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2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는 동계올림픽이 단순한 스포츠 제전의 성격을 벗어나 전 세계 정치외교의 힘을 판가름하는 각축장이 될 것이란 전망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올림픽의 흥행과 동북아에서의 확실한 맹주를 노리는 중국이 베이징 올림픽에 남북 정상을 동시에 초청해 전 세계에 ‘평화’ 이미지를 부각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미국과 서방 국가들은 중국 정부의 인권 탄압을 문제 삼아 올림픽을 보이콧 하려는 움직임마저 있다.
이처럼 각국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우리 정부는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있다. 문 대통령이 유엔총회에서 ‘종전 선언’을 제안한 것도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미·북·중 4개국 정상이 만난다는 가정하에 그린 그림이다.
그러나 베이징 올림픽에 대한 각국의 셈법이 서로 다른 마당에 올림픽 기간 중 ‘한반도 종전 선언’이 이뤄지거나 남북 정상회담이 실현될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우선 미국은 베이징 동계올림픽 참가에 부정적 기류가 강하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지난 5월에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대한 외교적 보이콧을 주장한 바 있고, 7월 27일에는 미 의회 내의 초당파적 협력체인 CECC가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후원하는 자국 기업들에 제동을 거는 등 올림픽 참가 자체에 부정적이어서 바이든 대통령이 중국에 가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중국 정부의 홍콩, 티베트, 신장 위구르 인권 탄압을 강도 높게 비판해 온 유럽연합(EU) 의회도 지난 7월 8일 중국의 인권 상황이 검증 가능하게 개선되지 않으면 정부 대표단의 참석을 거부하라고 촉구하는 결의안을 의결했다. 더 나아가 영국 하원은 7월 15일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보이콧 한다는 결의안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다.
미국과 EU 등이 중국에서 개최되는 올림픽을 앞두고 정치 외교적 힘겨루기를 하는 이유는 중국이 베이징 올림픽을 단순히 자국에서 개최되는 국제 스포츠 행사로만 국한할 수 없는 이유와도 맞물려 있다. 중국은 이미 동계올림픽을 유치할 때부터 시진핑 국가주석의 3연임이라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올림픽을 시진핑 체제의 견고한 정치적 위상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수단으로 삼고 싶은 것이다.
미국 등이 중국에서 개최되는 올림픽을 별개로 접근하는 또 다른 이유는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동북아에서의 영향력을 최대한 확대하려는 패권주의에 목표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의 시각에서는 중국이 올림픽을 명분으로 남북 정상을 함께 초청해 성대한 평화 이벤트를 펼치려고 하는 것도 한반도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려는 중국의 큰 그림으로 보고 있다.
이런 중국 정부의 구상에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있는 게 우리 정부다. 정부는 문 대통령의 얼마 남지 않은 임기 중에 다시 한 번 남북 정상이 만나는 날을 손꼽아 고대해 왔다. 그동안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방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을 추진해 오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 지형과 코로나19 등의 변수로 뜻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이 그 마지막 기회를 주선해 주기를 학수고대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문 대통령이 중국 베이징에서 미북중 정상과 함께 ‘종전 선언’을 하기를 아무리 간절히 염원해도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험난한 난관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미국 바이든 대통령의 베이징 올림픽 참석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 최근 미국에서 열린 한미 안보실장 회의 후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미국이 문 대통령의 ‘종전 선언’을 지지한다고 발표했으나 백악관이 낸 브리핑 자료엔 ‘종전 선언’ 얘기는 아예 없었다. 백악관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만 봐도 한미 간에 ‘종전 선언’에 대한 온도 차를 느낄 수 있다.
미국이 문 대통령의 ‘종전 선언’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지지할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북한이 전제 조건으로 들고나올 한미동맹 해체, 미군 철수 요구 때문이다. 이에 대해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은 13일 주미 한국 대사관에서 열린 국회 외통위 국정감사에서 이수혁 주미대사에게 “북한이 문 대통령의 종전 선언 제안에 대해 ‘상호 존중’ 문제를 끄집어내고 있다”면서 “우리 정부의 전쟁 억지력은 한미동맹, 주한미군 주둔이라고 주장하고, 북한이 말하는 억지력은 핵무기로 서로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 앞으로 북한이 서로 다른 안보구조를 수평구조로 만들자고 할 텐데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 했다.
외교 안보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실을 외면하고 미국이 빠진 채 중국과 남북 정상이 베이징 올림픽 경기장에서 두 손을 맞잡고 한반도 평화 퍼포먼스를 연출한다 한들 그것이 실질적으로 한반도 평화에 이익이 될 리 만무하다. 단순한 이벤트라 하더라도 오히려 지금 정부, 또는 그 다음 정부에 큰 부담이 될 청구서가 북한으로부터 날아올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문 대통령이 베이징 경기장에서 시진핑과 김정은과 나란히 손잡고 나란히 서는 것을 누구보다 미국 조야에서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한미동맹의 와해로 연결된다면 누가 제일 반기겠나. 북한과 중국이다.
남측이 원하는 것(통신선 복원)을 들어줬으니 이제 당신들도 이행하라며 북이 노골적으로 요구한 것이 북핵 인정, 대북 제재 해제, 한미동맹 해체다. 문재인 정부가 평화 이벤트의 대가로 북측이 보낸 청구서를 받아들고 어떻게 결재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