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사에서 가장 큰 수수께끼는 이승만(1875-1965) 대통령의 초기 행적이다. 이승만은 전쟁이 일어난지 3일 째인 27일 새벽부터 잠행에 들어가서 대구, 대전, 익산, 목포를 거쳐 7월 1일 부산에 도착하기까지 4일 간의 비 공식 일정을 보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의 행적을 비난하는 측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간 선조에 비유한다. 반면 이승만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초기에 파리를 떠나 영국으로 망명했지만, 나중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승전국의 지위를 획득한 프랑스의 드골처럼 위대한 전쟁 영웅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어느 쪽의 주장이 옳은 지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양측의 주장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이승만을 선조에 비유하는 측의 주장부터 살펴보자. 그들은 이승만을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무능한 대통령, 남침을 당한 이후 국민을 내팽개치고 피란을 떠난 무책임한 지도자, 한강다리를 조기에 폭파하여 수 많은 서울 시민을 공산 치하로 몰아넣은 비정한 대통령, 전쟁 중에도 장기 집권을 위해서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킨 권력욕의 화신 등으로 주장한다.
그 중에서도 박명림 교수는 『한국 1950 : 전쟁과 평화』(나남, 2003)에서 "6월 25일 전쟁 시작 이후, 특히 27일 서울 탈출 이후 부산을 거쳐 7월 9일 대구로 이동하기까지 서울-대구-대전-수원-대전, 다시 대전-이리-목포-부산-대구에 이르는 15일 동안의 이승만의 행적은 한 마디로 의문투성이였다. 단순히 우왕좌왕이라고 부르기에는 국가 원수로서 너무 갈팡질팡하고 있었다"라고 이승만이 보여준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어지는 글이다. "누란의 위기에서 이승만은 두 번의 통치 공백, 사실상의 통수권 유고 사태를 빚은 것이다. 처음엔 대구로 혼자 도망갔다가 대전에 도착할 때까지 열차에 머문 시간이 12시간 30분이었고, 두 번째는 훨씬 더 길어서 대전-부산 간 이동에 소요된 시간은 32시간이었다. 이 시간 동안 그는 아무런 군대 통수 기능을 행사할 수 없었고, 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의 입만을 바라보던 각료들이 황망히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동안 정부로서는 아무런 정상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다." 박명림의 설명은 무능하고 무책임한 지도자 이승만의 일탈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 반면에 남정옥 박사는 「남침 이후 3일간,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이라는 논문에서 정반대의 평가를 내린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의 남침으로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던 3일간, 전쟁에 필요한 사안들을 우선 순위에 따라서 침착하게 처리함으로써, 김일성의 적화 야욕을 꺾었다"고 강조한다.
이어지는 그의 주장이다. "이승만은 3년 1개월 간의 전쟁 동안 김일성으로 하여금 전쟁을 할 수 있도록 물심 양면으로 지원한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북진 통일을 가로막은 워싱턴과 대립하며, 대한민국의 운명과 우리 민족의 생존권을 놓고 싸우고 또 싸웠다. 이른바 '벼랑 끝 전략'을 구사했다. 대표적인 것이 유엔군에서 국군 철수와 국군 단독의 북진 통일, 반공포로 석방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승만의 뛰어난 지도력에 의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을 극적으로 살려냈다."
그러면 과연 누구의 주장이 옳은 지 판단하기 위해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6월 25일 오전 10시경 창덕궁의 비원에서 산책 중이던 이승만은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 총경으로부터 '북한의 남침'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고 즉시 경무대로 돌아왔다. 이어 10시 30분에는 신성모 국무총리 서리 겸 국방부 장관에게서 남침 상황을 공식 보고 받는 자리에서 국무회의 소집을 지시했다. 11시와 오후 2시 두 차례에 걸쳐서 국무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그 중간에 무초(John J. Muccio) 주한 미국 대사를 경무대로 불러서 미국이 파악한 전황을 듣고 사태를 논의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무초 대사와의 회담을 마치고 곧바로 국제전화로 주미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그때가 6월 25일 13시(워싱턴 시간, 24; 24시)이었다. 이승만의 지시를 받은 장면 대사는 25일 15시(워싱턴 시간) 미 국무부를 방문하고 지원을 요청했다. 이때 미국은 "이 문제를 유엔에 논의하기 위해서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요구했다"고 알려줬다.
한편 25일 밤 9시 이승만은 무초 대사를 경무대로 다시 불러 대화를 나누었다. 무초 대사의 증언이다.
"이 대통령은 '내가 공산군에게 붙잡히게 되면 국가적으로 곤란하게 되지만, 우리의 방어 능력이 이렇다 보니 내가 서울을 빠져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만약 대통령이 피신한 사실이 알려지면 한국군 병사들은 한 명도 북쪽을 향해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군 전체가 전쟁을 포기할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래도 대통령은 피난을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알아서 하십시오. 나는 머물러 있겠습니다.' 이같은 강경한 태도에 대통령도 서울에 머물러 있기로 작심했다. 최소한 그날 밤이라도."
무초 대사의 설명 역시 이승만은 비겁하고 무능한 지도자처럼 보인다. 계속되는 무초의 증언이다. "다음 날인 26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또 대통령을 찾아가서 온 종일 설득했다. 그때 이미 대통령은 기차 2량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이런 이승만의 태도를 보고 무초는 한국에 거주하는 모든 미국인을 일본으로 피난 시킬 결심을 내렸다. 이미 미국은 1년 전부터 대사관 중심이 되어 한국에 거주하는 미국인을 일본으로 피신시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는데, 대상은 비 전투 미국인과 함께 영국인, 프랑스인, 유엔 한국위원단 임원과 중화민국 대사관원이 포함되었다.
문제는 전쟁 개시 사흘 째인 27일에 발생했다. 이승만 대통령 부부는 이른 새벽에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 총경을 비롯한 수행원 4명을 데리고 서울역에 도착했다. 새벽 4시 서울역을 출발한 기차는 대구까지 내려갔다가 그날 오후 대전으로 올라왔다. 그날 저녁 충남 도지사 관사에 머루르며 대전방송국 설비를 이용하여 "서울 시민은 안심하라"는 연설을 방송했다. 한편 이날 미 대사관에서도 2,500명에 달하는 주한 미국인에게 비상 연락망을 가동하여 인천항에 집결시킨 후 배를 타고 일본으로 대피시켰다.
이승만의 피난 소식을 들은 3부 요인들도 대전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사흘을 대전에 머무르던 이승만은 7월 1일 새벽 3시에 승용차를 이용하여 이리역으로 내려간 후 그곳에서 8시간을 기다린 끝에 3등 객차 두 칸을 단 기관차를 구해 목포로 내려갔다. 목포 부두에서 5백톤급의 소 함정 제514함을 타고 19시간의 항해 끝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렇게 소요된 시간은 총 32시간이다. 부산에 정착한 이승만 대통령은 경남 도지사 관사에 머무르면서 1,023일간의 부산 임시 수도 시절을 보내게 된다. 이런 와중에 일본 망명설도 등장한다.
이상에서 이승만의 행적을 두고 - 첫째, 6.25가 일어나자 이승만은 정말 도망 갈 궁리만 했을까? 둘째, 이승만은 왜,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피난 열차에 올랐을까? 셋째, 이승만은 왜, 한강다리를 조기에 폭파하여 수 많은 서울 시민을 공산군의 치하로 몰아넣었을까? 넷째, 이승만은 왜, 북진을 주장하는 거짓 방송을 했을까? 다섯째, 이승만의 일본 망명설은 사실일까? - 다섯 가지의 의문이 제기된다. 이제부터 이 같은 의문의 실체를 추적해보고자 한다.
1. 이승만은 정말 도망 갈 궁리만 했을까?
무초 대사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가 25일 저녁에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한 내용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대통령은 내각에서 오늘 밤 정부를 대전으로 옮길 것을 결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자신의 안전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정부를 반드시 보전해야 하며 만약 대통령 자신이 공산군에게 붙잡힐 경우 대한민국의 체제에 심각한 타격을 줄 것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으며, 정부가 사로 잡히는 위험을 감수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한 내용은 모두 무초 대사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무초 대사와 미 국무부 간의 전문 자료 21건(6.25.10:00∼27.08:00)이 1976년에 발간된 미 국무부 대외자료(FRUS: Foreign Relations of United States)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전쟁 초기 이승만의 행적을 알려주는 매우 귀중한 기초 사료이다.
이 같은 주장의 근거는 이승만이 25일과 26일 이틀 동안에 미국을 상대로 보여준 외교 행위이다. 이승만은 무초를 불러 미국이 한국군에게 '더 많은 무기와 탄약'을 제공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에 무초는 15시에 국무장관에게 전문 보고한 결과,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군을 위한 특정 탄약 10일분을 즉시 부산으로 보내라"는 지시로 실행됐다. 또 이승만은 미 극동사령부(FECOM)에 무스탕(F-51) 전투기를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여 26일 무스탕(F-51) 전투기 10대의 인도를 발표해 한국 공군이 역사상 첫 전투기를 보유하게 된 것이다.
당시 상황은 '프란체스카의 일기'(<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에도 소상하게 기록되었다. 이승만은 26일 새벽 3시에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때 통화에서 이승만은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이 누구의 책임이오? 당신 나라에서 좀 더 관심과 성의를 가졌다면 이런 사태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요. ... 어서 한국을 구해주시오"라고 거칠게 항의했다. 물론 이승만이 이렇게 무례하게 통화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우호연맹(League of Friends of Korea)의 고참 멤버이던 맥아더의 장인과의 인연으로 맥아더와도 소령 때부터 쌓아온 교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과 통화를 마친 맥아더는 무스탕 전투기 10대, 105㎜ 곡사포 36문, 155㎜ 곡사포 36문, 바추카포 등을 긴급 지원하도록 조치했다. 곧이어 04시 30분 워싱턴의 장면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트루먼 대통령을 직접 만나 군사 원조의 시급한 협조를 요청하고, 미국에 체류 중인 정일권 장군, 손원일 제독을 즉시 귀국시킬 것을 지시했다. 이에 장면은 26일 15시(워싱턴 시각)에 트루먼을 예방하고 이승만의 요청을 전달한 결과, 트루먼으로부터 공식적인 한국 지원을 확인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이승만이 무초에게 한 말과 실제 행동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정말로 긴급히 피난을 갈 생각이었다면 25일 밤이나 26일에 일찍 떠났을 것이지만, 이승만은 27일 새벽 1시까지 전쟁 상황을 지휘하다가 새벽 3시가 되어서야 피난을 떠났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이 무초 대사를 상대로 피란을 떠난다고 압박한 것은 미국이 한국을 절대 포기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 하에 조속한 지원을 촉구하는 고도의 협상용 발언이었다는 주장이다. (온창일,「전쟁 지도자로서 이승만 대통령」, 유영익 편, 『이승만 대통령 재 평가』, 연세대 출판부, 2006, p.215)
한편 이날 오전 10시에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으로 '군사 경력자 회의'를 소집하여 자문을 구했다. 그리고 오전 11시이승만은 국회 본 회의에 참석하여 초당적인 협조를 요청했으며, 이에 국회는 유엔 총회에 한국의 지원을 호소하는 메시지인 '비상시국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처럼 이승만은 풍전등화와 같은 국가의 위기 앞에서 밤낮없이 전쟁 국면에 대응했다. 전쟁 상황에 취해야 할 현안들을 조치하면서 미국과의 협력 체제도 원활하게 가동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전쟁이 일어나자 도망갈 궁리만 했다"는 얘기는 사실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2. 이승만은 왜,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피난 열차에 올랐을까?
<임기상의 역사산책>은 이승만 대통령의 피난길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승만 대통령 부부는 6월 27일 이른 새벽에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 총경을 비롯한 수행원 4명을 데리고 서울역에 도착했다. 국무위원은 물론 국회, 군 지휘관, 미국 대사관 등 어디에도 탈출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서울역에 도착한 이승만은 파나마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아무도 몰라봤다고 한다. 새벽 4시에 출발한 기차는 대구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대전으로 되돌아갔다."
계속되는 설명이다. "대전에 머물던 이승만은 여기서 또 다시 기이한 행각을 벌인다. 이승만은 7월 1일 새벽 3시 3명의 수행원만 데리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대전을 빠져나갔다. 서울을 빠져나갈 때처럼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탈출했다. 부산을 향해 출발했는데 가는 코스가 불가사의했다. 대전-대구-부산으로 가지 않고 전라북도 이리까지 승용차로 이동한 뒤 거기서 기차를 타고 목포로 갔다. 비밀리에 떠났기 때문에 이리역에 기차가 있을 리가 없었다. 대통령 일행은 역에서 8시간이나 기다리다 겨우 3등 객차를 두 칸 단 기관차를 구해 출발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 같은 임기상의 주장은 얼마나 정확한 것일까? 이승만이 피난을 떠나게 된 과정에 대해서는 프란체스카의 영문 일기만큼 자세한 기록은 없다. 그 일기를 번역하여 수록한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를 통해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27일 새벽 2시, 신성모(국방부 장관), 이기붕(서울시장), 조병옥(내무부 장관)이 경무대를 찾아왔다. 이들은 '각하 서울을 떠나셔야겠습니다'라고 권유했고, 이승만은 '안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 거절했다. 이 순간 경찰 간부로부터 적의 탱크가 청량리까지 들어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러자 프란체스카가 나서 수원까지 피신할 것을 제안하였고, 신성모도 '각하가 수원까지만 내려가 주시면 작전하기가 훨씬 쉽겠습니다'라고 권유했다."
이어지는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내용이다. "27일 새벽 3시 30분 남행열차를 타기로 결정했다. 비서관이 간단히 짐을 챙겼다. 금고를 탈탈 털어도 5만원 밖에 없었다. 이 돈을 비서에게 맡기고 서울역에서 기차를 탔다. 유리창이 깨지고 좌석의 스프링이 튀어나온 3등 객차다. 대구에 도착하니 오전 11시 40분. 눈을 뜬 대통령은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대구라는 대답에 대통령은 너무도 침통했다. '내 평생 처음 판단을 잘못했어. 여기까지 오다니...' 대통령은 비서관에게 '서울로 올라가라'고 명령했다. 12시 30분 기관차의 머리를 서울로 되돌렸다."
"간밤을 뜬 눈으로 새운데다 식사조차 못한 형편들이었다. 나는 보리차를 대통령에게 권했으나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입을 꽉 다문채 창밖만 응시하고 있었다. '수원까지만 가면 자동차로 서울로 들어갈 수 있겠지.' 대전역에 도착하자 대통령은 서울행을 고집하였다. 2층 역장실서 잠시 휴식을 취할 때, 미국 대사관의 드럼라이트 참사관이 달려왔다. 유엔이 대북 군사제재를 결의했고,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해-공군 출동과 긴급 무기 원조 명령을 내렸다고 전했다. 암담하던 분위기는 활기를 찾았고 대전에 임시정부를 차리기로 했다."
이렇게 프란체스카의 일기는 당시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국무위원은 물론 국회, 군 지휘관, 미국 대사관 등 어디에도 탈출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임기상의 주장은 틀린 말이다. 이승만이 피신한 바로 다음 날인 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고, 서울에 남아 있던 정부 요인은 가족까지 납치, 고문, 살해 당했다. 이 같은 점을 고려할 때, 이승만의 피신은 서울을 사수하다가 북한군에게 생포되거나 죽을 수도 있는 '전시 대통령 유고'라는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기되는 의문들이 있다. 첫째, 무초의 전문과 프란체스카의 일기에 나타나는 상반된 주장이다. 무초는 25일 전쟁 당일부터 이승만이 피난 갈 것을 주장하였다고 밝힌데 반해,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이 마지막까지 서울을 사수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실제 대통령의 피난 열차는 언제부터 대기하고 있었는지를 『임시 수도 1000일』(부산일보사, 1985)를 통해 살펴보자.
"대통령의 피난 문제는 26일 13시경 의정부가 함락된 이후 대두되었지만 이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16시경 프란체스카 여사는 비서에게 기밀 서류를 챙기게 한 뒤, 교통부 장관에게 특별 열차를 대기하도록 전했다가 전황이 호전된다는 소식을 듣고 피난 준비를 취소시켰다. 이승만 대통령도 내일 아침에 국무회의 소집을 지시했다. 그런데 밤 10시가 넘자 경무대 비서가 피난 열차를 대기하도록 교통부 장관에게 연락했다." 전황에 따라 피난을 떠날 준비와 서울을 사수하려는 의지가 교차하고 있었던 셈이다.
둘째, 이승만이 탄 피난열차는 왜 대구까지 내려왔다가 대전으로 되돌아갔을까? 프란체스카의 일기에도 그 이유는 기록되지 않았고, 다른 자료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다만 무초 대사가 6월 27일에 국무부에 타전한 전문에서 짐작할 수 있다. "신성모가 아침 7시에 나를 찾아와 대통령은 새벽 3시에 진해를 향해서, 그리고 내각은 아침 7시에 남쪽 지방을 향해 특별열차를 타고 떠났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진해를 향해" 남하할 것이라는 부분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피신을 주도했던 신성모 국방부 장관의 의도는 대통령이 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었고, 해군사령부가 있던 진해로 내려가기를 바라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대구에 도착한 이승만이 서울로 돌아 갈 것을 명령한 것이다. 프란체스카 일기에는 당시 상황을 "오전 11시 40분. 눈을 뜬 대통령은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대구라는 대답에 대통령은 너무도 침통했다. '내 평생 처음 판단을 잘못했어. 여기까지 오다니...' 대통령은 비서관에게 '서울로 올라가라'고 명령했다"고 기록하였다.
계속되는 일기 내용이다. "수원까지만 가면 자동차로 서울엔 들어갈 수 있겠지. 그의 머릿속엔 서울 생각 뿐이었다. 기차가 대전에 도착했다. 플렛폼엔 윤치영과 허정 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각하. 여기서 내리십시요. 서울은 이미 빨갱이 수중에 들어갔습니다.'라며 북상을 만류했다." 이처럼 프란체스카의 일기를 토대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보면, 이승만의 1차 피난 일정의 수수께끼는 어느 정도 풀린다.
일기는 7월 1일 부산으로 피난한 경위에 관해서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새벽 3시 황규면 비서가 대통령을 깨웠다. 공산군 탱크가 이미 수원을 지나 빠른 속도로 남진하고 있다는 긴급 보고였다. 보고를 받은 지 20분쯤 뒤 미 대사관 1등 서기관 해럴드 노블이 관저로 달려와 대전 이남으로 옮겨야 한다고 대통령을 설득했다. 신 국방장관과 정일권 장군도 이내 도착했다. ... 노블이 정부의 계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대전 사수 보다 남쪽으로 옮겨 앞으로의 대책을 세우는 것이 시급하다며 애원에 가까운 설득을 했다. 신 장관도 거의 울음 섞인 목소리로 남하를 권유했다."
이번에도 서울을 떠날 때처럼 국방부 장관과 군 지휘부는 물론 미 대사관의 합의 가운데 대통령의 남하를 결정했지, "서울을 빠져나갈 때처럼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탈출했다"는 임기상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행선지를 정하는 것 역시 참모들의 판단이었지, 대통령이 직접 결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대전에서 경부선을 타고 부산으로 직행하지 않고, 왜 전북 이리(익산)까지 자동차로 이동해서 이리역에서 호남선을 타고 목포로 내려갔을까? 하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소개할 '이승만의 일본 망명설'에서 다루려고 한다. <이하 다음 회에 계속>
김형석 목사(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대한민국역사와미래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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