화 명령을 받고 적정도 확실히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계속 다리를 건너는 부대에 관해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다리를 폭파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전사한 채병덕 참모총장 대신 최창식 공병감에게 한강다리 폭파의 책임을 전가한 것이었다.

1961년 9월 최창식 공병감의 유족이 재심을 청구하자, 이듬해 5월 15일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에서 원심 판결의 무효를 선고했으며, 1964년 10월 23일 결심 공판에서도 최창식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장이던 황준환 대령은 '조급 폭파'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최창식 공병감의 책임은 아니라고 판정했다.(자세한 내용은 김태완, 「현대사에 가장 길었던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월간 조선> 2013.7) 그러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국군 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전쟁사에서 이승만의 역할을 재평가해야 할 이유는 전쟁 초기의 긴박했던 상황에서 미국의 지원과 유엔군의 참전을 이끌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25일 22시 무초 미국 대사를 경무대에 불러 '정부 이전'을 내세우며 미국의 지원을 압박했다. 이에 무초는 정부가 서울에 머물러 있어야 미국의 지원이 가능하다고 설득했고, 회담을 마치자 무초는 이 사실을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급히 타전했다. 결국 이 회담이 미국의 지원과 유엔군의 참전을 이끌어내 국난을 극복하는데 결정적인 모멘텀이 되었다.

6.25전쟁사에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전쟁이 발발한 첫날 그가 무초와의 회담에서 보여 준 태도를 어떻게 해석하는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이제까지는 무초의 보고서 전문에 나타난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 이승만은 국민을 버리고 혼자서 살기 위해 도망 간 선조와 같은 무능한 지도자라는 시각이 팽배했다. 이 같은 평가는 그후 이승만이 사사오입 개헌을 시도하고 3.15 부정선거로 인해 대통령을 하야한 후 하와이로 망명하자 일반화되었다.

그렇지만 이같은 주장에 대한 반론도 주목해야 한다. 당시 이승만의 행적을 세심하게 살펴보면, 무초와의 대담에서 말한 '정부 이전'이 미국의 지원을 압박하기 위한 협상술이었다는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갖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미국이 남침을 당한 한국에 대한 지원을 공식적으로 표명하지 않자, 무초와의 회담에 이어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조속한 무기 지원을 요청하였고, 장면 주미 대사를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내 미국과 유엔의 참전을 요청했다. 서울을 포기하고 정부를 이전하겠다는 말과는 상반되는 행동이었다.

6월25일(미국 시간) 주미 대사 장면이 유엔 안보리 회의장을 찾아 사무총장 트리그브 리에게 긴급지원을 호소하고 있다. ©김형석 교수 제공

이승만이 이렇게 이중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미국의 영향 하의 중립론」 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만큼 국제 정세에 대해 밝았던 그가 미국이 한반도를 포기할 리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따라서 그는 미국의 빠른 지원을 압박하는 전략을 구사했을 뿐 아니라, 6.25전쟁을 한국의 통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다. 즉, 북한의 남침으로 38선이 무너진 점을 이용해서 미국의 힘을 빌려 북진통일을 추구하려는 궁극적 목표를 구상한 것이다.

만약 6.25전쟁사에서 이승만을 드골처럼 위대한 전쟁 영웅으로 평가하려면, 미국과 유엔군의 힘을 빌려 한반도의 통일을 이루려고 했다는 점에 주목하여 보다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김형석 목사(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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