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4주년 종교개혁주간을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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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효상 원장

코로나 상황에도 종교개혁의 달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일부 목회자나 평신도들 사이에서 “종교개혁은 물 건너 간 것 아니냐?”라고 우려하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정말 ’개혁‘은 물 건너 간 것일까. 사실 이렇게 교회가 무기력과 현실안주에 빠지면 답이 없다.

‘종교개혁의 달’은 개혁교회의 역사를 되새기며, 어제를 잇는 오늘에 책임감을 가지고 내일을 만들어 가는 의지를 다지는 또 하나의 장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은 그 시대를 새롭게 하는 불씨이자, 불꽃이었다. 부패하고 타락된 교회만이 아니라 사회풍조에 성냥으로 불을 확 그은 것이다.

‘종교개혁’은 ‘종교개혁’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교회개혁‘이다. 콘스탄틴황제의 교회공인 이후 교회는 내부적으로 상당히 오랜기간 부패와 매너리즘에 빠지며 부패현상이 나타났다. 성직매매와 수도원(수녀원)의 타락, 교회의 세속권력 추구, 교회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행위들로 ‘교회다움’을 잃어갔다. 그래서 중세를 ‘암흑기’라 함은 교회의 안정을 원하는 일부 성직자들이 왕권과 결탁하며 세속적으로 타락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회 내의 부패를 개혁하려 1074년 첫 걸음을 내디딘 그리고리 7세는 교회를 정화하기 위해서는 왕권으로부터 독립하여야만 하며 교회는 교회 스스로 교회됨으로서 그 자체가 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074년, 교회의 개혁과 성직자의 자정을 위한 도덕적 개혁의 나팔을 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교회는 오랜 세월 교회의 교회다움을 잃으며 권위가 추락하고 힘을 잃어 갔다. 특히 루터 이전의 경건한 수도원의 영성, 광야의 영성을 추구하는 운동이 무너지는 상황속에서도, 교회개혁의 열망은 교회를 사랑하는 경건한 신앙인들에게 퍼져나갔다. 죤 위클리프와 얀후스 사보나롤라, 발도파 등 매 시대마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개혁운동의 시도가 있었다. 권위와 부패로 물든 시대에 개혁자에게 뭔가 해야 할 일을 주셨다. 그것이 개혁자들에겐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었다. 그 사명앞에 개혁가들은 개개인의 신앙을 넘어 공동체 전체가 개혁하기를 원했다. 개혁을 추진하면서 자신을 노출하면서 스스로를 뜯어 고쳤다. 그러기에 취리히, 독일, 프랑스, 영국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504년전 개혁가들의 그 정신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개혁정신은 그리 어렵지 않다. 발도파의 경우 비대해진 교회의 사치와 부 축적으로 대중에게 비판받던 부자교회, 귀족교회에 경종과 개혁의 메시지를 던졌고, 루터는 면죄부 판매를 타락의 증표로 보고 신앙을 상품으로 전락시켜 버린 것임을, 츠빙글리도 루터처럼 면죄부와 교회의 세속적 부패를 비판하며 ‘교회다움’이 성경에 기초를 두어야 함을 강조했다.

이렇게 시작한 ‘개혁교회’의 출발이인 ‘개혁정신’은 실종되고, ‘개혁’을 거부하는 교회라면 ‘개혁교회‘라는 간판을 내려야 한다. 개혁신앙을 계승한 개혁주의의 길을 가기보다는 오히려 개혁교회 이전으로 퇴행하려는 이상한 시도와 어리석음을 범하곤 한다. 일련의 이런 행태들은 ‘사명’의 문제가 아니라 ‘자리’의 문제이고, ‘밥그릇지키기‘에 지나지 않는다. ‘개혁’을 거부하고 카톨릭쪽으로 가면 ‘교황’이 되려는 것이고, 이단이나 사이비쪽로 가면 ‘교주’가 되는 길 뿐이다.

오늘 한국 개신교의 현주소는 분명 ‘개혁교회’다. 그래서 조국교회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에게 ‘이대로는 안된다’는 안타까움이 높다. 어디 그뿐인가.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되고, 빛과 소금임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음도 다들 알고 있다. 현실은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교회를 지극히 사적인 것으로 만들고, 회개를 이야기 하면서도 재를 무릎쓰고 통곡하는 이가 너무 적기 때문에 오늘 교회는 ‘영적쇠락’을 맞고 있다. 문제는 사회의 도덕적 해이보다 교회의 ‘영적해이’, ‘영적쇠락’이다. 교회의 영적부흥도, 사회의 도덕적 변화도 우리 손에 있음에도 나와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팀이 되지 못함을 가슴치며 안타까워해야 한다.

개혁자들의 정신처럼 ‘교회개혁’은 개혁자들의 정신에 나타난 것처럼 교회가 잃어버린 본질로 돌아가는 길은 없는 것일까.

오늘 한국교회는 개혁이 끝난 교회가 아니다. 역사속에서 끊임없이 변화와 개혁을 계속해야 한다. 그런데 이 ‘개혁정신’에 관심이 없으니 이를 이끌 영적 운동도, 영적 지도자를 찾기가 어렵다. 어쩌다 개혁을 이야기하는 이들도 ‘자기 의’에 기초를 두고 ‘자기수준’에서 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개혁의 메시지만 난무하지 진정 ‘교회를 교회답게’하려는 헌신적 개혁가들은 손꼽기에도 부족하다. 이 시대에 종교개혁자들의 정신과 신앙을 계승하는 믿음의 사람들, 프로테스탄트가 다시 일어나야 한다. 종교개혁정신을 지닌 개혁신앙인, 개혁교회가 일어나 이 불씨를 되살려야 한다. 개인의 안일을 위해 교권에 안주하고 개혁정신을 거부하는 흐름에는 과감히 맞서야 하지 않을까.

오늘 개혁교회가 길을 잃지는 않았는가? 방향을 잃은 나침반처럼 오늘 우리가 저지르는 오류, 잘못은 없는가?

새로운 인물을 키우지 못한 잘못, 교회의 사유화에 침묵한 잘못, 자신의 이익을 챙기느라 한국교회 전체를 돌보지 않은 잘못, 하나되어 제대로 싸우지도 대응도 대안제시도 못한 잘못, 말씀과 상관없이 삶으로 신뢰도를 떨어뜨린 잘못, 반성하고 회개하지 않으므로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잘못, 다음세대에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잘못 등은 참으로 부끄럽다.

교회는 사회에 영향력을 잃어가고, 병든 시대를 고치고 바로 잡을 수 있는 감화력도 떨어지고 있는 것 아닐까. 영혼이 가난하지 못하면 순수 할 수 없고 현실에 눈을 뜨면 물욕의 유혹을 뿌리 칠 수 없다. 마음이 맑은 사람들이 살아가기 힘든다는 소리들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세상이 부패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천민자본주의에 물든 교회, 다음세대가 떠나가는 교회, 돈으로 줄 세우는 교회, 돈으로 직분 주는 교회, 돈 아니면 무시당하는 교회, 교회에 자본주의가 들어와 어지러운 교회를 만들고 있다. 교인들이 교회안에서 신앙생활을 영위하기가 참 힘들다. 수많은 연민과 갈등 가운데 내린 결론은 내가 속한 작은 공동체부터 교회다운 교회로 만들어 보자. 거룩을 잃어버린 이 땅의 교회, 시대의 우상들을 태어버릴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길 소망한다.

종교개혁주간을 앞두고 한국교회와 크리스천들은 내가, 무엇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

먼저는 그릇된 교리와 내부의 부패가 극심했던 중세교회의 개혁과제가 진리를 회복하고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이었다면, 오늘의 우리 교회도 세상에 바른 교회의 모습이 전파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는 일이다. 그것은 ‘말씀과 기도’일 수도 있고, ‘예수그리스도를 닮은 삶’일 수 있다.

이제 한국교회가 하나님 나라와 공의를 이루기 위해 ‘개혁정신’으로 시대를 읽고 나가자. 이제는 과거식 패거리 의식으로 버틸 시대는 지났다. ‘교회다움’이라는 투명성과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개혁정신이 답이자 길이다. 교회 스스로 먼저 바른 판단과 한몸 던져 부패를 막는 결단을 스스로 보이자. 개혁교회라면, ‘나부터 개혁’이라는 날마다 새롭게 변화하려는 눈물로 영적 지도력, 영적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

예수님이 성전을 청결케 하신 것처럼 지금 한국교회는 개혁정신 회복으로 교회의 본질을 보여주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종교개혁주간을 앞두고 개혁자들의 정신이 과거형이 아닌 현재 진행형으로 ‘나로부터’, ‘우리 스스로부터’ 개혁하는 운동으로 확산되기는 포럼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효상 원장(근대문화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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