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허무는 한국 드라마가 전 세계에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바로 ‘넷플릭스’라는 세계 최대의 유료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전 세계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오징어 게임’과 ‘지옥’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두 드라마는 공통적으로 시청률 세계 1위 기록이라는 금자탑 달성 못지않은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드라마 한류의 현주소를 확인시킨 ‘오징어 게임’은 456억 원의 상금이 걸린 서바이벌(생존)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이 상금을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는 이야기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돈에 눈이 멀어 승자 독식의 게임에 뛰어든다. 평론가들은 이 드라마에 대해 “한국 사회가 경쟁에 부여하는 중요성과 패자에 대한 자본주의의 잔혹성에 대한 상징”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교계 일각에서는 등장인물 중에 기독교와 관련된 인물들이 하나 같이 비호감이거나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나오는 등 드라마 전반에 드러난 ‘반(反)기독교적 코드’를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죽어야 내가 이기는 게임에서 이겨 상금을 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목사, 그는 게임에서 이길 때마다 죽은 상대방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하나님께 감사 기도드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돈에 목숨을 거는 수많은 군상들 속에서 이런 유형의 기독교인을 부각시킨 연출자의 의도가 무엇이건 간에 시청자 입장에서는 기독교가 비인간적이고 자기 욕심에 가득 찬 부정적인 이미지로 비칠 수밖에 없다. 이런 설정들로 인해 기독교인 시청자라면 보는 내내 불편한 기분을 떨쳐내기 어렵다.
지난주 ‘지옥’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드라마가 선보였는데 단번에 ‘오징어 게임’의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오징어 게임’과 다른 듯 닮은 게 한둘이 아니다. 우선 사람의 생명을 일회용품 소비하듯 다루고 무자비한 폭력이 정당화되는 듯한 것이 그렇다.
이 드라마의 큰 줄기에 자리잡은 ‘새 진리회’라는 이름의 신흥종교집단이 있다. 이들은 지옥의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신흥종교 집단은 기독교와는 별개의 설정인 것 같지만 ‘원죄’ 운운하며 기독교 교리와의 혼합을 시도하는 점이나 2대 교주의 전직을 암시하는 ‘목사’ 명패에서 보듯이 시청자들이 개신교와 혼동하기 쉽게 만든 설정이 여기저기서 눈에 띈다.
이 두 드라마는 물론 허구이고 픽션이다. 단순하게 흥미 본위로 대한다면 그냥 다양하고 화려한 눈속임에 극적인 스토리텔링을 가미한 수준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단순히 흥미, 재미로 여기고 넘어가기에는 뭔가 불편하고 거슬리는 요소들을 너무나 많다.
우선 시청자들은 이 두 드라마를 보면서 종교에 대한 경외심과 신뢰 대신 막연한 혐오와 불신에 젖을 소지가 다분하다. 그것이 작가와 감독의 관점이라면 종교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느끼도록 유도한 것은 매우 위험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심각한 것이 드라마에 깊숙이 내재된 생명 경시와 인간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의 일상화다.
잔인한 폭력을 소재로 한 수많은 영화들이 사람의 생명을 파리 목숨처럼 만들곤 하는 것을 왕왕 보게 된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한술 더 떠 인간의 생명을 마치 일회용품처럼 소비하는 데 주저함이 전혀 없다. 특히 돈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어린이들이 즐기는 ‘놀이’에 참가해 목숨을 잃는 장면과 죄인이라는 이유로 경찰이 보는 앞에서 무자비한 린치를 가하는 폭력의 합리화, 살아 있는 사람을 화장용 불가마에 가둬 태워 죽이는 장면 등은 영화 기법을 떠나 인간 생명에 대한 그 어떤 폭력도 정당하다는 역설을 웅변하는 것 같아 소름이 돋는다.
눈요기를 위해 영화, 드라마가 점점 자극적인 장면들로 채워지는 것은 우리만의 현실은 아닐 것이다. 해외에는 이보다 더 심한 폭력도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얼마든지 생산하는 데 장애가 없다.
그러나 그런 영화들은 소수의 마니아층 사이에서만 유통이 될 뿐 전 세계가 들썩일 정도로 화제가 되지는 않는다. 오죽하면 미국, 영국, 호주 등 세계 각국의 학교에서 아이들이 ‘오징어 게임’을 시청하거나 따라 하지 못하도록 학부모들에게 각별한 주의를 주고, 심지어 드라마 속 행동을 따라 하는 학생을 징계하겠다고 했겠는가.
이런 류가 우리 사회에 전혀 낯설지 않게 된 지표가 있다. 얼마 전 미국의 한 여론조사기관(퓨리서치)이 전 세계 17개 선진국 1만8,000여 명을 대상으로 ‘삶에서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한국만 유일하게 ‘물질적 행복’을 1위로 꼽았다. 각국의 응답에 평균을 내보니 ‘가족’ ‘직업’ ‘물질적 행복’ 순이었다.
드라마는 그저 드라마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없지 않다.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고 사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런 드라마가 결론에 가서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다 해도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폭력의 일상화는 현실에까지 짙은 잔상으로 남아 사회적 범죄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이 드라마의 작가와 감독은 자본주의의 폐해와 그 안에 종교가 결합돼 돈, 욕망, 폭력이라는 구조 악이 종교에 기생하는 요소쯤으로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식의 조롱은 종교의 영역을 눈에 보이는 현상이 다라고 여기는 오만과 편견이 가져다 준 착시현상에 불과하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서 보여준 인류 구원의 희생정신을 성도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바로 실천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과도 분명 다른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