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대통령 한국의 이승만 그리고 그의 신앙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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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기 박사

11. 이승만 대통령의 경제 정책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면 농지법을 개선해야 한다. 당시 농지의 30%이상이 지주의 것이기에 소작인들은 1년을 경작하면 그 소출의 50-70%를 지주에게 보내야 한다. 그러니 일년 내내 고생해도 먹을 것이 없었다. 리승만은 1949년 12월 토지개혁으로 농지 수용을 발표하고 농토는 농사짓는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하며 농지를 나라에서 수용하고 정부가 땅 값을 지주들에게 주었다. 그 돈을 지주에게 다 줄 수없자 “지가증권”을 발행하여 이자까지 갚아주었다. 이 때 한민당의 당수였던 김성수가 당원 대부분이 지주였는데 그들을 설득하여 정부의 농지 수용 정책에 합의하였다. 리승만은 급진적 사회주의자인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으로 기용해 농지 개혁법을 밀어붙였다. 300%으로 올라온 농지 개혁법을 150%로 하고 소작농들은 5년에 걸처 소출의 30%를 나라에 갚으면 자기 것으로 등기가 됨으로 농민들은 환영했다.

1950년 3월 “농지 분배 예정 통지서”를 각 받게 되어 이제는 자신들의 땅으로 등기가 된 것이다. 해방전에는 75%가 소작 농이었지만 1950년에는 92.4%가 자작농으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천년 넘게 내려온 양반과 상놈, 지주와 소작농, 봉건적 신분제도가 무너지고 역사상 최초로 평등의 시대가 온 것이다. 6.25 당시 토지 개혁이 되지 않았다면 폭동으로 공산주의 나라가 됬을 것이다. (북한에도 먼저 토지개혁을 했는데 그들은 나라가 수용하고 농민에게 무상분배하고 소작을 주어 소출의 70%을 공출해 가니 일들을 안해 더 어려워졌다. 결국 소출이 작아지니 토지를 모두 몰수하고 집단농장으로 바꾸었다. 농민은 국가의 노예가 되었다.

한국동란에 파괴된 산업 건물은 60%가 넘고 파괴된 학교 32%, 가옥이 30%였다. 말할 수 없이 비참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 리 대통령은 생명을 건다. 유엔의 대표단이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연구하였는데 (1953년 네이든 보고서) 그들은 농업이 살길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여기에 리승만은 화가나서 5000년을 농사지어왔는데 굶주림을 면치못하고 살았는데 농업이라니 하며 연구가들의 말을 안듣고 산업에 눈을 돌린다 그는 인천에 제철소를 만들고 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한다. 태백산으로 가는 영암선 철도로 석탄을 운반하여 대체연료를 개발하여 산에 나무가 살도록 했다. 학교와 공장 건설, 현대화를 위한 시작에 초석을 놓은 것이다. 한미 방위조약으로 북한의 남침을 막아 주어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미국의 잉여농산물 수입으로 밀가루등이 수입되어 국민의 가난과 죽음을 겨우 면하게 되었다.

리승만은 감옥에서 쓴 독립정신을 그대로 실천했다. 나라의 부강은 농업이 아니라 산업과 상업이라고 주장했다. 큰배, 넓은 도로 물건을 빨리 나르고 무역이다. 나라 구제는 전국민이 교육으로 이루어진다. 시대에 따라 법률도 변해야 한다 소련의 남하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리승만은 정부의 실천 육대 강령을 발표하였다.
가) 세계에 개방 통상.
나) 새로운 문물 통상.
다) 외교가 나라를 유지한다.
라) 나라의 주권을 존중히 여겨야 한다.
바) 도덕적 삶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사) 자유를 존중히 여겨야 한다.

리승만은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현대사의 주역이다. 오랜 군주 전제 정치의 막을 내리고 새롭게 역사를 시작한 민주 공화 정치의 나라 대한 민국을 만들어 그 첫 대통령이 된 인물이다. 또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등(모택동)과 합작하여 일으킨 남침전쟁에서 유엔군 참전을 이끌어내어 기적적으로 나라를 지켜낸 인물이다 이처럼 독립운동, 건국, 북한의 남침저지,한반도 평화유지 등 네가지 면에서 가장 큰 역활을 수행했다. 물론 막중한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 누구나 빛과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어서 그를 적대하는 반대자가 생기는게 당연하다. 당시 남북간에 체제 대결로 인해 정통성 시비도 끊이질 안았다.그러나 언젠가는 대한 민국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초대 대통령으로 대접받는 날이 올 것이다.

1954년 8월2일 뉴욕에서 영웅환영식을 갖는다.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시작하여 뉴욕 시청까지 100만 인파의 환영을 받으며 퍼레이드를 갖였다. 그를 전쟁 광이라고 하는 말에 대해서 연설을 마치고 비공식 석상에서 우리나라 군대가 강하다고 하나 우리나라 만으로는 휴발류를 3일 밖에 사용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하나님과 미국의 위대한 어머니들이 있었고 그들의 아들들을 잃으면서도 우리를 도와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고 하고 그런 뜨거운 기도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이길 수 없었다고 해서 우뢰와 같은 갈채를 받았다.

송병기 박사(전 뉴욕장로회신학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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