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비통함)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4~5)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1. 유약한 그리스도인들
세상에 참으로 유약한 그리스도인들이 넘쳐 납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아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을 일러 성인아이(Inner Child)라 하는데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넘쳐 납니다. 유약하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모두 미숙하다는 뜻입니다.
알다시피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구원이 없다면 교회에 다니고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타락한 인간에게 구원의 길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인간의 미래는 절망적일 것입니다.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땅에서 누가 크게 진실로 웃으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쉽게도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이 구원에 대한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구원의 초보적 지식만 가지고 있으면서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진지함이 없다는 것은 점점 이성적인 기능을 상실하고 동물적인 감각에만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들이 가지고 있지 못하는 지성과 의지와 감성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특별한 언어의 능력과 사랑과 도덕적 품성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특별한 능력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분의 살아계심을 믿고 깨달으며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는 인생을 살도록 하신 하나님 은혜의 선물들이요 배려요 특별대우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인생에 대해 진지한 사고와 깊이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가장 불쌍한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물론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 생각의 근원과 방향과 수준과 깊이와 목적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무사안일주의에 젖어있습니다. 깊이 생각하는 것을 체질적으로 싫어합니다. 그냥 되는대로 살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풍조에 물들어 자신의 구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살아갑니다. 가장 바라는 목적이 있다면 이 땅에서 편히 잘 먹고 잘사는 것입니다. 돈 잘 벌고 좋은 집을 사서 자식들과 함께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을 지상 최대의 복이라 여기고 그런 꿈들을 꾸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에도 이것만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죄악이기 때문에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류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구원을 막연히 생각하거나 대충 이 정도면 구원받았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남들도 보니 나와 별반 다를 게 없는데 나만 특별하게 구원을 위해 분투하고 노력하는 것이 쑥스럽고 별스럽게 보일지 모른다고 여기면서 그냥 교회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수준에서 왔다 갔다 하는 정도, 이 선을 적당히 지키고 사는 것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오늘날 대다수 그리스도인의 구원에 대한 인식이나 이해의 정도를 자판기에 비유합니다. 자판기에 500원짜리 동전을 넣으면 한 장의 구원 카드가 발행됩니다. 그는 이 구원 카드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자신은 이제 구원을 받았으니 더 이상 구원을 위해 동전을 또 넣을 필요가 없다고 안위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런 유약한 그리스도인들의 특징들이 소개됩니다.
1) 무엇인가 재미있는 것들로 즐겁게 해야만 교회에 출석하고 교회의 일에 협조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 출석을 자신이 선심을 쓰는 것이라 착각합니다.
2) 이들은 신학이나 교리에 대해 알지 못하고 그런 것들이 신앙생활에 왜 필요한지 그 이유조차 모른다는 것입니다.
3) 이들은 기독교 고전들을 한 권이라도 읽은 적이 없습니다. 고전을 꺼내 들면 지금 시대가 어떤 때인데 하면서 기겁을 하고 그런 케케묵은 것들을 더 이상 교회에서 가르치지 말라고 강요합니다. 대신에 이들은 종교영화나 소설로 대신 채운 다음 기독교를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합니다.
4) 이들은 자기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신앙을 지금 힘 빠진 손으로 겨우 붙잡고는 있지만 언제 그 잡은 손을 놓을지 모르는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습니다.
지금 이런 유약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당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고 부르지만 주님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그저 유치원 아이들처럼 대충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주님을 잘 믿고 살면 복을 누리고 살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혹시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위험에 대비해 들어놓은 보험 같은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인이면서 성숙하지 못하고 미숙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요?
첫째,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인생의 주인을 자기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늘 입버릇처럼 모든 일을 자기가 계획하고 자기가 판단하고 결정하고 실행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사람들이 실패하면 자기 탓으로 돌리지 않고 다른 것에 책임을 전가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세상에 길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아직 거룩한 행실이 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인스턴트 음식에 길들어진 사람은 쉽게 입맛을 고치지 못합니다. 놀기만 하던 학생은 갑자기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유약하고 미숙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행사가 여전히 낯설고 어색합니다.
셋째, 세상과 연합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의 통치 아래에 있는 곳이고 세상은 세상의 영에 의해 통치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세상은 완전히 이질적입니다. 주님은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맏지 못하나니”(요 14: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둘의 간격을 메워보려는 시도들이 난무합니다. 잘못된 교리와 신학을 배운 사람들은 이 둘을 하나로 결합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영국 출신의 토저(Aiden Wilson Tozer, 1897~1963) 목사는 생전에 세상과 교회의 연합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했습니다. 그분은 세상과 연합한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가련한 잡종’이라고 일갈했습니다. 이런 교회, 이런 성도가 있다면 그는 주께 가증한 것이요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않은 버림받은 돌멩이에 불과할 것입니다.
2. 회색지대
그런데 문제는 교회와 세상의 중간지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이 지대에 살고 있습니다. 다시 토저 목사의 견해를 소개하면 그분은 이 지대를 회색지대라 불렀습니다. 한 마디로 이 지대는 매우 위험한 곳입니다. 그럼에도 대다수 그리스도인이 위험을 직감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마음속에 새기고 그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지금은 기독교가 세상과 너무나 뒤엉켜 버렸기 때문에 분간이 잘 안 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문제 투성이임에도 그리스도인들은 문제가 없다는 인식을 하고 삽니다.
이들은 교회와 세상을 왔다 갔다 하면서 둘 다를 손에 쥐고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구원을 위해 교회도 필요하지만 부귀영화를 위해 세상이 제공하는 모든 문명의 이기들과 편리들을 소유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오히려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꿈과 소망과 목표들을 세상에 두고 살고 있습니다.
또 이들은 무엇이든 적당히 하려 합니다. 지나치게 교회에 충성하는 것을 회피합니다. 그런 일을 하면 자칫 교회에 말려 들어가 손해를 볼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은 자신에게 끼치는 손해를 피해 어떻게 하든지 유익을 얻으려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거의 회색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기독교회이면서 기독교의 법과 교리와 교훈의 도를 지키지 않습니다. 장로교회이면서 장로교회의 헌법을 무시하고 교회를 운영합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는 기독교의 교회입니까, 세상을 닮은 교회라는 기업입니까?
또 주님은 모든 우리의 행위를 아시므로 우리가 언제나 주님이 정하신 선을 넘을 것을 미리 아시고 우리에게 신앙의 모범들을 제정해 주셨습니다. 기도의 남용과 오용과 남발을 막기 위해 우리에게 주기도문이라는 기도의 모범을 제시하셨습니다. 우리의 올바른 신앙고백을 위해 사도들로 하여금 사도신경을 만들어 주시었습니다. 이외 모든 신앙의 지침으로 교리들을 제정해 주시었고 시대마다 필요한 신앙고백서들을 만들어 표로 삼으셨습니다. 나아가 정치의 규례와 예배의 모범과 권징의 조례들을 주시어 믿음의 사람들이 어느 시대 어느 국가 지역을 막론하고 동일한 규정과 지침에 따라 신앙하도록 절대 불변의 기준과 법령들을 제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의 교회는 이 율령과 법도와 모범들을 버리고 각자 좋을 대로 신앙하고 각자에게 맞는 법을 만들어 운영하며 서로 다른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자기가 부르는 주님이 성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도 점검하지 못한 채 그저 좋을 대로 믿고 따르고 행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계속)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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