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목자교회가 11일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라는 주제로 1111기도의 날 금식성회를 개최했다. 이날 오전 강사로 나선 박리부가 사모는 ‘진리를 붙잡고 기도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박리부가 사모는 “무엇을 붙잡고 기도하냐에 따라서 우리의 기도가 달라진다. 진리를 붙잡고 하는 기도는 여건, 상황과 관계없이 우리를 흔들리게 하지 않는다. 기도할 때 나는 흔들리지 않고, 기도하는 상황이 흔들려야 하는데, 우리가 기도하는 상황은 철옹성처럼 흔들리지 않고 기도하는 나는 흔들리는 것을 늘 경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상황에 따라 기도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진리에 묶어두는 것이 필요하다. 진리로 기도하는 것과 경험으로 기도하는 것은 처음엔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 기도가 쌓여 가다 보면 엄청난 역사를 만들어내는 차이가 있게 된다”고 했다.
그는 “우리의 기도를 붙잡아 주는 두 가지 축이 있다. 하나는 진리로 기도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기도하는 것이다. 진리는 우리의 기도가 흔들리지 않게 해주고,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로 하는 기도는 생명이 충만한 기쁨의 기도가 되도록 한다. 기도하는 우리에게는 이 두 축이 다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진리란 무엇일까? 진리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걸 믿는다. 그런데 기도는 마치 치성을 드리듯 기도의 양을 채워야 응답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우리가 구원을 은혜로 받았으면 나머지 우리 삶의 모든 부분도 아무 공로 없이 받은 그 은혜가 그대로 적용되어야 진리이다. 기도도 우리가 은혜로 받았다. 주님이 이 문을 열어주신 것”이라며 기도의 진리에 관해 설명했다.
그는 “첫 번째 우리의 생명이 바뀌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중보적 존재, 기도로만 사는 존재로 바뀌었다는 게 첫 번째 진리이다. 갈라디아서 2:20, 로마서 6:4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서 새로운 생명으로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구원은 기도할 자격을 얻은 게 아니라 새로운 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이제 기도로만 사는 존재로 바뀐 것이다. 태아가 탯줄을 통해 어린아이가 엄마의 젖을 통해 영약을 공급받는 것과 똑같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 생명을 공급받는 존재로 바뀌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는 존재라는 걸 붙잡게 되면, 더는 기도가 자랑거리가 아니고 죄책감을 느낄 일도 아니”라고 했다.
박 사모는 “건강해지려면 밥맛이 없어도 밥을 억지로 먹는다. 영적으로도 기도가 잘 안 되면 5분 앉았다가 일어날 것이 아니라 끙끙거리는 기도의 자리가 있어야 충만한 기도가 따라온다. 말씀과 기도는 우리의 생명줄이다. 기도가 없어서 숨이 막히고, 말씀을 안 먹었더니 영적으로 허기진다는 경험의 여러분의 경험이 되길 바란다. 부끄럽지만 젊었을 때는 새벽에 일어나기 힘들었다. 기도하러 와서 졸다갈 때도 있었다. 그럼 한 시간 더 자고 맑은 정신으로 기도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합리적인 고민을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면 대부분 바쁜 일들이 이어져서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없게 된다. 그러니까 졸더라도 기도의 시간을 꾸준히 지키는 게 그다음의 기도로 가는 힘이 된다. 우리 삶에 무수히 많은 기도와 말씀의 징검다리들이 우리의 영적인 상황이 더 올라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된다”고 했다.
이어 “두 번째는 우리의 신분이 바뀌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다. 기도는 에덴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는 사역으로의 부름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로의 부름이다. 캐나다 영성신학자 제임스 휴스턴은 하나님께 있어서 우리가 어떤 기도를 드리냐보다 하나님께 우리가 누구냐에 하나님의 관심이 더 있으시다고 했다. 하나님이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누리기 원하시는 것이다. 기도의 진리의 관점에서 원형에 맞는 그림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벌거벗었으나 하나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옆에 졸졸 따라다니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마음껏 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죄를 지은 다음 에덴에서 쫓겨나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갈 길이 다 막혔다. 구약에선 그 문을 조금 열어주셨지만 나 스스로가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휘장을 찢으시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에덴에서처럼 거리낌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는 그 자격과 위치를 회복했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마태복음 7장 7~8절에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씀이 나온다. 우리는 이것을 좀 더 세게 두드려봐 그 정도로는 안 돼!라고 듣는다. 이 말씀은 그런 게 아니다. 너 두드려도 괜찮아, 마음껏 찾아도 돼, 마음껏 소리 질러 구해도 돼. 내가 너 아버지거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에덴에서 마음껏 발가벗고 다녀도 되는 존재로 바뀌었다는 게 우리 마음에 와닿으면 말씀을 읽으면 해석이 달라진다. 하나님 앞에 앉아서 ‘아버지 제가 왔어요’ 이렇게만 기도하면 된다”고 했다.
박 사모는“저희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사모의 직임은 끝났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영적인 책임을 가지고 매일 기도하러 교회에 가셨다. 그러곤 교회에 앉아서 ‘하나님 제가 왔어요, 아버지 제가 왔어요. 제 몫의 기도의 불을 켜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왔어요’라고 기도하셨다. 그 얘기를 듣는데 제 마음이 너무 뜨거워졌다. 제 마음이 메마르고 기도가 답답하게 여겨질 때면 기도의 자리에 앉아서 어머니처럼 ‘아버지 제가 왔어요, 리부가가 왔어요’ 이러면서 기도를 시작하면 금방 주님이 제 옆에서 등을 두드리면서 기도를 들으시는 것 같은 충만함과 뜨거움으로 옮겨가는 것을 경험했다”고 했다.
이어 “세 번째, 기도의 시작이 바뀌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하나같이 사람이 신을 향하여 치성을 드린다. 사람이 신을 찾아 나가고 신을 향해 간절히 기도한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셔서 말을 거셨다는 것이다. 출발점이 너무 다르다. 이게 우리의 기도와 세상의 기도가 다른 점이다. 기도의 그림은 내가 하나님께 구했더니 하나님이 응답하셨다가 아니다.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셔서 그 말씀에 내가 반응했고, 그랬더니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시작을 하나님이 하셨으니 끝을 하나님이 맺을 것이다. 내가 시작했다면 내가 열심히 치성드리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데 기도를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니, 기도는 절대 망할 수가 없다”고 했다.
이어 “네 번째, 기도의 발판을 이미 만들어 놓으셨다. 성경적인 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다 운행하신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의 중보를 통해 성령님의 권능으로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삼위일체로 절대 구원이 꺾이지 않도록 보증을 이루시는 것처럼 기도에도 똑같이 그 역사를 이루신다. 로마서 8장 26절에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라고 나온다. 하나님이 모든 문을 활짝 여셨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간구하시고, 성려님이 오셔서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고 구원의 조치를 완벽하게 취한 것과 똑같이 기도의 조치도 망할 수 없도록 주님이 완벽하게 다 이루어 놓으셨다”고 했다.
이어 “다섯 번째, 기도의 주체가 바뀌었다. 기도는 내 입으로 하는 것이지만, 중심에서 기도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우리가 중보기도와 기도가 다르다고 말한다. 기도가 나로부터 시작되었다면 기도와 중보기도는 다르다. 그러나 기도는 주님이 시작하셨고, 내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는 분도 성령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나의 기도, 중보기도가 따로 있지 않다. 나를 위한 기도도 중보기도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시는 걸 내 입으로 선포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중보기도와 기도의 차이는 내용과 범위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니라 그 기도가 나로부터 시작되었는지 주님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예수님의 사역을 한마디로 말하면 요한복음 17장이다 모든 중보의 기도 속에 예수님의 기도가 담겨 있다. 그러므로 기도는 어떻게 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믿느냐, 누구를 믿느냐의 문제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만큼 기도가 달라진다. 어떤 신학자는 중보기도란 단어는 사람이 쓸 수 없다고 말한다. 예수님 한 분만 중보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중보자라고 말씀해주셨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이제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니 예수님이 중보자시라면 우리도 중보자라는 것이다. 내 안에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기도를 이끌어 가신다”고 했다.
그러면서 “복음은 예수를 믿었더니 이렇게 살아야 한다가 아니고, 구원을 받았더니 이렇게 살게 되더라이다. 예수를 믿었으니까 하나님나라와 의를 위해서 구해야 하잖아가 아니라, 예수를 믿었더니 그 은혜가 하나님나라를 위해서도 구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다는 것이다. 감히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존재가 되게 만드셨다는 게 기도라는 것”이라고 했다.
박리부가 사모는 “우리 눈에 다시 도와 같이 터널 끝에 서 있는 것 같았는데 앞에 또 터널이 열리는 상황을 만날 때가 있다. 그때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진리이다. 그 터널을 빠져나가고 다시 도와 같은 상황에서 앞으로 나아갈 힘은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이신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도를 시작하셨다. 나는 기도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다. 기도는 망할 수 없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다 보증해 주셨다. 내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 모를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중보하고 계시다. 이 진리를 우리가 붙잡고 이 시간 기도하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