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에 신대륙과 아시아의 발견과 더불어 식민지화가 일어났다. 마침 18-19세기에 등장한 과학, 특히 진화론은 팽창주의적 제국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해 주었다. 즉 원시(야만)로부터 문명화(civilization)된 사회로 진화하는 과정에 있어, 식민지들의 토착민 문화는 유럽에 비해 뒤떨어져 있다고 생각되었다. 생물학적 불평등 이론이 사회적 불평등 이론의 근거가 된 것이다. 이런 진화론적 사고방식은 냉혹하게도 유럽국가들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였다.
그런 진화론적 이데올로기에 따라 유럽인들은, 귀족이 평민, 도제 그리고 노예보다 우위에 있듯이, 백인은 무어인, 동양인, 흑인, 및 야만인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자연스레 미개한 원시 인종이나 문화는 서구의 지배와 지도를 받아 문명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즉 유럽의 문명국들은 자신들이 식민지로 다스리고 있는 지역의 야만족들을 문명화시킬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지식인들 사이에 미개인들의 섹슈얼리티가 서구 문명인과 같은가 다른가, 또는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상상과 논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미개인의 성문화에 대한 상상에 쿡(James Cook 1728-1779) 선장의 남태평양 섬들에 대한 항해 보고가 불을 질렀다. 그는 남태평양 섬들의 폴리네시아인들의 원시적 성 관습과 성문화가 미개하고 문란하다면서 인종차별적인 시각을 드러내었다. 덩다라 프랑스혁명의 지도자 볼테르도 미개한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에서는 남녀 차이가 없고 성이 문란하다고 주장하였다. 또 다른 예로서 식민지에서 폴리가미(다부다처제)를 발견하였는데, 서구인들은 이를 미개한 것으로 보고 도덕적 개조를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한편 유럽의 부르주아들은 토착 미개인인들의 성문화가 억압이 없는 “섹스의 파라다이스”라는 에로틱한 상상을 하였다. 특히 남태평양 섬들의 토착민 여성들은 유럽의 여자들보다 성적으로 자유롭다고 생각하였다(뮤지컬영화 《남태평양》을 보라). 말하자면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아이디어를 낭만적으로 받아들였다. 아프리카나 남태평양들의 미개인들은 방탕한 이교도(heathens)들로서 위험한 인종이지만, “루소”적인 향수의 의미에서 “noble savages”(고상한 야만인)일 것이라 상정하였다.
한편 18-19세기 당시, 서구에서 남녀 차별이 심했는데, 역시 진화론이 이를 정당화해주고 있었다. 그런데다 식민지 개척은 유럽 남자의 비유럽인 처녀의 몸을 차지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미술가 고갱의 타히티 생활을 보라). 그리하여 미개 문화의 식민지에서 여성들은 이중 삼중으로 학대받았다. 그런데다 당시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의 각종 법을 제정할 때, 타협하여 그들의 공동체 내에서 여성들이 억압받는 것을 방관하였다. 예를 들어 1860년 영국에 의해 기초된 인도 형법은 명예살인(honor killings)의 가해자를 관대하게 처리함으로 그 악한 전통에 타협하였다.
당연히 비극적 사건들이 많이 발생하였다. 예를 들어 1810년 남아프리카의 16세된 흑인 소녀가 네델란드 노예상에게 납치되었는데, 그녀의 둔부가 유난히 컸기 때문에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녀는 Sara Baartman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유럽에서 서커스의 막간 여흥이나 퍼레이드에서 전시되었다. 그녀가 죽었을 때 그녀의 성기는 잘려져 항아리에 넣어 1974년까지 파리에서 전시되었다(그녀의 신체부위는 결국 최근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녀의 기념관이 설립되었다).
이런 “야만적”이고 비극적인 사건은, 유럽인들 사이에 아프리카 여인들의 리비도가 강하다는 상상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슷하게 유럽에는 유럽 밖의 사람들은 짐승 같다는 생각이 퍼져 있었다. 그리하여 식민지의 토착 야만인들의 섹슈얼리티는 백인들의 도덕성과 백인 남자들의 남자다움(생식력)을 위협한다고 생각하였다. 서구 남자들이 식민지 여성과 섹스를 하면 서구인들을 유전적으로 퇴행(degeneration)될 것으로 보고, 인종간 혼합을 법적으로 막으려 하였다.
식민지시대의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편견과 폭력적인 성차별과 성윤리의 타락은 당시 유럽 계몽시대와 낭만시대의 어두운 유산이다. 이는 당시 유럽이 “계몽사상”과 진화론을 따름으로 기독교 전통에서 벗어나고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민성길(연세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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