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언론중재법’에 쏟아지는 비판 따갑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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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놓고 협상을 벌여온 여야 8인 협의체가 결국 처리 시한인 27일 전까지 합의 도출에 실패했다. 여야가 이견을 좁히지 못한 핵심 쟁점은 ‘징벌적 손해배상제’다.

여당은 징벌적 손해배상 대상을 당초 ‘고의·중과실에 따른 허위·조작 보도’ 조항 대신 ‘언론의 진실하지 아니한 보도’라는 문구를 새로 넣었다. 누가 봐도 더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기준이다. 한 마디로 징벌적 손해배상의 범위를 오히려 더 넓혀 놓은 셈이다.

더불어민주당은 또 기존 ‘최대 5배 배상’에서 ‘5,000만원과 손해액의 3배 중 높은 금액’으로 수정 제안했다. 언뜻 보면 5배에서 3배로 낮춰 완화한 듯 보이지만 하한선을 5,000만원으로 못 박아 결과적으론 최저 배상액을 높였다. 이러니 징벌적 배상제 자체를 반대해 온 국민의힘이 합의해 줄 리 만무하다. 결국 26일 국회에서 열린 제11차 8인 협의체 회의는 최종 조율에 실패하고 말았다.

민주당은 8인 협의체에서 최종안을 도출하지 못할 경우 비로 본회의에 상정해 처리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한 달 전에 합의한 대로 강행하겠다는 것이다. 여당이 힘으로 밀어붙이면 국민의힘은 거여의 입법 독주를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로 최대한 지연시키겠다는 전략이다.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한 달 전에 여당이 국회 본회의에서 단독 처리하려다 국내외의 거센 비판에 직면하자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민주당이 여야협의체를 구성해 문제가 된 쟁점을 재검토하겠다며 한발 물러선 것이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핵심 쟁점에 대해 여야가 간격을 좁히고 합의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야당은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여당은 언론중재법 개정안의 핵심인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뺀 법안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입장이어서 말이 재검토지 처음부터 명분축적을 위한 시간벌기라는 비판이 많았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여야협의체 안에서 합의도출에 실패한 이상 단독 처리할 명분이 생겼다. 충분히 양보했는데도 야당인 국민의힘의 비협조로 합의에 이르지 못했으니 한 달 전에 합의한 대로 법적 절차를 진행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한 달 전보다 더 악화된 비판 여론이다.

우선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이 더 따가워졌다. 한 달 전 우리 정부에 우려의 서한을 보냈던 아이린 칸 유엔 특별보고관이 또 다시 심각한 우려를 표시하고 나섰다. 120여 회원국을 가진 국제언론인협회(IPI)는 17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가진 총회에서 세계 각국의 언론 탄압, 언론 자유 침해 행위를 규탄하는 결의문을 발표했는데 여기에 한국의 언론중재법도 포함됐다. IPI에 앞서 세계신문협회(WAN), 국제기자연맹(IFJ), 국경없는기자회(RSF) 등 해외 언론단체들도 “민주주의 국가에선 상상하기 힘든 악법”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국제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HRW)는 아예 대놓고 문재인 대통령, 국회, 여야협의체 등에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거부하라’는 제목의 서한을 보냈다고 16일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HRW는 특히 ‘징벌적 손해배상’에 대해 “허위·조작 보도에 대한 정의가 모호해 남용의 여지가 있고 언론사가 소송을 유발할 수 있는 보도를 피하려고 자기 검열을 하면 비판적 보도 등이 제한될 수 있다”며 핵심을 꼬집었다.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대한 비판과 우려가 국제사회에서만 쏟아지고 있는 게 아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해외 주요국에서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을 별도 규정한 사례를 찾지 못했다”고 했고, 국가인권위원회도 ‘헌법상 언론의 자유를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교계도 지난달 한교연이 비판 성명을 발표한 데 이어 샬롬나비도 23일 논평에서 “언론중재법은 국민의 알 권리를 통제하고 정권 유지를 위한 법”이라며 비판에 가세했다.

여야협의체가 공전을 거듭하면서 국내외에서 더욱 거센 비판이 일자 문재인 대통령은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며 신중한 입장을 나타났다. 문 대통령은 23일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기내에서 기자들에게 언론중재법 개정안과 관련 “지금 언론이나 시민단체, 국제사회에서 이런저런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 점들이 충분히 검토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언론 관련 주무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 황희 장관도 미국 뉴욕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청와대도 언론법이 통과되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고 거들었다.

당초 여당이 내세운 언론중재법 개정의 목적은 가짜뉴스, 허위보도 등으로 인한 피해 방지 대책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언론에 재갈을 물려 정권에 불리한 보도를 아예 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 핵심이 바로 언론사에 물리는 ‘징벌적 손해배상’이다.

언론의 가장 큰 책무는 정론직필(正論直筆)이다. 즉 바른 주장을 펴고 사실을 그대로 전한다는 의미다. 국민을 대신해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징벌적 손해배상’은 필연적으로 기자들의 취재 보도를 위축시켜 침묵을 강요하는 나쁜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가짜뉴스’ 근절이라는 대의명분이 확실하다고 해도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하는 법 규정이 과잉입법이고 위헌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거대 여당은 살아있는 권력을 비판해 온 언론을 법으로 다스려 권력이 저지르는 각종 부정 비리 보도에 ‘재갈’을 물리려는 정략적 의도가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보수 진보, 국내외를 막론하고 쏟아지는 비판에 귀 기울여야 할 때다. 그것이 지금 여당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전략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