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원주지역 기독교 지도자 Ⅱ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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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목회자들이 결성한 ‘철원애국단’과
원주지방 목회자들의 독립운동 행적

문정보통학교 10간 건물을 인수해 증축한 문막교회 모습(1918년) ©GCAH Digital Galleries

3.1운동 당시 기독교계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이들은 원주읍 교회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지 못한 주된 이유를 북감리파 선교부의 내보(內報)와 견제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는 당시 원주 주재 헌병분대가 조선헌병대사령부에 보고한 내용에서 소개하고 있다. 1919년 조선소요사건상황(朝鮮騷擾事件狀況) 보고서 영인본 336쪽을 우리말로 번역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미국북감리파(원주읍 거주)

북감리파 선교사 등은 남감리파 선교사에 비해 그 언동 진면목에서 특히 자중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특히 당국 헌병의 눈 밖에 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소요 중 지방순회 포교 및 전도사 회의를 중지하거나, 여러 소재지 신도들에게 경거망동을 금하라는 취지로 간곡히 타이르고, 신도들의 예배집합 석상에 헌병의 임석을 청하며 여러 경찰관헌과 연락을 취하여 신도의 동정에 주의하여 미연 방지하고자 하는 면이 보인다. 3월 14일 경성지방에서 유력한 독립운동자 수 명이 잠입, 同地(원주지방) 선교사를 방문하여 동정(도움)을 호소하며 원주지방에 거사를 치르려는 것을 분대에 내보(內報)하여 검거를 용이하게 하고자 했던 사실이 있고, 또 소재지 분대장과 면담하여 자기의 믿음에 대해 솔직하게 의견을 내는 등 한결같이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으려는 조심함이 보일 정도로, 원주지방에 있어서는 야소(耶蘇, 예수) 신자로서 소요에 참가하는 자는 극히 적음.”6)

이러한 선교사의 조처와 태도로 미루어 볼 때 원주선교부에서는 기독교도들의 만세운동에 대해 신중하기를 요청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로 인해 원주읍내에서 기독교도를 중심으로 한 만세운동의 결정적인 기회를 놓쳐 버렸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원주읍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모두 선교사의 조처로만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원주읍은 당시 서울에 인접한 강원도의 주요 거점 지역이었고, 이로 인해 일제에 의해 집중적인 감시와 견제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와는 별도로 원주교회 목회자 조윤여 전도사, 문막교회 목회자 박종성 전도사, 귀래 당우리교회 목회자 이재근 전도사 등은 3.1만세운동 이후 ‘철원애국단’ 조직에 적극 협력하였거나 원주 지방을 떠나 서울과 타지역에서 상해임시정부와 연계한 독립운동에 지도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먼저, 3.1운동 이후 강원도 지역 목회자들이 주축으로 결성한 ‘철원애국단’을 살펴보고 계속해서 원주지방 목회자들의 독립운동 행적을 소개해본다.

3. 철원애국단 사건

“3·1운동에 가담해 구속되었다가 그해 8월 6일 보석으로 풀려난 연희전문학교의 김상덕(金相德)은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에 가입, 친지인 권인채(權仁采)로부터 강원도에 애국단 지부인 도단(道團)·군단(郡團)·면단(面團)을 조직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달 8일 강원도 철원에서 박연서(朴淵瑞)·강대여(姜大呂)·김철회(金喆會)·박건병(朴健秉) 등과 애국단 철원군단을 조직하였다. 그달 12일 상경한 박연서가 권인채의 주선으로 만난 신현구(申鉉九)의 권고를 받아들여, 애국단의 철원군단을 애국단강원도단(愛國團江原道團)으로 바꾸었다. 간부진은 단장 이봉하, 서무국장 강대여, 재무국장 김완호, 통신국장 박연서, 학무국장 박건병, 외무국원 김철회·이용우 등이었으며, 그달(8월) 14일부터 애국단 강원도단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박연서 등은 도단의 활동자금을 각자 갹출하고 지방의 독립운동 상황을 조사해 임시정부에 보고하는 한편, 임시정부로부터 전달된 각종 문서를 반포하는 등 임시정부의 지시 및 명령을 이행하였다. 한편, 애국단강원도단의 조직을 확장하기 위해 조종대(趙鍾大)7) 등을 비롯한 단원들은 각 군을 순회, 원주·횡성·강릉·평창·울진·삼척·평해·영월·정선·고성·양양·금화 등지에 군단을 조직하거나 조직을 도모하였다.”8)

철원애국단을 애국단강원도단으로 바꿔서 내려온 박연서(朴淵瑞)9)는 애국단도부(愛國團道部) 통신부장(通信部長)으로서 당시 화천지방에 파송을 받은 전도사(傳道師)였기에 기독교계 인사들을 접촉하는데 용이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들이 각 지방에 내려가 군단(群團) 설립을 위해 접촉했던 인사들은 거의 기독교계 지도자들이었다.

당시 감리교 원주지방회 기독교 지도자들을 만나기 위해 온 사람은 조종대였다. 1920년 12월 13일 <조선일보> 3면 기사에는 철원군(鐵原郡) 애국단공판결심(愛國團公判結審) 2(二)라는 제목으로 철원애국단 결심 공판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를 쓴 기자는 제일애국단진상(第一愛國團眞想), 제2독립(第二獨立) 운동(運動)이라고 이 사건의 성격과 공판 결과를 아래와 같이 전하며, 어떻게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애국단 참여를 권유했는지를 소상히 소개하고 있다.

“기독교 지도자들과 그 밖에 뜻이 있는 자에게 교섭을 하여 군단(群團)의 설치를 권유하고 의논하였고, 조종대(趙鍾大)는 그것10)을 인수하여 가지고 동월(8월) 26일경에 경성으로부터 자동차를 타고 강원도 원주군 원주면 상동 목사 조윤여(趙潤如)11)를 방문하고, 군단을 철원에 설치하고 조선독립운동을 위하여 상해임시정부와 연락을 하며, 임시정부의 명령을 따라 독립운동을 실행하고, 군단으로는 상황 보고 등을 주창(主唱: 주의나 사상을 앞장서서 주장함)하여 독립운동에 대한 통신 담임을 권유하여 동인으로부터 열심히 하겠다는 대답을 듣고, 그 다음 날 횡성군 횡성면 읍상리 방기순(方基淳)12)을 방문하고 위에서 조윤여에게 말한 것과 같이 권유하였으나 동인으로부터 거절을 당하였는지라. 동월 29일경 강릉군 강릉면 대화정 안경록(安慶錄)13)을 방문하고 이상과 같이 권유하였으나 동인으로부터 거절을 당하였다.”14)

<신학세계> 제5권, 제4호(1920년 7월) 97~98쪽에는 기이부 박사가 독립운동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갇힌 감리교계 지도자들을 방문했다는 기사가 그들의 이름과 함께 실렸다.

4. 원주지방 교회 지도자들의 독립운동 참여

1919년 8월부터 추진되던 애국단도부(愛國團道部) 확장 거사는 1920년 봄 김상덕·박연서·강대여·김철회 등 23명이 일본 경찰에 차례로 체포됨으로써 해산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 1920년 3월 17일 자 <기독신보>에도 원주지방 감리교 목회자들이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있다는 기사가 아래와 같이 실렸다.

“원주지방 순행목사 방기순씨와 전도사 조윤여씨, 철원 박연서 전도사, 강릉교회 목사 안경록씨는 모사건으로 인하여 당국에 체포되었다더라.”15)

3.1운동 당시 원주선교부 지역에서는 기독교 교역자들이 아무도 체포되지 않았지만, ‘철원애국단 사건’으로 원주, 강릉지방에서 3인의 목회자가 독립운동 참여 혐의로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3인의 목회자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조사받는 동안 협성신학교장 기이부(Dr. Elmer M. Cable) 박사는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떠나기 전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했는데, 여기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많은 감리교계 지도자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다음은 〈교장(校長)의 감옥(監獄) 방문(訪問)〉이라는 제목의 『신학세계』 기사이다.


철원애국단 사건에 대해 1920년 미감리회 연회에서 원주와 강릉 양 지방의 감리사를 겸임하였던 모리스(Pr. C. D. Morris) 선교사는 1920년 10월 20일부터 26일까지 열린 미감리회 연회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두 지방회 교회들은 모두 평화로웠지만, 지난 2월부터 9월 말까지 3명의 목회자와 1명의 신실한 평신도가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들이 체포될 시기에 나는 그들이 그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믿었고, 나의 무죄 주장은 그들의 무죄선고로 입증되었다. 목회자들이 수개월동안 교회를 비웠기 때문에 많은 불편함을 가져왔고, 가능하다면 계속해서 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법률적으로 그들의 무죄가 선고될 때까지 수개월 동안 감옥에서 구금되는 것이 없도록 해야겠다.

이러한 수감생활을 한 목회자들은 경제적으로도 많은 곤란을 받았다. 우리는 그들 모두가 석방되어 그들이 지방회와 연차총회에도 참석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한다.”18)

기사의 내용과 같이 원주지방 감리사를 맡고 있던 모리스 선교사는 수개월 동안 수감된 방기순 목사, 조윤여 전도사, 안경록 목사 3명의 지도자를 위해 변호했고, 그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해 3명은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나게 되었다. 수감 기간 조윤여 전도사가 겸임해 목회했던 원주교회와 문막교회는 당시 서미감병원 원장이던 앤더슨(Dr, Anderson) 의사가 돌보았는데, 모리스 감리사의 연회 보고에 의하면 “그 기간 동안 문막교회의 성도들은 두 배로 증가했다”19)라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신앙을 지킨 우리 선조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계속>

[미주]
6) 朝鮮騷擾事件狀況, 일본 극동연구소출판회, 1969년, 336쪽. 한글 번역: 제주기록연구소장 고영자 박사.
7) 조종대는 한약방을 경영하면서 철원지역 전도자로 온 이화춘 전도사와 함께 철원교회를 설립했다. 대한독립애국단에 가입해 강원도 각 군에 군단을 설치하는 책임을 맡아 강릉군단, 양양군단, 평창군단 등이 설치되었다. 키아츠, 『강원도 인문학 산책』, 2020.
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에서 발췌.
9) 박연서는 1928년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 1933년까지 〈기독신보〉 주필을 역임했다. 1940년 7월에 감리교회 국민정신총동원 기독교조선감리회연맹을 결성하고 그 중심 조직에서 선전주임으로 활동하였다. 1963년 3.1절에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았으나 국민정신총동원 선전주임 친일 전력으로 표창은 취소된 것으로 보인다. 자료: 한국감리교 인물사전 DB.
10) 같은 날 기사에 나온 상해임시정부에서 발행한 연통제(聯統制)와 인쇄물(印刷物), 상해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 명의로 된 애국단설립감사장, 그 외 애국단반포문일 것으로 사료된다.
11) 조윤여는 당시 원주교회 담임 목회자로 전도사였음(1918. 6~1920. 9), 원주제일교회100년사.
12) 방기순은 당시 횡성교회 담임 목사였음(1919~1920), 횡성교회90년사.
13) 안경록은 1919년부터 1922년까지 강릉교회 3대 담임목사였으며, 강릉지방 감리사를 맡고 있었다. “1919년 4월 2일에 있었던 강릉 만세운동은 강릉감리교회 측 단독으로 추진하여 장터에 나간 안경록 목사를 선두로 준비해간 태극기를 일반인들에게 나누어주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강릉중앙교회80년사, 61쪽.
14) <조선일보> 1920년 12월 13일 자 석간 3면을 발췌 윤문함.
15) <기독신보> 1920년 3월 17일 자
16) 1920년 6월 중순을 의미한다.
17) 이 기사에서도 전도사 조윤여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신학세계> 제5권, 제4호(1920년 7월), 97~98쪽.
18) 李震晩, 매서인(권서)은 교회설립의 선구자였다, 준 프로세스, 2020, 248쪽, 재인용
19) 위와 같은 책, 249쪽.

리진만 우간다·인도네시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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