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비대면 예배의 문제점(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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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 시대의 교회론

3. 예배자들에게 내리시는 생명의 양식

김재성 교수

왜 모이기를 힘써야 하고, 그 모임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교회와 함께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은혜를 부어주신다는 약속을 하셨다. 성도의 삶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평생 동안 경건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성도는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있기에, 교회 밖에서는 그 어떤 경건의 진보라도 이룰 수 없다.

경건한 성도로 우리가 장성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설립된 교회와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어 나가는 모든 일들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 누구도 개인적인 경건생활로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도는 눈에 보이는 지역 교회를 통해서 자라나고, 양육을 받는다.

다음 3장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를 살펴볼 것인데, 교회는 예배공동체로서 부름을 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성경의 전체 교훈들을 구조적으로 연결하여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일이 사람의 임무로서 가장 강조되어 있다. 혼란된 인간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한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빛과 생명을 찾아서 문제를 해결하는 첩경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생명과 호흡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의 기술과 문명이 번성해서 첨단 산업을 발전을 도모하여, 엄청난 재화를 만들어낸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영원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을까? 결국 모든 인간은 죄악된 문화와 향락에 젖어서 정신없이 살다가 멸망하게 될 것이다. 지나간 역사와 문명사가 보여주듯이, 이집트 문명, 헬라철학, 로마 제국에서 이미 보았고, 히틀러의 광란적인 독재정권도 몰락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현대인들의 광란적인 도모들은 결국 처절한 진노를 초래할 것 밖에는 없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자들은 마지막 날에 영원히 멸망하게 되는 것이고, 반대로 은혜를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찬양하면서 감격스러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영광을 올리며, 그의 인도하심에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이야기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미 성경을 통해서 제시된 엄청난 은혜의 역사를 기억해야만 한다. 성경은 유기적 영감을 받은 인간 저자들이 기록을 했기 때문에, 구속역사를 다루는 연속성과 다양성이 풍성하고도 분명하다.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고, 계시된 가르침을 벗어난 사람들의 제안들은 결코 믿을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만 구원하시는 진리이자, 거룩하게 하는 진리가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당신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기도했다(요 17:17). 우리가 구원을 얻은 믿음의 공동체를 벗어나서는 결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질 수 없다.

1)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엄중한 지시들

우리가 땅 위에 있는 어떤 교회에 모여서 공적인 집회로 드리는 것은 그 예배장소와 관계없이 하늘나라에 연결되어있다. 승천하여 지금도 우편 보좌에 앉으사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에게 속한 공동체이다. 히브리서 12장 18-21절에 설명된 바와 같이, 지상의 교회가 드리는 예배는 온 우주 만물의 통치자에게 올리는 것이요, 하늘에 속한 천상 공동체로서의 예배에 연결되어 있다.

지상의 교회는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 땅 위에 있는 교회의 모임은 온전한 모습을 갖추기 위한 노력을 멈출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지역에 있는 다양한 형태의 교회들은 여전히 부족하고, 문제가 많고, 죄악에 물들어 있지만,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살피고 계신다.

신실한 예배는 반드시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들로 구성되고, 진행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인터넷에 연결되어서 가상공간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주장하는데, 과연 이것이 하나님에게 열납되고, 응답이 주어지는 신실한 믿음으로 올리는 경배요, 참된 예배가 될 것인가? 온라인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예배를 쉽게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사람들이 편리하다 해서, 또한 크게 흥행하는 방법이라고 해서 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예배의 성공여부를 판단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예배하고 경배하기를 원하신다.

주일 날 오전에 예배를 드려야만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해하지 마시라.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참된 예배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한 것이다. 바른 예배는 하나님께서 친히 지시하신 방식에 따라서 올리는 것이다. 사람들이 마음대로 조절하거나, 그저 적당히 시간을 때우는 예배가 얼마나 허망한 행동인가를 알아야 한다. 예배란 매우 엄중한 행동을 포함하는 것임을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데, 결코 우리가 이런 내용들을 가벼이 생각하거나 쉽게 잊어서는 안 된다.

창세기 35장 7절에서, 야곱의 예배행위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내용 안에서만 예배하여야 함을 강력히 제시하여 준다. 레위기 10장 1-3절에서는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서 지정하시는 방법대로 불을 사용하지 않았다가, 즉석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사야 1장 12-13절을 읽어보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성경에 적극적으로 권고하는 내용들이 아니라면, 우리는 예배 시간에 그런 내용들을 포함하지 말아야 한다. 인터넷 교회에서의 예배는 실제적으로 지역 교회에 나가서 드리는 예배에 연결해야만 하고, 모든 우선순위를 지역교회 예배로 돌려야 한다.

특히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참된 예배, 순종하는 예배, 진지한 예배를 드리도록 촉구하신다. 그러나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인 모임과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도 결국 헛된 예배가 되고 말았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암 5:21-23).

참된 예배는 피조물이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경배하며, 엎드려서 창조주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또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들이므로, 그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시 95:6-7).

2) 예배 공동체로서의 교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을 받은 성도들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구원받은 삶을 살아가는 특권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집단 공동체를 이뤄나가는 의무를 갖고 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공적인 예배에 나아가서 믿음을 통해서 순종하기에 익숙해져야만 한다. 목이 곧은 백성으로 교만하게 우월의식을 갖거나, 혹은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고 누리기에 함몰되어서, 연합된 공동체의 일원임을 잊어버린다면, 맛을 잃어버린 소금과 같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이유는 하나님께 경배하고 영광을 돌리도록 하려 함이다. 창세의 첫 부분에서부터 계시록의 마지막 부분까지 성경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 예배와 찬양이다. 땅 위에 내려와서 살아가고 있는 전 인류에게 있어서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주는 첫 이야기가 가인과 아벨의 제사이다(창 4:3-5). 그리고 마지막 천상에서의 참된 예배들이 보여졌는데, 찬양과 각종 다양한 이미지로 표현 되어졌다(계 4-5장).

사람들이 살아가는 집은 스스로의 설계와 손으로 지은 것이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과 교회는 실제로 하나님께서 건설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영원히 그를 내 집과 내 나라에 세우리니, 그 위가 영원하리라”고 하였다(역대상 17:10-14).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집이요, 자신의 나라를 세우셨다. 그 집에서는 그의 백성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경배와 예배를 올리는 장소로 사용될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솔로몬은 성대한 낙성식에 언약궤를 좌정시켰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집이라고 아홉 번이나 반복하였다(왕상 8장). 성전이라는 명칭은 없고, 하나님의 집이라고 계속해서 강조하였다. 이 집이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장소라는 의미가 아니라, 비록 하나님은 하늘에 임재하시지만, 그의 백성들이 그분께 영광을 돌리고 예배를 올리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지배하는 왕들을 통해서 다스리게 하셨지만, 성전을 초월하여서 온 우주에 펼쳐진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신다(시 87:5).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믿음의 반응을 드러내어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 순종하도록 요구하였다. 수많은 구원사건들 중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출해 낸 사건이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역사의 본질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예배와 믿음의 반응은 구원을 받은 백성들과의 언약관계를 표현하는 일이었다. 언약에 기초한 예배,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는 방식, 예배의 언약적인 성격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일관되게 지속되어졌다.

인간의 반응으로 드리는 예배는 전인격을 모두 다 바쳐서 온전히 드리도록 요구되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한다(신 4:29, 6:5, 11:13, 26:26; 막 12:30, 33; 눅 10;27, 마 22:37). 예배에의 부르심에서 하나님은 종교적 의무를 이행하는 식으로 나가는 반심이 아니라, 전심을 다 드려야만 한다고 요청하였다.

구약성경에서 예배를 중심적인 신앙 행동으로 규정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볼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이 인도할 것 인가에서부터 어떤 장소와 순서로 진행될 것인가를 소상하게 가르쳐주셨다. 출애굽기 24장 1-8절에 보면,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만남이 일어난 집회가 기술되어있다. 출애굽 직후에 시내 산기슭에서 시작된 공식적인 예배는 하나님과의 성도들과의 만남을 보여주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장면이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공적인 만남은 가장 중요한 기본 구조적 요소들이 제시되어져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출애굽기 19장에서 24장까지에 기술된 이스라엘 백성들과 훗날 기독교인들의 공적인 예배에서 본질적인 요소들이 제시되어져 있다.

신약성경에는 출애굽사건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들 사이의 연관이 강조되었다. 베드로 사도는 신구약의 핵심적인 두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2:9).

출애굽 사건에서처럼, 어둠 속에 살던 자들을 밖에 있는 빛의 세상으로 불러내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왕에게 속박된 노예로 살다가 구출된 것처럼, 신약시대의 성도들도 사악한 권세 아래에 놓였던 자들이었으나 주님께서 구출해 내었다(엡 2:2).

예수 그리스도와의 새 언약을 맺은 성도들은 교회를 이뤄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게 되었다. 구약시대의 맺어졌던 모든 언약의 조항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갱신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과 자신들에게 맺어진 언약을 지키는데 실패하였다. 이스라엘은 거듭해서 후손들의 시대로 내려가면서 언약의 파기자들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지켜질 새 언약을 맺으셨다. 우리들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하나님과의 다짐이나 맹세를 지킬 수 없다.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완전히 성취하셨다. 온전한 순종, 죽으심, 부활을 통해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자들 가운데 성령으로 임재하시면서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를 유지하시는 것이다. (계속)

김재성 박사(국제신학대학원 명예교수,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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