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2일 식품의약품안전처(이하 식약처) 주관으로 인공임신중절약의 허가를 심의하는 중앙약사심의위원회가 열렸다. 기존 낙태죄가 2019년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고 2020년 12월 31일로 법적 효력을 상실하자, 한 제약사가 해외에서 사용 중인 낙태약의 독점 공급계약을 맺고 식약처에 허가신청을 했다. 비록 기존 낙태죄가 효력은 잃었다지만 그렇다고 낙태가 합법이 된 것은 아니다. 아직 국회에서 새로운 개정 법안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다. 낙태죄를 지속시킬지의 여부와 낙태의 허용범위, 태아 생명에 대한 법률적 지위를 확정하지 못했다. 법의 공백 상태에서 식약처가 낙태약을 허가하려는 성급한 절차를 밞았다. 참고인으로 참석한 산부인과 의사들은 위험한 합병증을 동반하는 약물 사용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였고, 법조인들은 입법이 안된 상태에서 낙태가 진행될 때 야기될 법적 혼란을 지적했다. 생명 운동 단체들은 생명경시를 불러올 낙태 약물의 허가를 원천 반대하였다. 반면 일부 인권단체들은 해외에서 이미 유효성이 확인되었으니 속히 승인할 것을 촉구했다. 수입한 약이 국내에서도 안전한지를 시험하는 가교임상도 면제할 것을 주장했다. 다음날 언론에서는 ‘가교임상 면제로 빠른 시간 내에 허가가 기대된다’는 내용만 다루었다. 기자들은 물론 식약처도 태아 생명에 대해서는 함구하기로 한 것만 같다. 대한민국에서 이미 낙태가 합법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일부 단체들의 주장처럼 낙태약이 안전하고 여성의 권리를 지켜준다는 것은 허상이다. 작년 국내 개봉한 영화 <언플랜드(Unplanned)>에서는 낙태약을 실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은 낙태 클리닉 직원으로부터 알약 하나를 받아 삼키며 손쉽게 낙태를 시작한다. 다음날 급작스런 복통에 잠이 깬 주인공은 토하다가 변기에 앉아 피를 쏟기를 반복한다. 그녀는 밀려오는 고통 속에 샤워기 물줄기를 타고 다리 사이로 흐르는 핏물과 함께 핏덩어리 태아가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죽은 태아를 떨리는 손으로 겨우 들어 변기 속에 떨군 후 피범벅이 된 흰 욕실 바닥에 태아의 모양으로 웅크린 채 쓰러진다. 남자에 대한 배신, 배려받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비참함, 내 안의 자녀를 끊어낸 상실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쉽게 삼킨 작은 알약은 여인이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비참한 경험을 하게 했다. 엄마가 될 뻔한 여인의 존엄에 상처를 입혔다. 수술대에 오르든 낙태약을 삼키든 간에 안전하고 손쉬운 낙태는 없다.
● 성급한 낙태약 논의, 무엇이 문제인가?
1. 의학적·제도적 문제
수입 예정인 낙태약은 ⓵ 임신 유지 호르몬인 프로게스테론 작용을 억제하여 유산시키는 약 1알과 ⓶ 자궁을 수축시켜 유산된 태아를 배출하는 약 4알로 이뤄진 콤비팩이다. 미소프로스톨이라 불리는 두 번째 약은 현재 식약처에서 소화기 궤양 치료로만 허가된 약물이다. 강력한 자궁수축을 일으키는 부작용 때문에 임산부에게는 금기로 지정된 약물이다. 자궁파열과 출혈 과다에 따른 자궁 적출술, 자궁 외 임신 시 복강 출혈과 빈혈, 태아 기형 등이 생길 수 있다. 임부가 복용 후 과다출혈과 패혈증으로 사망하여 의료분쟁을 겪은 약물이기도 하다. 비록 낙태를 목적으로 처방되었다 하더라도 임산부에게 심각한 합병증이 발생한 경우, 의사는 금기 약물을 처방하여 불법을 저지른 셈이 된다. 만일 태아가 죽지 않고 살아남았을 경우 신경계통의 기형 발생률이 3배 높게 나타나 또 다른 분쟁을 예고하고 있다. 식약처 스스로가 이러한 이유로 금지한 약을 임산부에게 사용하라고 허가한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식약처의 책임이 너무 크다.
2. 생명윤리적 문제
국민 생명과 건강을 지켜야 식약처의 정책에서 ‘태아의 생명’을 죽이는 약을 허가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낙태약의 허용은 반드시 문화적 쇠퇴를 불러온다. 낙태약이 허용되면 단기적으로는 생명 경시 현상과 인간 존엄의 파괴가 가속화된다. ‘손쉬운 접근’이라는 이유로 태중의 생명이 더욱 많이 죽을 것이고, 임신의 책임을 피할 수 있게 된 남성들로부터 여성의 몸은 쾌락의 도구로 전락할 것이다. 무책임한 남성의 낙태 강요 현상을 막을 수 없어 태아의 생명과 함께 여성의 존엄성도 무너지게 된다. 장기적으로는 청소년들의 성(性)을 왜곡시켜 다음 세대가 건강한 가정을 이루기 어렵게 된다. 성교육 시간에 낙태약 사용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제약사는 미래 고객을 지속적으로 창출하기 위해 낙태 성교육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이다. 낙태약의 안정성과 효용성을 광고하며 안전한 낙태가 공중보건과 인권에 필수적인 것처럼 호도할 것이다. 왜곡된 교육을 받게 되면 사람들은 ‘임신’을 경이로운 축복이 아닌 제거해야 할 병적인 존재로 여기게 된다. 다음 세대의 순결하고 건강한 성을 낙태라는 상처로 얼룩지게 하면 안 된다.
낙태약 허가 심의는 태아의 생명을 직접 위협하는 문제다. 세계적으로 한해 천만 건 이상 처방한다는 인권단체들 주장대로 천만 명 이상의 태아가 죽어가는 심각한 문제다. 식약처의 약물 허가는 낙태죄를 헌법불합치라고 한 헌법재판소의 판결보다 훨씬 큰 책임이 따르는 일이다. 예를 들어 정부가 제시한 낙태죄 개정안에는 16세 이상이면 부모 동의 없이 낙태를 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정부안대로라면 아이들이 부모 없이 홀로 약을 먹고 낙태하는 일을 막을 수 없게 된다.
● 낙태가 산모의 어려움을 치료할 수 있는가?
낙태약을 수입하는 제약회사의 홈페이지는 ‘모두가 건강하고 따뜻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하지만 낙태약을 판매하는 것은 모두가 건강해질 수도, 따뜻해질 수도 없다. 자신이 처한 어려움 때문에 낙태를 결정하지만, <여성의 낙태 경험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에 의하면 낙태는 또 다른 어려움을 초래한다. 낙태 후 겪는 육체적 문제 이외에 심각한 정서적 스트레스를 겪는다. 자신의 일부를 잃은 상실감과 부모-자녀와의 관계를 끊은 죄책감 때문에 많은 괴로움을 느낀다. 낙태 과정에서 아무리 부모와 배우자나 상담자와 친구의 지지가 있어도 정작 낙태 행위는 홀로 감당해야 하기에 소외감이 증폭된다. 생명을 품고 축복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그 정반대의 결정을 하는 것은 정신을 분열시키는 일이다. 낙태 행위가 시작되면 스스로를 인간 이하로 느끼는 경우도 있다. 특히 혼자서 몰래 낙태를 행한 경우는 두려움과 불쾌감을 누구와도 나누지 못하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해야 하기에 주위와 단절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정서적 어려움은 부부가 합의하여 낙태를 한 경우에도 나타난다. 아내는 신체적·정서적으로 공감을 하지 못하는 남편에게 분노를 느낀다. 태아에게 애착이 없는 남편의 방관에 좌절하며 부부간에 정서적 유대가 약해지기가 쉽다. 부부 사이의 관계는 멀어지고 남은 자녀에게 과하게 몰입하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낙태 후 상실감과 공허함을 극복하기 위해 행복을 가장하고 지나치게 바쁜 척 해보아도 가족 내에서 생긴 심리적 외상은 건강하지 못한 가정을 만드는 위험한 요소다.
●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낙태죄가 없어진 시대에 할 일은 무엇보다 낙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원인을 해결하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 첫째는 청소년과 청년을 위한 성(性)윤리교육과 인격교육이 필요하다. 가정과 생명에 대해 책임을 다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안전한 피임법을 가르치는 성교육이 아닌 잉태된 생명의 소중함과 순결의 중요성을 가르쳐야 한다. 둘째는 임신한 아기를 안심하고 출산할 수 있도록 온 사회가 힘을 모아야 한다. 우리는 정부에게 법에 따라 미혼모를 충실하게 지원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해야 한다. 미혼모 시설과 육아시설을 확충하고, 엄마들이 공부하고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장학제도와 교육시스템을 확보해주어야 한다. 미혼모라는 이름이 아닌 여성과 엄마로서의 존엄성을 누리며 살게 해주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은 물론이요 자녀들이 낙태를 경험하기를 원치 않는다. 대부분 젊은이들 역시 자유로운 성관계나 낙태의 권리보다는 안정적이고 따뜻한 가정을 원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주신 본성이다. 지금 우리는 태아 살해가 합법이라고 주장하는 악한 시대를 살고 있다. 성도들은 죄악의 물결 앞에 심지를 굳게 하여 하나님의 생명의 법을 선포하며 살아야 한다. 낙태약의 출시를 앞두고 성도들은 더욱 큰 소리로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세상에 들려주어야 한다. 우리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 풍성히 얻게 하시는 예수님을 전하며 낙태를 반대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를 모태에서 지으시고 거룩하게 구별하여 살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다(렘1:5). 대한민국에 낙태의 영이 무너지고 생명이 살아나기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로부터 시작되어 이 땅에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문지호(의료윤리연구회 회장, 성산생명윤리연구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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