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드미션대학교 윤임상 교수의 소논문 ‘포스트 코비드 시대, 사역의 변화에 따른 교회 예배와 음악’을 연재합니다.
III. 종교개혁 시대 에배를 통해서 본 예배와 음악
2. 오늘날 교회 예배에 주는 도전들
종교개혁은 개신교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이다. 이 종교개혁의 본질적인 의도 중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행하여야 할 예배를 바른 예배로 회복시키려 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의 예배와 음악은 개혁가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변화되고 표현되고 있다. 특히 근대에 들어서 그 변질의 속도는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에 종교개혁자들이 오늘날 교회의 예배와 음악에 대해 던져주고자 함직한 메시지를 예배음악에 집중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2) 개신교 예배와 음악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과정을 통해서 증명된 것처럼 음악은 말씀의 권위를 올바로 세우고 개신교를 탄생하게 함에 있어 밑거름이요 불씨가 되었던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즉 1517년 시작된 종교개혁이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확산 되기 시작한 것은 앞서 종교개혁사를 요약해서 언급한 것처럼 1522년 루터가 음악을 만들어 대중들에게 보급하면서부터의 일이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된다. 즉, 루터가 개혁을 단행 했다면 그 개혁을 신학적인 뼈대를 든든히 세워 완성한 인물은 칼빈(John Calvin, 1509-1564) 이라 말할 수 있다. 만약 칼빈이나 다른 개혁자가 종교개혁의 선두에 섰고 마틴 루터가 그 뒤를 따랐다면 당시의 종교개혁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 감히 필자는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음악을 통해 개혁의 메시지를 빠르게 회중들에게 알리게 된 음악의 작용력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음악이란 여러 예술행위 중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가장 빠르게 주입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마틴 루터는 신학과 음악을 거의 대등한 위치에 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의 예전에 음악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신학자 로빈 리버 (Robin A Leaver 1939 -)는 그의 책 Luter's 'Liturgical Music ' 에서 음악이 신학 다음 이라는 루터의 말은 단지 수사학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음악이 신학과 거의 동일한 효과를 일으킨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로빈이 주장한대로 중세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을 음악의 주된 기능으로 생각했지만 마틴 루터는 음악을 이러한 기능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기능으로도 여기게 되었다는 말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처럼 루터는 그의 신학사상에서, 그리고 그의 예전에서 음악의 대중성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중세 교회의 예배 전통에서 계승된 여러 부분의 음악을 그대로 수용하는 유연성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자유와 책임이라는 역설적 통합을 주창하며 그리스도의 온전한 복음,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는 음악이라면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된 것이다.
칼빈도 루터와 마찬가지로 예전에서 음악을 중요한 위치로 놓았다. 하지만 중세 교회 예배에서의 음악의 오용을 대단히 심각하게 생각하여 당시의 음악을 세속화 되고 부패한 교회의 음악이라 단정짓고 거부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유행되고 있는 모든 다성음악과 악기를 거부하고 단선율의 음악만 주장하게 된 것이다. 1539년 처음으로 22편의 시편 찬양을 묵은 스트라스브르크 시편(Strasbourg Psalter) 을 시작으로 23년이 지난 1562년 시편 150편을 모두 묶어 제네바 시편가(Genevan Psalter) 를 만들어 이것을 예배에서 유일한 찬양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 안에 내포된 칼빈의 마음을 살펴보면 찬양은 전심을 다해 오직 마음으로 찬양해야 하고 외형적으로 부르는 노래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즉 음악적 멜로디에 신경을 쓰기 보다 가사에 깊은 영적 의미를 담아 찬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e, 354-430)의 입장과 같은 맥락으로 그는 가사의 내용보다 음악에 끌려가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주장 하였다. 이것이 결국 칼빈으로 하여금 귀 만을 즐겁게 하려는 매혹적인 예술음악들을 거부하고 단선율의 음악을 사용함으로 음악의 단순함을 꾀하게 된 것이다.
이와같이 종교개혁의 핵심인 루터와 칼빈, 이 두 개혁가들은 음악의 사용면에서 사뭇 다르게 접근하였고 그들의 교회음악 철학 또한 극명하게 달라 보였다. 하지만. 본질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찬양의 관점에서 볼 때, 결국 같은 길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들이 오늘의 예배음악을 보면서 현대 예배자들에게 조언하고 충고하고 싶은 것들을 서술하고져 한다.
첫 번째로, 예배에서 찬양을 하나의 옵션이나 악세사리로 생각하지 말라. 우리의 예배 속에 드려지는 찬양이 교회의 상황에 따라 삭제 되거나 혹 설교자의 설교를 잘 하게 하기 위한 악세사리로 인식 되어서는 안된다. 목회자의 설교가 중요한 것처럼 찬양 또한 옵션이 아니라 필수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어찌 보면 찬양이 때로는 한편의 설교보다 더 큰 힘을 지니기도 한다.
오늘날 코로나 팬데믹이 주는 재난 속에 예배에서의 음악은 설 자리를 더 많이 잃게 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게 된다. 온라인 예배를 드리면서 찬양 없이 설교만으로 예배를 구성하기도 하고, 찬양은 간신히 집어넣되 아주 규모를 축소해서 사용하거나, 또 얼마 전 까지는 찬양대의 찬양이 없어진 관계로 아예 그 찬양시간을 삭제해 버린 교회들도 많이 보게 된다.
이 같은 현상은 코비드 팬데믹의 비상 상황에서 예배가 비대면 온라인 예배로 변화되면서 찬양을 없애거나 축소하는 경향으로 나타나는 일시적인 일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교회들이 규모를 조정해서라도 꼭 찬양의 시간을 갖게 해야 한다. 찬양은 예배를 구성함에 있어 옵션이 아니고 필수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예배에서의 찬양이 공연예술(Entertainment)이 되지 말게 하라. 오늘날 예배에서의 경배 찬양, 찬양대의 찬양이 하나의 공연 예술 문화로 점점 더 취급되어 간다. 이로 인해 온갖 엔터테인먼트에 사용되는 장비와 악기들을 더 동원해서 화려함과 더 좋은 영상, 더 좋은 소리를 만들어 회중들을 현혹시키려 한다. 이에 회중들은 그것으로 하나님께 드림이 되는 것이 아닌 찬양 연주를 다른 교회 혹은 찬양 연주 단체와 비교해서 평가하고 판단하는 자리로 만들게 한다.
공연장과 예배 현장에서 표현되어지는 음악의 대상과 그 의미는 분명히 다른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공연장에서 음악 연주의 대상은 관중이고 그들에게 미적 요소와 감동을 주는 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예배에서 음악 연주의 대상은 하나님이다. 음악은 단순한 기능일 뿐이고 미를 표현하려는 것은 하나의 요소이다. 목적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만 존귀케 하는 연주(Performance) 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삼위 하나님만 축복하는 찬양을 만드는 기능인이 아닌 예배자가 되라.
오늘날 찬양의 내용에는 복음을 말하면서 또 경배를 말하면서 그 안에는 미묘하고 복잡하게 내가 담기어져 결국은 내가 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그냥 단순하게 복음, 그리고 삼위 하나님에 대한 가사를 가지고 내가 아닌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만 영화롭게 하는 찬양을 드리는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이처럼 종교개혁자들이 오늘날 개신교 교회음악의 현실을 보고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충고하고 싶은 세 가지 조언을 종합해 보면 세 개의 주의(ism) 로 요약할 수 있다. 즉, 합리주의(Rationalism) 와 심미주의(Asceticism)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실용주의(Pragmatism)이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고 찬양하는 일에 결코 합당하지 못한 요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뀌어야 한다! (계속)
윤임상 교수(월드미션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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