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리승만 박사의 교육정책 , 교육분야
이승만이 1935년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길거리에 어린 여자 어린아이들이 노숙자가 되어 거리에 많이 있었다. 한국말을 전혀 알지 못해서 영어로 물어보니 조선 사람들의 딸들이었다. 이유를 물어 보니 한국의 여자 아이의 천대가 미국까지 와서도 계속되어진 것이다. 이승만 박사는 그들들 모아다 기숙사를 만들고 남녀 공학의 학교를 세운다. 그 당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김활란, 임영신 박사들이다. 나라의 미래는 신학문을 배워 지식인들이 많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1904년 자신이 썼던 “독립정신”을 실천한다. 독립정신에서 밝혔듯이 나라의 구제는 전 국민이 교육을 받은 때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6년제 의무교육제를 도입하고 성인들 대상으로 문맹퇴치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 결과 해방당시 85%였던 문맹률을 1959년에는 20%로 낮추는데 성공했다. 나아가 이 대통령의 정부는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대폭 증설하고 해외 국비 유학생을 선발하여 산업화에 고급 인재를 양성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8.15일 대한민국을 건립하고 일본의 압제밑에 살던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기 위해 교육받은 사람들이 너무 필요했다. 당시의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남북한 모두 27000 여명 정도 밖에 없었다. 이들로 나라를 세우기 너무 힘들었다. 초등학교를 의무화 하고 학교 선생님들의 군 입대를 면제해 주며 밤에 국민에게 글자를 가르쳐주는 것으로 대신하게 했다. 그리고 돈 있는 사람들에게 독립 운동하는 것과 같이 학교를 세워줄 것을 호소한다. 그래서 중·고등학교와 대학이 사립으로 세워진 곳이 많아지게 되었다.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배워야 한다. 이승만 박사가 하바드 대학에서 공부할 당시 근처에 있는 MIT 학생들에게서 많은 조언을 받게 된다. 그는 미국의 MIT처럼 세계적인 공과대학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하와이에 있을 당시 사 놓았던 하와이 교민청을 매각하고 정부의 지원으로 인하대학교 공과대학을 1954년 2월 5일에 세운다. 인하대학은 인천의 소래교회에서 하와이 농장으로 이민 간 교포들이 전성어린 모금과 하와이에 세웠던 교민청을 판 기금으로 인천의 인자와 하와이의 하자를 따서 인하 대학으로 세워서 전 세계의 제일가는 공과 대학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인하공대는 1960년 11월19일 우리나라 최초로 로켓 발사 실험을 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항상 나라사랑, 나라발전을 위하여 공업발전과 과학발전을 꿈꾸어 왔다. 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교육받은 사람이 많아야 한다고 하여 국비로 장학생을 선발하여 해외 유학을 보낸다. 1956년 제철공장을 세우기 위해 독일로 10명의 유학생을 보내 공부하게 하고 그 중에 김재관 박사를 중심으로 한국형 포항제철을 설계하고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제철소를 만들었다. 또한 원자력 장학생 20명을 선발하고 미국과 영국으로 보내 공부하고 돌아오게 하여 1958년 원자력 연구원을 설립하여 연구해서 원자력 고리에 발전소가 건설되고 최고의 기술자들이 배출되었다. 그러므로 지금은 우리나라의 원자력 기술자들과 원자력 기술을 발전시켜 가장 훌륭한 기술을 보유하게 되었다. 1959년에는 영국보다 대학 진학률이 높았다. 그 결과 1960년 대통령을 그만 둘 때 대한민국의 문맹률은 10%로 낮아졌고 대학 입학하는 많은 사람들이 생겨나며 교육열에 가득한 나라가 되었다. 12년 만에 대 변환을 이룬다. 현재의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된 것은 바로 그의 교육정책이 힘을 보탰다.
8. 미국을 통한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로부터의 자유해방
1945년 10월 16일에 33년 만에 돌아온 대한제국을 볼 때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웠다. 당시는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75%가 넘었다. 소련이 남침하여 공산주의 나라를 세우려고 김일성을 앞장세워 공산주의를 확장시켜 나가는 때였다. 해외에서 돌아온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상해에서 독립투쟁을 하던 김 구선생과, 국내에서 인민 공산주의를 주장하여 많은 사람들이 지지를 받던 박헌영과 미국과 같은 자유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이승만 박사 등 여러 갈래로 맘이 나누어져 있어 국가가 탄생되기란 정말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욱이 문맹률이 85%에 달했고 자기 이름을 쓰는 사람조차 많지가 않았다. 소련이 남침하여 공산주의 나라를 세우려고 김일성을 앞장 세웠다. 당시 백성들이 이씨 조선의 반상제도와 노비제도에 몸서리를 치며 살았던 그들에게 평등한 세상을 펼친다고 하니 공산주의에 다 속아 넘어 갔다. 양반도, 상놈도, 지주도, 노비도, 다 평등하다고 주장하며 재산도 평등하게 나눈다며 백성을 부추겼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백성의 것을 모두 몰수했을 뿐 평등하게 나누지 못했다.
송병기 박사(뉴욕장로회신학대 전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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