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28일 또 미사일을 발사했다. 이달 들어서만 벌써 세 번째 미사일 도발이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대해 미국 국무부는 “다수의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이라고 한 반면에 우리 정부는 간단한 유감의 표시만 했을 뿐 ‘도발’이라는 표현조차 하지 않아 북한에 대한 한미간의 온도차를 드러냈다.
북한은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 기조연설에서 ‘종전선언’을 제안하자 처음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 김여정이 갑자기 남북 간 상호존중이 유지되면 종전선언 등 남북 현안 논의를 할 수 있다는 취지의 담화를 냈다. 심지어 남북정상회담 재개 가능성까지 꺼냈다. 그런지 불과 나흘 만에 또 다시 미사일 발사를 재개한 것이다.
북한이 긍정적 담화를 내면서 여전히 미사일을 쏘고 있는 것은 대화 기조 유지와 무력시위라는 전형적인 온탕 냉탕 수법이다. 즉 끊임없는 미사일 도발로 긴장을 유발하면서도 대화 분위기를 유도해 상대로 하여금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가져다 바치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지 불과 20분 뒤에 유엔주재 북한대사가 유엔총회에 나와 한·미 연합훈련과 전략무기의 한반도 주변 배치를 영구히 중단하라고 요구한 것이 바로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북한의 이런 전략은 어느 정도 예상됐던 바다. 문 대통령이 유엔총회에서 종전선언을 제안한 데 대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올 것으로 예견됐다. 그런 점에서 한미연합훈련과 전략무기 배치의 영구 중단 요구는 크게 놀라울 게 없다. 저들이 정말 원하는 주한미군 철수와 핵보유국 지위 인정에 비하면 시작에 불과하다 하겠다.
문제는 우리 정부의 자세다. 문 대통령이 유엔에서 종전선언을 제안하기 전만 해도 북한의 거듭된 미사일 발사를 ‘도발’로 규정하고 강한 유감을 나타냈던 정부가 북한이 종전선언에 남북 정상회담 재개 등으로 호응해오자 어느새 본래의 저자세로 돌아간 느낌이다.
국제사회가 북한이 쏜 미사일이 탄도미사일이고 유엔제재 위반이라고 한 마당에 정부가 아무 말도 못 하는 이유를 왜 모르겠는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간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 제안에 북한이 긍정적으로 호응해오고 있는 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까봐 조심 또 조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의 이런 저자세야말로 남북 대화와 평화 정착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해가 될 뿐이다. 북한은 이미 자기들과의 대화 재개에 목매는 우리 정부의 속내를 간파하고 있다. 한마디로 손아귀에 쥐고 갖고 놀겠다는 심사가 역력하다. 정부가 내년 대선과 문 대통령 퇴임 전에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가시적인 성과를 위해 조급하게 매달리게 되리란 것을 너무나 훤히 알고 있는 북한이다.
북한은 미사일을 발사하는 동안에도 김여정을 통해 한국이 성의를 보이면 남북정상회담에 응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문재인 정부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뜻이다. 이인영 통일부장관이 지난 24일 북한에 100억원 규모의 인도적 지원을 하겠다고 발표한 데 이어 29일 유럽 순방길에 오르며 남북 직통 연락선 복원의 중요성을 언급하자 30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나서 스스로 끊었던 남북 직통 연락선을 10월초에 복원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그러면서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 제안과 관련해 “종전을 선언하기에 앞서 서로에 대한 존중이 보장되고 타방에 대한 편견적인 시각과 불공정한 이중적인 태도, 적대시 관점과 정책들부터 먼저 철회돼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처럼 북한이 한쪽에선 도발을, 다른 쪽에선 평화 공세로 나오는 것은 우리 정부로 하여금 북의 진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전에 자신들이 이 판의 주도권을 쥐고 흔들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결국 북한은 예선 상대에 불과한 남측을 맘대로 공략해 추후에 미국과의 본선 게임에서 지렛대로 써먹겠다는 계산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북한도 알아야 할 게 있다. 자기들이 아무리 미사일을 쏘고 한쪽에선 대화와 평화 전략으로 나와도 그것이 남측을 쥐고 흔들 수 있을지는 몰라도 미국과 국제사회에는 통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남측을 미국과의 담판을 위한 지렛대로 사용할 의도라도 그 한계가 분명하다는 현실을 깨달아야 한다.
미국은 문 대통령이 유엔에서 3자 또는 4자간 종전선언을 언급한 것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분위기다. 정부는 종전선언에 대한 북한의 긍정적인 반응을 앞세워 미국의 협조를 요청하고 있으나 미국은 27일 한미 안보협의에서 “북한이 핵과 미사일로 국제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며 오히려 정반대의 의견을 낸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부가 북한과의 협상에서 일정한 선을 지키지 않고 계속해서 북한에 매달리는 태도로 나온다면 북한은 자신들의 몸값을 점점 높이려 할 것이다. 그것이 냉온 전략의 궁극적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한미연합훈련의 중단과 전략무기 배치 영구 중단 요구에서 그치지 않고 주한미군 철수와 핵보유국 지위를 요구할 게 뻔하다.
이런 북한의 속내를 정부가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정부가 북한을 향해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면 저들이 스스로 ‘비핵화’로 화답해주리라는 일관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몽상이라면 빨리 깨야 하고 착각이라면 제정신 차려야 한다.
한 나라의 평화와 안보가 염원이나 구호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상대가 핵으로 무장한 북한이란 사실도 절대 변할 수 없는 냉엄한 현실이다. 그런데도 북한에 매달려 얻을 게 무엇인가.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어렵게 복원한 한미동맹에 다시 균열이 가고 그것이 곧 한반도 평화에 크나큰 위기로 닥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