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제16> 자신 안에 있는 것을 행함으로써 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죄에 죄를 더함으로써 이중으로 범죄하게 된다.
앞서 말했던 것들에 근거하여 다음의 사실이 더 분명해 진다: “사람이 자신 안에 있는 것을 행한다면, 그는 모든 것을 스스로 얻으려고 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 만일 그런 죄악을 가지고 은혜를 받을 준비를 하거나, 스스로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신의 죄에 매우 오만함 까지 덧붙여져, 죄에 죄를 더하게 되고, 악이 악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 매우 큰 죄를 범하게 된다. 예레미야 2장 13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지고,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의 능력에 의해 선을 행한다고 여기는 본문이다.”
지금 당신은 질문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죄 이외에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무관심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답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들음으로, 은혜를 받기 위해 엎드려 기도하고, 우리의 구원이요, 생명이요, 부활이신 그리스도 안에 희망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로 인해 우리는 ‘율법을 통해 죄를 인식하게 되고, 죄를 인식함으로써 은혜를 구하고 받는다. 따라서 하나님은 “겸허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벧전 5:5) 그리고 “자신을 낮추는 자마다 높아질 것이다”(마 23:12)라고 말씀하신다. 율법은 낮추고, 은혜는 높인다. 율법은 두려움과 분노를 초래하고, 은혜는 희망과 자비를 가져온다.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게 되고”(롬 3:20), 죄를 깨달음으로써 낮아지게 되고, 낮아짐으로써 은혜를 얻는다. 따라서, 하나님의 낯선 행위도 그의 본성으로부터 비롯된다: 하나님은 인간을 의롭게 하기 위해서 그를 죄인으로 만드신다.”(LW 31:50)
우리는 앞선 논제 15에서 “타락 이전에도 인간의 자유의지는 오직 수동적 능력 안에서만 선을 행할 수 있다”는 루터의 담대한 주장에 대해 살펴보았다.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은 ‘적어도 타락 이전 죄가 없는 순수한 상태에서는 인간 안에 능동적 자유의지가 있다’고 가르쳤다. 그렇지 않으면, 타락에 대한 인간의 책임성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루터는 심지어 타락 이전에도 인간의 자유의지는 오직 ‘수동적 능력’만을 갖고 있어,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결코 구원에 이르는 선을 행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논제 16에서 루터는 다시 한번 중세 스콜라 신학의 유명한 논제, 곧 “자신 안에 있는 것을 행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신학적 견해를 강하게 비판한다. 중세 후기 이러한 스콜라 신학을 대표하는 학자가 바로 가브리엘 비엘(Gabriel Biel)이다. 1484년부터 튀빙엔 대학(University of Tübingen)에서 활동했던 비엘은 스콜라 후기 신학자, 근대적 경건 운동, 그리고 인문주의적인 개혁 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비엘은 「롬바르 두스 명제집」(Sententiarum libri quattror) 에 대한 해설에서 “자신 안에 있는 것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 주시기를 거부하지 않는다.”(facienti quod in set, Deus non denegat gratiam)고 주장한다.
“영혼은 하나님을 향한 방해물들을 제거하고, 자유의지가 만들어내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행위에 의해, 첫 번째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을 얻는다. 이것은 하나님이 첫 은혜를 주시기 위해 ‘자신 안에 있는 것을 행하는 자’를 용납하신다는 사실을 통해 입증된다. 이는 정의에 대해 빚진 자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방해물들을 제거하고, 죄를 향한 행위를 멈추고, 하나님을 향한 선한 행위를 행함으로써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 안에 있는 것을 행한다. 하나님은 은혜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관대하심을 향한 선한 행위와, 그것을 가로막는 방해물을 제거하는 행위를 용납하신다.” (Gabriel Biel, Collectorium ex occamo cira quattuor libros Sententiarum, II dist, 27. q. 1, a.3. dub. 4)
비엘은 하나님의 약속과 신적 수용을 객관화시켜 신앙의 불확실성을 극복하고자, “자신 안에 있는 것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 주시기를 거부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와 연관하여 루터도 초기에는 ‘자신 안에 있는 것을 행하는 것”(facere quod in se est)에 관한 비엘의 주장을 수용했다. 루터는 1515년 후기에 특별히 초기 시편에 관한 강의와 설교에서 신적 은총의 수용을 위한 기질로서 “자신의 최선을 다할”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여기서, 마치 율법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한 사람들의 모습(figure)이고, 준비이듯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을 행하는 것(Factio quantum in nobis est)은 우리에게 은총을 가져다준다”(WA 4, 262)
그러나 1515년과 1516년 로마서 강해(Lectures on Romans) 에서부터 루터는 “자신 안에 있는 것을 행하는 것”(facere quod in se est)에 관한 교리에 반감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다른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 할 수 있고, 제시된 행위들을 수행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정말 정신 나간 것이다. 그 행위의 내용에는 적합할지 모르나,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그것을 은혜의 상태에서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 어리석은 자들이여.”(WA 56 274 11-14)
루터는 1517년 「스콜라주의 신학 논박」(Disputiatio contra scholasticam theologian) 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에서 기인한 “자신 안에 있는 것을 행하는 것”(facere quod in se est)이야 말로 은헤의 최악의 적이며, 은혜는 인간이 “자신 안에 있는 것을 행함”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명확하게 한다
“우리는 의로운 행위를 통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되어짐으로서 의로운 행위를 한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윤리학이야말로 은혜의 최악의 적이다”.(Contra Scholarium, 40~41).
그리고 이 하이델베르크 논제(1518) 16에서 루터는 “자신 안에 있는 것을 행하는 자에게 은혜 주시기를 거부하지 않는다”는 중세 스콜라 주의 교리야 말로, 도리어 ‘죄에 죄를 더할 뿐이다’ 라며 강하게 거부한다. 루터는 논제 16에 대한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아주 간결하게 설명한다.
“사람이 자신 안에 있는 것을 행한다면, 그는 모든 것을 스스로 얻으려고 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 만일 그런 죄악을 가지고 은혜를 받을 준비를 하거나, 스스로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신의 죄에 매우 오만함 까지 덧붙여져, 죄에 죄를 더하게 되고, 악이 악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 매우 큰 죄를 범하게 된다”(LW 31,50)
루터의 이러한 주장이 실로 우리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최선을 다함으로 은혜를 받을 수 없다면, 우리의 최선이 도리어 죄를 증대한다면,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한가?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은혜를 얻을 수 있는가? 인간이 죄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너무나 무기력하지 않은가? 최소한 은혜를 받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루터는 논제 16에 대한 해설의 두 번째 단락에서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지금 당신은 질문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죄 이외에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무관심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질문한다. 나는 답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들음으로, 은혜를 받기 위해 엎드려 기도하고, 우리의 구원이요, 생명이요, 부활이신 그리스도 안에 희망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로 인해 우리는 ‘율법을 통해 우리는 죄를 인식하게 되고, 우리의 죄를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은혜를 구하고 받는다.”(LW 31,50)
여기서 루터는 우리가 어떻게 은혜를 받는지에 대해 확고하게 답한다. 다시 말하면, 은혜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을 행함’으로서가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율법을 통해 철저하게 낮아질 때 획득된다. 이 율법과 분노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죄의 사슬에 묶여있는지를 알게 되고, 유일한 희망이신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된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준다’는 것이 바로 루터 신학의 핵심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더 기억할 것이 있다. 루터가 말하는 ‘비하’, ‘겸손’ 은 인간의 또 다른 행위도 아니고, 신학적인 개념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실존을 경험하는 인간의 진솔한 고백이다. 루터는 ‘진정한 겸손’ (vera humilitas) 은 하나님의 정죄와 인간의 자기 성찰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믿음으로 그(하나님)을 붙드는 자는 누구든지 먼저 자기 자신에게 악한 존재(vilis), 아무 것도 아닌 존재(nihil), 가증 스러운 존재(aboninabilis), 저주 받아 마땅할 존재(damanabilis) 가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진정한 겸손이다”(LW 10:404)
다시 말하면, 루터에게 겸손, 또는 비하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할 수 없다” 고 생각하는 단계를 의미한다. 논제 16은 바로 이 ‘절대적인 겸손’ 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러한 루터의 주장에 대해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성과 거룩한 삶을 강조하는 신학자들은 반문할 것이다. 루터의 이러한 주장이 도리어 인간의 책임성을 외면하는 것은 아닌가? 인간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견해들이 도리어 실망과 좌절감만을 안겨주는 것은 아닌가?
■ 정진오 교수는
필자인 정진오 교수는 현재 미국 Reformed University 에서 부총장 및 조직신학과 교회사 교수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