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약 5:11)
우스 땅에 욥이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욥의 이름의 뜻은 ‘괴롭힘을 받는’ ‘고통을 당하는’이란 의미를 지녔다고 한다. 이 이름이 고난 이전에 지어진 이름인지 고난 이후에 붙은 이름인지 모르겠다. 만약 고난 이전에 지어진 이름이라면, 그의 삶을 놀랄 만큼 잘 예언한 것이고, 고난 이후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면, 그가 겪은 고난과 삶을 잘 대변해 주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온전히 정직한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다. 이런 그에게 고난이 주어졌고 그 고난은 결코 가볍지 않는 고난이었다. 그는 인류역사상 가장 하나님의 괴롭힘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 하나님이 어떻게 한 인간에게 이렇게 크고 많은 고난을 허용하실 수 있단 말인가? 해도 해도 너무한 것이 아닌가? 그가 받은 많은 복을 만큼 그것을 잃는 과정은 너무나 처참하고 아팠을 것이다.
하나님이 욥에 대해 사탄에게 자랑한 것을 기화로 하여 그의 인생에 고난의 해일이 도미노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사탄은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욥에 대해 아마 시기하며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순수성에 이의를 제기했다. 자신이 악해서 그런지 사탄은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며 인간의 신앙의 동기의 불순함을 말하였다. 그는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1:8) 라며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이해와 칭찬이 부정확하고 허술함을 도발적으로 지적했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까닭은 하나님이 욥이 하는 바에 복을 주시고 소유물이 넘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욥의 소유물을 치시면 욥은 틀림없이 하나님을 향하여 욕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맡긴다. 욥이 가진 것들을 빼앗아갈 권한을 주셨고 사탄은 욥의 소유들을 치기 시작했다. 먼저 가축들을 치고 종들을 쳤다. 그리고 종국에는 열 자녀의 생명을 다 빼앗아갔다. 그 나쁜 소식을 알리는 2명의 종 외에는 욥은 모든 것을 잃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이 정도의 고난도 사실상 욥이 몸을 가누기도 힘든 고난이었다. 마음의 아픔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특히 열 자녀가 죽은 것은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하나님에 대해서 정말 너무나 서운하고 마음이 아프고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니고 일곱 아들과 세 딸이 모두 죽다니! 고난의 크기는 너무도 컸지만 고난의 초기여서인지 욥은 어리석게 하나님을 아직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제 사탄은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라고 요청한다. 그러면 틀림없이 하나님을 향하여 욕할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허용하시자 사탄은 욥을 그 머리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쳐서 종기가 나게 하였다. 마음은 아프지만 고난은 외부에 있었다. 그런데 이제 고난이 자신의 온몸을 덮쳤다. 그리고 그 고통은 그야말로 피부에 와닿았고 온몸의 세포에까지 덮쳐왔다. 이때 마지막 남은 보루, 가장 힘들 때 끝까지 곁에 남아 그를 지지하고 격려하며 힘을 주어야 할 그의 아내가 그의 영혼을 박박 긁으며 영적 바가지를 제대로 긁었다. “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기에는 언뜻 보면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욕을 한 내용이 없다. 하지만 욥기 40장을 보면 하나님은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40:2)라고 하신 것을 보면 사실상 욥이 고난 중에 하나님의 처사를 탓하고 항의하고 공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욥은 크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그 의미와 가치와 선함과 악함 등에 대해서 작은 존재에 불과한 인간이 이러쿵저러쿵 할 수 없음을 깊이 깨달았다(사 55:8,9). 욥의 고통과 인내의 기간은 얼마였는지 모르겠으나 42장이라는 긴 욥기내용만큼이나 인내를 요구하는 시간이었으리라.
흑연과 다이아몬드는 같은 탄소성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얼마나 오래, 강하게 압축을 받았느냐에 따라서 흑연과 다이아몬드로 갈린다. 고난의 강도와 시간이 길 때 우리는 지치고 하나님이 원망스럽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다이아몬드로 빚으시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앙동기의 모든 불순물들이 빠지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뢰의 깊이와 강도도 강해진다. “까닭”을 초월하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경외심을 배운다. 기독청년이여, 당신의 고난이 길어지고 있는가? 더 이상 견디기 힘들 정도인가? 당신은 흑연이 아니라 다이아몬드로 선택된 것이다. 기독청년, 파이팅~
김갈렙 목사 (UBF 세계선교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