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박명수 교수(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한국교회사)의 논문 ‘조미수호통상조약 140주년의 역사적 배경과 그 의의’를 연재합니다. 2022년은 조미수호통상조약 140주년입니다.
4. 조선책략과 신사척사운동
둘째, 조선책략은 만국공법의 새로운 질서는 나쁜 질서가 아니라 좋은 질서라는 것이다. 즉 만국공법에 의하면 강대국에 의해서 약소국이 지배를 받지 않으며,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마음대로 점령하지 못하며, 통상과 자원개발을 통해서 부국강병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조선책략은 서양 여러나라의 다양한 성격을 조선에 소개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러시아와 서구세계의 차이를 설명하고, 더 나아가서 서구 세계 가운데서도 유럽국가와 미국을 구분하고 있다. 먼저 서구세력은 통상을 강요하지만 영토를 탐내지 않는데 비해서 러시아는 영토를 탐내고 있다고 말하고, 서구 세력 가운데도 미국은 유럽국가들과는 달리 다른 나라의 정사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넷째, 극동에서 조선에 가장 위협적인 국가는 러시아이며,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일본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위치에서 러시아의 등장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며, 이것은 이후 한국사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은 당시 우리 민족에게 무엇이 더 큰 위협인가를 알게 해 주는 것이다.
다섯째, 서양 기독교 가운데 천주교와 개신교를 구분하고, 미국의 종교분리 정책을 조선사회에 알림으로서 서양문화를 한국에 도입하는데 중요한 장애를 제거했다는 점이다. 사실 조선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데 가장 중요한 걸림돌은 종교였다. 조선정부는 서양세력이 천주교를 통해서 조선을 지배하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선책략은 미국의 종교인 개신교가 천주교와 달리 정교분리를 주장하기 때문에 이런 염려를 크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고종은 이런 조선책략을 신하들에게 읽혀 개방에 대비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서울의 관리들 가운데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수용하였다. 하지만 1881년 대대적인 척사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조선의 유교사회가 서구기독교문명에 가장 철처하게 반대한 운동이다. 과거 대원군의 척사운동은 관 주도였다면 1881년의 신사척사운동은 유림중심의 운동이었다. 이들이 조선책략을 반대하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척사운동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조선책략이 기독교, 특히 개신교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유교의 성리학을 지고지선이라고 생각하던 유림들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척사운동은 황준헌이 언급하고 있는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에 대해서 완전히 무시하고 그들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둘째, 이들은 아직도 중화질서의 구조 속에서 조선책략의 내용을 비판하고 있다. 세계는 이미 변하여 더 이상 중국중심의 세계관은 통하지 않는 상황이 되었는데, 이들은 여전히 과거에 매여 있는 것이다. 오히려 더욱 문을 걸어 잠그면서 중화질서에 집착하는 것이다.
셋째, 척사파들은 결일본, 연미국의 논리를 반대하기 위해서 러시아의 위협을 사실이 아닌 것으로 평가절하 하고 있다. 조선책략은 기본적으로 공러의식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척사파들은 이것들은 중국과 일본이 조선을 개방시키기 위한 전략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당시 척사파들은 러시아의 위협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넷째, 척사파들은 왜양일체론의 입장에서 당시의 세계를 보고 있다. 일본이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스스로 발전한 것을 배우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강화도 조약으로 인한 개항이 조선을 근본적으로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다섯째, 척사파들은 당시 서양열강들이 추구하는 통상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들은 통상을 통하여 조선이 손해보는 것만 생각하고, 오히려 통상을 통하여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진취적인 생각을 갖지 못하였다.
여섯째, 척사운동은 결국 과거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연결되어 고종을 몰아내고, 대원군 세력으로 하여금 다시 집권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려고 하였다. 결국 이런 모반운동 때문에 결국은 척사운동은 고종에 대한 반역운동으로 이어지고 결과적으로는 척사운동을 다시 복원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만들었다.
조선책략은 지금까지의 한반도의 방향을 새롭게 정리할 만큼의 중요한 책자이다. 여기에 의거해서 조미조약이 맺어지고, 조선은 개방을 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책자는 전통적인 성리학자들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이것이 신사척사운동이며, 그 핵심은 서양의 종교인 개신교를 배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반대운동은 결국 안기영사건과 더 불어 반역사건으로 간주되게 되었고, 조정으로부터 상당한 박해를 받았다. 필자는 이 신사척사운동이 성리학적인 질서가 무너지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며, 이 사건 다음에 개화와 개신교 선교가 시작되는 것이다.
5. 조미수호조약: 독립, 거중조정, 통상, 선교
1880년 조선책략의 도입과 더불어서 조선에서는 본격적인 개방이 시작되었다. 고종은 조선책략의 조언을 따라 미국과 수교를 결심하였고, 이것을 이동인을 통하여 일본에 전달하였다. 아울러서 고종은 1881년에는 청의 총리아문을 본받은 통리아문을 새롭게 만들어서 개방정책을 주도하게 하였고, 한편으로 청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무기에 대해서 배우게 하는 동시에 일본에도 신사유람단을 파견하여 본격적으로 일본에서 진행되고 있는 개화문명을 배우도록 하였다. 이것은 고종과 영의정 이최응, 그리고 오래동안 개화를 준비한 박규수의 제자들을 중심으로한 개화파들의 노력이었다. 동시에 중국도 일본도 조선이 미국을 비롯한 서구국가들과 교역을 하여 다같이 개화를 추진하도록 했다.
이런 노력이 열매를 맺은 첫 번째 결과가 바로 1882년 5월 22일에 체결된 조미조약이다. 조미조약은 조선이 비로소 서양의 근대질서를 배우고, 여기에 편입된 최초의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선이 강화도조약을 사대교린의 질서 안에서 이해했다는 것과 비교할 때 한 걸음 전진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개화 역시 우리의 주체적으로 진행하지 못하고, 중국에 의지한 것이 그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조미조약은 미국인 슈펠트와 중국인 이홍장이 주도해서 만든 것이다. 슈펠트는 1887년 제너럴 셔만호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서 처음 조선에 온 다음에 페리가 일본을 개항한 것처럼, 자신은 조선을 개항할 것을 다짐하였다. 다행히 그 후 미국 내에서 조선과의 수교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고, 슈펠트는 그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것은 1880년 여름 중국의 이홍장과의 대화 가운데 구체화되었고, 이홍장은 조선 정부에 더욱 조미수교를 강조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슈펠트는 1881년 여름 다시 중국을 방문하여 이홍장과 본격적으로 논의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 내에서 개화에 대한 강력한 반대 때문에 이것은 쉽게 진척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881년 가을 고종은 다시 조미조약 체결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고, 이 일을 청의 이홍장에게 위임하였다. 그리해서 1882년 봄 이홍장과 슈펠트는 조미조약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중국과 조선의 관계였다. 중국은 조선이 서양국가들과 국교를 맺기를 원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화질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조선책략에서도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중국의 생각은 1880년 가을 하여장이 쓴 “주지조선외교의”(主持朝鮮外交議)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으며, 여기에는 중국이 조선을 전통적인 중화질서를 넘어서서 조선을 완전한 속방으로 만들려는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이런 입장의 중국은 조약문에 조선이 중국의 속방임을 명기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슈펠트는 분명하게 반대하였다. 미국은 조선을 하나의 독립국으로 인정하며, 중국과 조선의 관계는 두나라의 내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관계는 조약이 아니라 속방조회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것은 조선이 중화질서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국제질서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조미조약 제 1조에 나오는 거중조정이다. 조미조약의 핵심은 균세이론을 통하여 어떤 한 나라가 조선을 독점하는 것을 막자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이해관계를 조정해 줄 수 있는 거중조정이다. 중국은 이미 1858년 미청조약에 이런 항목을 만들었다. 그 제 1조에 미국과 중국은 다른 나라가 부당하게 행동할 때에 여기에 개입하여 중재할 것을 요청하였다. 여기에 의해서 1860년 제 2차 아편전쟁 때 미국은 영불에 가담하지 않고, 이들과 중국 사이에 거중조정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조미조약의 제 1조는 바로 이런 미청조약을 따라서 거중조정의 항목을 제 1조에 삽입한 것이다. 미국이 이 조항을 제대로 지킨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일본에 의해서 부당하게 식민지가 되었을 때에 이 조항을 근거로 하여 조선문제에 개입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던 것이다.
조미조약은 지금까지 양국사이에 논의된 많은 내용들을 담고 있다. 우선 미국은 안전한 항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미국의 배가 조선의 해안에서 어려움을 겪었을 때 보호 받을 수 있도록 했고(3조), 조선과 미국은 통상을 할 수 있도록 조항(5조)을 만들었으며, 이럴 경우 관세를 부과하는 권한은 조선에게 있다고 밝혀 강화도 조약 보다 더 나은 조건을 마련하고 있다. 조미조약의 이 조항에 근거하여 일본도 결국은 강화도 조약을 수정하여 조선의 관세주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종교문제이다. 잘 알다시피 신사척사운동의 가장 중요한 초점은 서양종교를 막는 것이었다. 교당설립금지는 이동인이 만든 초안에 나오고 있고, 이어서 김윤식이 이홍장과 협의하였다. 그러나 이홍장은 이 조항을 슈펠트에게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만일 이것을 강조할 경우 조약이 성사되지 못할 염려가 있다고 이홍장은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슈펠트도 조선에 이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사실 정교분리를 주장하는 미국은 다른 나라에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단지 미국이 원하는 것은 누구나 자신이 믿고자 하는 대로 믿을 수 있는 자유였다. 슈펠트 역시 이것이 조선에게 매우 민감한 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슈펠트는 조약에서 종교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이 점은 종교문제에 대해서 양측이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조선측은 선교를 허용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고, 미국측은 선교를 금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종교문제는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당시 사회가 어떻게 흘러가는가에 따라서 변할 수 있는 내용이 되었다. 조선의 개신교선교는 이런 모호한 조항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제 11조에는 “양국 학생으로서 언어, 문자, 법률, 또는 기슬을 학습하기 위하여 왕래하는 자는 돈독한 친목과 우의로서 가능한 모든 보호와 원조를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여 이런 목적으로 미국인들이 조선에 올 수 있게 된 것이다. 많은 선교사들은 이런 조항으로 인해서 조선에 올 수 있었고, 이렇게 열려진 문은 점점 더욱 확대되어 갔다.
이렇게 슈펠트와 이홍장 사이에 합의한 조미조약을 조선정부가 수용하여 1882년 5월 22일 미국 대표 슈펠트가 이홍장의 막료들과 함께 인천항에 와서 조선대표 신헌과 조미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것으로서 조선은 쇄국의 문을 열고 서양제국과 손을 잡고 국제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슈펠트는 자신이 조선과 맺은 조약을 페리가 일본과 맺은 조약과 비교하였다. 페리 조약이 함포를 앞세우고 강제적으로 일본과 조약을 맺은 것이라면 슈펠트의 조약은 함포의 도움이 없이 외교적으로만 조약을 맺은 것이다. 슈펠트는 무력 사용도 고려했지만 미국정부는 무력 사용을 반대했으며, 결국 무력이 없이 조선과 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슈펠트는 자신이 맺은 조약이 일본과 맺은 조약 보다 더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슈펠트와 이홍장이 합의해서 만든 이 조약은 기존에 서양제국이 중국이나 일본과 맺은 조약보다 훨씬 조선에 유리한 것이었다. 미국은 조선의 관세주권을 인정하였으며, 통상은 인정하였지만 선교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기존의 서영국가들과 맺은 조약이 거의가 다 신교의 자유를 언급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이런 점에서 조선의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한 조약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박명수(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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