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약하고 죄 많은 인간에게 최고의 영양제가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성경은 그것을 먹고 섭취하는 자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고, 매일매일 성장하고 열매 맺게 하는 생명의 양식이다. 이토록 소중한 성경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사랑 받고 있는지는 늘 의문시 되고 있다. 성경이 ‘지상 최대의 보고’이며 ‘인류 최고의 베스트 & 스테디셀러’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2] 도서관이나 호텔이나 군대나, 심지어 화장실에 조차도 성경이 비치가 되어 있을 정도로 성경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출판되고 팔리는 책으로 유명하다. 성경은 또한 ‘도둑맞는 책’으로도 세계 톱이라 한다. 뉴욕타임스가 ‘도서관에서 손 타는 책’ 베스트10을 조사한 결과가 그러하다. 비누, 가정상비약 같은 호신용 필수품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라나.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다른 베스트셀러들과는 달리 제일 ‘따분하고’(boring) 가장 ‘안 읽히는’(least read) 책이란 불명예도 동시에 갖고 있다. 가장 많이 팔림에도 불구하고 가장 읽히지 않는다는 것만큼이나 아이러니가 없다.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과연 그 이유가 뭘까? 한 가지 이유를 밝히자면, 성경이 성스럽고 신비로운 책이어서 훔쳐서라도 가까이 두고 싶긴 하지만,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까닭에 읽으려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4] 물론 수천 년이나 지난 현대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책이라는 생각도 꽤 많다.
하지만 불신자들이라면 모를까 하나님을 믿는 신자라면 누구나가 다 성경을 사랑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성도들에게도 성경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기는 매 한 가지인 것 같다. 이토록 이해가 쉽지 않은 성경을 가능하면 더 많이 가까이 하면서 그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양만점의 영적 비타민을 제공받도록 해야 함이 필요하다.
[5] 성경이 아니라면 우리가 어디서 소중한 영의 양식을 섭취할 수 있겠는가?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기 위해서 우선 알아야 할 급선무는 성경이 처음 기록될 때 어떤 방식으로 씌어졌나 하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저자들은 장이나 절이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통으로 쭉 연결된 두루마리 상태로 내용을 기록했다. 창세기면 창세기 1장 1절부터 50장 마지막 절까지 문맥으로 연결된 한 달음으로 썼단 말이다.
[6] 그러다 보니 편의상 장과 절로 구분할 필요가 생겼다. 한 장을 읽고서도 저자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거늘 그렇게 많은 내용을 단락이나 구절의 구분 없이 읽어서 본문의 뜻을 파악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1228년 캔터베리의 대주교 스티븐 랭턴(Stephen Langton)이 마련한 것이 장절의 구분이었다. 그때 비로소 성경의 장이 처음으로 나뉘어졌고, 16세기에 들어서야 절도 처음 구분되었다.
[7] 이렇게 해서 성경이 장과 절로 구분된 상태로 출간되어 모두가 짧게 나누어진 성경을 이해함에 큰 도움을 받게 된 것은 우리 모두에게 획기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창세기면 창세기, 요한복음이면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 쭈욱 흘러가는 하나의 거대한 물줄기(main stream)를 놓치는 치명적인 문제가 야기됨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은 원래 장도 절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큰 흐름으로 연결된 책이기 때문이다.
[8] 성경을 통으로 본문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읽지 않으면 성경을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 공히 저자가 원래 의도한 큰 의미와 메시지를 놓칠 수밖에 없다. 그것도 문제지만 현대인들은 큐티를 즐겨 하다 보니 한 장도 아닌, 자기 입맛에 맞는 몇 구절만을 본문으로 택해서 묵상하고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성경 전체의 문맥을 간과한 묵상과 적용에는 ‘교훈 도출’이라는 열매 외엔 따먹을 것이 없다.
[9] 성경 속엔 우리에게 주는 소중한 교훈(lesson)들이 즐비하다. 그 하나하나가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고 구체적인 변화로 이끄는 보배들이다. 하지만 성경 속엔 그런 작은 보물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꿰뚫고 흘러가는 진리(truth)의 큰 물줄기가 있다. 산에 올라 정작 중요한 산삼은 놓친 채 덜 소중한 도라지 몇 뿌리만 캐내서 먹는다면 어찌 되겠는가?
[10] 따라서 짧게 정한 본문으로 매일 큐티를 하는 것도 막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성경 전체의 문맥을 통해 도도히 흐르는 큰 물줄기를 파악함에 더 신경 써야 함을 강조한다. 성경을 이해함에 주석보다 더 많이 찾는 도구는 없을 것이다. 평신도들 가운데서도 성경에 깊은 관심이 있는 이들은 과거 목회자들의 전유물로 치부되어 온 주석을 사서 읽는 이도 꽤 있다. 주석은 대부분 목회자들이 설교할 때 참조하는 유일한 수단이라 할 수 있다.
[11] 그런데 주석은 역사적 배경이나 짧은 한 단어와 한 구절을 원어로 이해함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성경 전체의 문맥을 파악하는 데는 오히려 해를 끼치는 면이 많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주석은 역사적 배경 설명을 비롯해서 한 단어, 한 구절도 빼놓지 않고 설명하는 책이다. 따라서 성경 전체의 흐름을 계속 알려주고 주입시킴에는 한계가 있는 책이기도 하다. 아무리 서론에서 전체의 흐름을 짧게 설명해놓는다 해도 매 장, 매 절, 매 단어를 살피다보면 문맥을 놓칠 수밖에 없다.
[12] 성경과 설교학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요즘 한국 강단에서 주목할 만한 설교자가 누가 있는지 소개해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는다. 내가 한국 모든 설교자들의 설교를 다 듣고 있는 사람이 아니기에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곤란하긴 하지만, 아직까진 드러내어 자랑할 만한 설교자가 보이질 않는다는 게 솔직한 나의 대답이다.
[13] 한국교회 설교자들의 설교를 굳이 분석해보자면 둘로 나눌 수 있다. 우선은 설교의 내용은 별로 좋지 않으나 전달이 탁월한 분들이다. 이런 분들이 목회하는 교회가 대형교회인 경우가 많다. 그만큼 설교와 교회 성장에 있어서 전달이 중요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다음으로 전달은 약하나 본문에 아주 충실한 분들이 소수가 있음을 안다. 하지만 전달의 부족 때문에 교회의 사이즈가 그리 크지 못한 아쉬움이 늘 있다.
[14] 그런가 하면 기존의 해석을 뒤엎는 새로운 해석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소수의 설교자들이 있다. 문제는 이들의 성경해석에 엉터리 내용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분노를 자아나게 만들 정도로 본문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있음에도 유명세를 타고 기독교 방송에서 성경강의나 설교로 인기를 얻고 있는 설교자들을 볼 때마다 뭔가 제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들이 전하는 내용에 소중한 영혼들이 악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15] 한국 강단의 문제 중 가장 심각한 현상은 설교자들 중 성경 실력을 제대로 갖춘 설교자가 드물다는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신학교의 문제요 교수들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신학교에서 잘 가르쳤어야 한단 말이다. 물론 목회자 자신들의 입장에선 신학교나 교수들 핑계를 대선 안 된다. 그만큼 성경의 실력을 키움에는 본인의 노력과 의지와 열정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 과거의 경험으로 볼 때도 개인적 땀과 수고와 열의는 아주 절실하다고 본다.
[16] M.Div 과정 뿐 아니라 Th.M과 Ph.D 과정에서 성경을 배운 일도 무시할 수 없지만, 스스로 성경을 읽고 도전하고 씨름하고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면서 터득한 것이 몇 십 배나 더 소중했음을 고백할 수 있다. 물론 어릴 때부터 성경 전체를 다독한 것은 문맥을 놓치지 않고 원포인트로 흘러가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진리에 눈을 뜨게 해준 최고의 투자였던 것 같다.
[17] 최고의 설교는 영양만점의 영의 양식을 가장 맛있게 요리하여 먹이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성경 저자의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되 오늘의 청중들이 가장 이해하고 감동받기 쉬운 형태로 잘 전달하고 적용하는 설교가 최고의 설교가 아니겠나? 본문도 무시하지 않고 청중에의 전달도 신경 써서 청중들에게 최고의 식단으로 어필하는 설교자가 많아지길 고대한다.
[18] 설교자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말씀만큼은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겠다라는 거룩한 욕심을 가지고 본문이 말씀하는 의도를 제대로 잘 이해하고 파악하는 실력을 키워 삶의 구체적인 순종과 열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한다.
신성욱 교수(아신대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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