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이후 자연에 대한 관점의 전환을 요구하는 세태 때문인지 동서 철학계에서 자연주의 철학에 대한 열풍이 다시금 거세지고 있는 가운데 과거 유신론적 관점에서 자연주의 철학의 특징들과 그 한계를 짚어낸 감신대 장왕식 교수(종교철학)의 소논문 「오늘의 자연주의와 유신론」도 다시금 회자되고 있다.
「신학과 세계」 88호에 게재된 해당 논문에서 장 교수는 자연주의 철학의 추세를 소개하고 그것과 화이트헤드의 유신론을 비교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먼저 자연주의의 일반적 현황에 대해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동아시아에서는 자연주의의 원조로 도교를 꼽는다. 노자의 저작으로 알려진 도덕경 25장은 자연주의에 대해 "인간은 땅을 따라 작동하고 땅은 하늘을 따라 작동하고 하늘은 도(원리)를 따라 작동하고 도(원리)는 자연을 따라 작동한다"고 밝혔다.
장 교순는 "여기서 자연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우주 만물이 작동하는 근원적 원리, 혹은 궁극적 실재가 된다는 뜻이다. 이런 원리에 따라 사람들은 노자의 사상을 무위자연설이라 일컬어 왔거니와 이 말처럼 자연주의 핵심 사상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말도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장자는 노자의 무위자연설을 계승 발전시킨 인물로 꼽힌다. 장자에 대해 장 교수는 "그는 자연세계와의 친근한 관계를 회복하는 자연주의적 삶의 학문을 강조하면서 "소유요"를 주장했다"며 "소유요의 영어 번역은 "going rambling without destination"이다. "목적 없이 어슬렁 거리며 산책하기"가 될 것이다. 최상의 인간적 삶은 자연으로 회귀하는 것이며 그 핵심은 인간의 본능과 본성에 따라 목적 없이 자유롭게 사는 삶이다"라고 했다.
동아시아 신관에 대한 기술도 빠트리지 않았다. 장 교수에 따르면 동아시아 신관의 특징은 언제나 자연과 연계된 상태에서 기술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가장 근접한 인격적 유신론을 발전시킨 유교에서도 하늘을 신으로 보았지만 대부분의 동아시아 학자들은 신이 자연의 연장이지 그것에 철저하게 이원론적으로 구분되는 존재는 아니라고 보았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동아시아에서는 초월자가 항상 자연과의 관련 하에서만 정의되었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이어 서구에서 발달한 자연주의 철학의 추세도 살폈다. 먼저 들뢰즈에 대해 "들뢰즈의 분석에 따르면 실체가 양태로서 표현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철학자들이 강조해 온 스피노자 실체론의 요체다"라며 "말하자면 신은 자연의 사물들을 통해 표현된다는 것이고 이것이 이른 바 범신론이라 불리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실체에게서 양태가 나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양태가 실체를 표현하는 한도 내에서 실체가 존재한다고 본다면 이는 결국 실체는 양태에 의존한다는 뜻이다"라며 "존재론과 관련해 신의 독점이 깨졌다고 볼 수 있다. 참으로 스피노자가 말하려는 의도는 "양태 없이 실체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입장을 두고 들뢰즈는 스피노자가 래디컬한 자연주의자로서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이뤘다고 보았다.
"실체는 양태들을 통해, 오로지 양태들을 통해서만 자신을 언명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 조건은 보다 일반적이고 단호한 전복을 대가로 해서만 충족될 수 있다. 그런 전복 이후 존재는 생성을 통해, 동일성을 차이나는 것을 통해, 일자는 다자를 통해 자신을 언명할 것이다...이런 것들이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의 내용이다"(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서울: 민음사), 112)
장 교수는 "들뢰즈에 따르면 모든 사물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초월론적인 설명을 피할 수 없다"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설명이 "초월적"인 것에서 비롯될 필요는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내재성이 생산한 것들 뿐이며 내재성의 산물이 아닌 것은 없다. 그렇기에 초월적인 것에서 설명되는 모든 설명은 근거를 잃는다"고 했다.
이어 장 교수는 자연주의와 연관해 들뢰즈가 철저한 내재성의 철학을 말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무엇보다 들뢰즈의 자연주의 철학이 코페르니쿠스적 사유로서 혁명적인 이유를 아래와 같이 밝혔다.
"전통적으로 존재는 신이 먼저 독특하게 존재한 이후 나머지 사물들은 단지 그에게서 창조되거나 유출되면서 존재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존재의 일의성으로 보면 다르다. 존재의 일의성에서 존재를 말할 때엔 신에게 그런 특권이 부여될 수 없다. 신이 존재한 이후라는 말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신이 전제되어서는 안 된다. 신은 다른 사물들과 동일하게 전제되거나 설명되어야 한다. 그런 한도 내에서 그의 존재는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존재의 일의성(The Univocity of Being)이다."
들뢰즈의 사유를 파격적이고 혁명적이라고 주장한 장 교수는 "단지 신이 독점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존재의 능력과 힘이 상대화된 것 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라며 "신이 다른 존재들과 동등한 의미의 존재를 가진다는 의미는 신의 존재가 다른 존재 없이 불가능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일의성의 의미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존재를 말하는 것에 있어서 의미가 하나라는 것의 의미는 물론 철학적으로 복잡한 내용을 지니지만 신학적으로는 간단하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 다른 존재에 의존되어 있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신의 존재(존재함의 행위)는 생성(생성되는 과정)을 통해 신의 동일성(실체)은 차이나는 것들(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신이라는 일자(절대성)는 다자(상대성)을 통해서만 의미를 획득한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라며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물들의 존재는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그것이 신이든 미자립이든 존재의 의미에서 각각 동등한 목소리 지분을 지니기에 그런 세상에서는 위계질서가 필요 없고 각각의 존재자 모두가 독특성 혹은 특이성을 지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이상에서 장 교수가 살펴본 자연주의 철학의 요체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스스로가 우주와 사물의 궁극적인 원리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신 즉 자연이기에 신과 모든 자연의 구성원으로서의 사물들은 같은 존재의 의미에서 같은 뜻으로 언명이 된다는 존재의 일의성을 말하고 △궁극자로서의 자연이 모든 사물의 발생적 근거가 되기에 모든 철학적 분석과 설명은 그곳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내재성의 철학을 내세우며 이 모든 것을 초월론적 경험주의로 아우른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이러한 자연주의 철학과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어떻게 비교가 되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이른 바, 범재신론(panentheism)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장 교수는 "화이트헤드 식의 자연주의를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유기체 철학에서다"라며 "그의 자연주의로서의 유기체 철학은 그의 저서 『사고의 양태』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그는 특히 "살아있는 자연"(Nature Alive)"이라는 제목 하의 8장에서 자연과 생명을 이분화시킨 과거의 철학사에 대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 비판하고 있다"고 전했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물질은 에너지며 힘이다. 게다가 그것들은 목적인(final causation)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기 창조적이다. 장 교수는 "화이트헤드는 자연 안에 여러 유형의 존재와 사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먼저 인정한다"며 "그러나 그 사건들은 한 결 같이 목적인을 지니고 있는 자기 창조적인 존재들인데 이런 사실은 미립자들부터 고도의 정신을 갖는 인간에게까지 공통적이다. 그의 철학이 유기체의 철학이라고 명명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라고 했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자연주의 철학이 말하는 존재의 일의성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할까? 장 교수는 화이트헤드가 사용한 창조성의 범주를 소환하며 "과거의 실체 개념에서 차별되는 점이 있다믄 그것은 존재들의 밑바닥에 흐르는 보편적인 능력, 힘으로서 보편자 중의 보편자다"라며 "하지만 보편자 중의 보편자가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능력이며 힘이며 행위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자연이 보여주는 생성적 과정이 보여주는 창조의 힘과 능력 그리고 그 행위 자체를 일반화한 개념이라 볼 수 있으며 전형적인 내재성의 철학이다"라고 했다.
신에 관한 언명에서도 들뢰즈의 자연주의 철학과 화이트헤드 철학의 유사성이 발견된다는 게 장 교수의 설명이다. 그에 따르면 들뢰즈 식의 자연주의에서 일의성 존재론의 학설이 중요했던 이유는 그것이 신과 관련되어 있는 언명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들뢰즈의 철학에서는 신이 자연과 등치되는 것은 물론 자연과 사물이 나타내는 양태를 통해서 신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장 교수는 들뢰즈식 자연주의 철학과 화이트헤드 철학의 유사성을 다음과 같은 화이트헤드의 언명을 통해서도 드러냈다.
"신은 하나의 현실적 존재이며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텅빈 공간에서의 지극히 하찮은 한 가닥의 현존도 현실적 존재이다...모든 현실적 존재들은 동일한 지평에 있는 것이다"(화이트헤드, 『과정과실재』(서울: 민음사), 73)
마지막으로 장 교수는 유신론적 자연주의 철학이라는 독특한 입장에 서 있는 화이트헤드에 대해 화이트헤드의 유신론이 어떤 근거로 등장하는지 또 그것은 철학적 적합성을 갖는지를 살펴봤다.
장 교수는 "화이트헤드 철학은 인간이 스스로 물리적인 예속이나 악습이나 관례의 답습에서 벗어나서 새로움을 창조하고 차이를 만들 수 있는 기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목적인 작용의 또 다른 표현인 주체적 지향의 이론이다"라며 "주체적 지향이란 임의의 현실적 존재가 과거로부터 오는 여러 여건들을 파악할 때 자신의 고유 방식을 따라 종합해 낼 수 있다는 이론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화에트헤드에 따르면 인간의 주체적 지향이 이미 결정된 것을 피하는 반작용을 행사하려 할 때 그것에는 현재의 것을 넘는 이상적인 것이 제시되어야 한다"며 "이상적인 것이 제시되지 않는 한 과거로부터 온 선택지에 순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겠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가 신의 존재를 도입하는 것도 바로 여기에서다. 신은 인간의 주체적 지향에서 초기의 단계를 지배하면서 이상적인 것을 제시하는 것으로 기술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또 들뢰즈식 자연주의 철학의 존재의 일의성이 배제하는 이원론에 대해 화이트헤드는 비판적 수용의 입장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부각시켰다. 장 교수는 "화이트헤드는 모든 이원론을 무조건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가 거부하는 이운론은 조악한 이원론(vicious dualism)이다"라며 "즉 화이트헤드는 플라톤의 물질/형상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이나 데카르트의 주/객 이원론 혹은 심/신 이원론을 조악한 것으로 보면서 거부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화이트헤드는 모든 종류의 이원론이 부정적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확히 말해서 화이트헤드는 자연 내에 두 개의 차원이 있음을 솔직히 인정한다"며 "그렇게 서로 구분되는 두 가지 차원을 동시에 강조하지 않을 경우 오히려 철학은 인식론적으로 혼란에 빠질 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면에서도 많은 문제를 불러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유기적 이원론으로 불리는 화이트헤드 철학의 경구는 『과정과 실재』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된 바 있다.
"신이 영원하다는 것과 세계가 유동적이라는 것만큼, 세계가 영원하다는 것과 신이 유동적이라는 말도 참이다. 신이 하나이고 세계가 다자이라는 말처럼 세계가 일자이고 신이 다자라는 말도 참이다. 세계가 신 안에 내재한다는 말처럼 신이 세계 안에 내재한다는 말도 참이다."(『과정과 실재』, 348)
"경험만으로는 안 된다. 그것이 유아론적인 경험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에는 성공이나 실패가 있을 수 없다. 그저 경험만이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비교하기 위한 아무런 기준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명백히 자신과 외적인 기준을 관계시켜야 우주에서 이상을 발견하게 된다."(화이트헤드, 『사고의 양태』, 124)
끝으로 장 교수는 "하나의 자연주의 철학은 반드시 유물론적인 길을 택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유신론적인 길을 택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길을 택하는 것이 더욱 온전하게 세계와 우주 그리고 인간에 대해 합리적이고 정합적인 해석을 가할 수도 있다"며 "따라서 많은 세속의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결코 어떤 철학적 입장이든지 그것이 유신론적 입장을 택한다고 해서 비합리성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신론적으로 해석된 자연주의는 보다 온전한 형태의 철학이 될 수도 있는 것이며 화이트헤드가 바로 그것을 보여줬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