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교리와 부흥 콘퍼런스가 '존 찰스 라일의 설교와 목양'이라는 주제로 6일 온라인을 통해 열렸다. 이날 도지원 목사(예수비전교회)가 주제 강연을 전했다.
도 목사는 "존 찰스 라일 주교가 죽고 난 후 그의 삶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런데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그에 관한 관심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를 가져온 것은 라일 주교가 쓴 저서들이었다. 그의 저서 <오직 한 길>이 알려지면서 그 이후 계속될 그의 전기의 출간을 알리는 사건이 되었다. 라일은 누구보다도 청교도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저서 <오직 한 길>에서 복음주의 신앙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혔다"며 "그러면서 그는 복음주의 신앙의 다섯 가지 특징을 열거했다. 그것은 성경의 절대적 우위성, 인간의 죄성과 타락의 교리가 지닌 깊이와 현저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직임이 갖는 최고의 중요성, 사람의 마음에서 성령의 내적 사역이 갖는 높은 위치, 사람의 삶에서 성령의 외적이며 가시적인 사역이 갖는 중요성 등"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라일은 청교도에게서 복음주의 신앙을 배웠으며 이는 그의 목회에 가장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기에 그의 설교와 목양은 복음주의 목회의 전형으로서 오늘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그가 당시 복음주의 신앙이 공격을 받고 경멸당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고 담대하게 밝혔다.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그가 했던 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라고 했다.
이어 "그의 삶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라일 주교는 1816년 5월 10일 잉글랜드 체셔 주 매클스필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유한 집안이었으며 유복한 생활을 누렸지만, 영적인 신앙은 조금도 접하지 못하고 자랐다. 이후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에 입학했으며, 그가 21살이던 시절 흉부 염증으로 인해 며칠간 누워있을 때 처음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졸업 이후 그는 그의 부친이 경영하던 은행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1841년 부친의 은행이 파산하면서 그의 삶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며 "파산 이후 수입이 필요했던 그에게 가능한 선택은 영국 국교회의 목사가 되는 것뿐이었다. 목회자가 된 이후 그는 주일에 두 번 설교했고, 수요일과 목요일 밤 가정모임에서 즉석으로 강해 강좌를 하고, 매주 60가정 정도씩 심방하고 주일학교를 가르치며 감독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렇게 사역을 하던 중 라일은 1861년 9월 스트랜드브로크라는 도시로 가서 교구 목사로 사역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곳에서 19년을 사역했으며 사역하는 동안 그는 저서들을 썼다. 그곳에서 사역하면서도 그는 다른 곳에서 하던 것처럼 똑같이 사역했다. 그리고 그는 주요 신학적 논쟁에 참여했고 관련된 책을 출간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복음주의권을 이끄는 지도자로 부상했다"라며 "그러던 와중에 그는 1880년 7월 1일 리버풀로 가서 그곳의 초대 주교가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20년 동안 주교로 사역했으며 교회와 관련된 여러 현안들을 다루었지만, 그가 섬기던 리퍼풀의 성 캐서린 교회의 의식적인 예배를 좋아하지 않았다. 1900년 3월 1일 그는 주교직을 사임하고 그의 딸과 함께 로스토포트로 갔으며 그곳에서 6월 10일 세상을 떠났다"라고 했다.
도 목사는 이어 "라일은 설교가 목회자의 우선적인 임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처음부터 효과적인 설교를 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가 목회적 심방에 헌신했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는 처음에 그가 이튼과 옥스퍼드 시절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수사학에 관한 책에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사역하던 곳은 시골이었으며 그곳의 회중들을 위해 이런 스타일을 버리고 단순하게 설교하기 시작했다"라며 "이렇게 한 결과 시골 회중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고, 설교자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의 설교에는 단순성 5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설교의 주제를 분명하게 인지하라는 것, 둘째는 쉬운 말을 사용하라는 것, 셋째는 간결한 문체를 유지하는 것, 넷째는 직접적인 어투를 사용하라는 것, 다섯째는 경험담과 예화들을 사용하라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이어 "라일은 설교 준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효과적인 설교가 쇠퇴하는 원인 중의 하나가 다른 업무들로 인해 설교 준비에 충분한 시간을 쓰지 못하는 것이라고 봤다. 그의 설교 준비에서 주목할 점은 그가 받은 고전 수사학의 영향"이라며 "그는 1841년 엑스베리에서 시작하여 1880년 리버풀 주교가 되기까지 40년 가까이 시골에서 사역했다. 시골 회중을 이해시키기 위해 그의 설교 전달은 주요 관심사였다. 그가 단순한 스타일의 설교를 하게 된 것은 이런 관심이 낳은 결과였다"고 했다.
이어 "라일은 기도의 능력을 믿었으며 그는 효과적인 목회에 있어서 개인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목회 초기부터 심방에 적극적이었다. 엑스베리에서 그는 적어도 한 달에 한번 교구 내 모든 가정을 심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가 심방을 중요시한 이유는 목회의 공적 사역에는 과도한 관심을 쏟지만, 각 개인을 심방하고 영혼을 인격적으로 돌보는 일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을 보이는 경향이 점점 심해지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심방을 목회의 필수적 요소로 여겼다. 그래서 그는 주교가 된 후에도 설교자들에게 심방을 강조했다"라고 했다.
끝으로 도 목사는 "우리가 그의 삶과 사역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의 복음주의 신앙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는 복음주의를 18세기 영국 복음주의 운동을 겪은 사람들, 청교도들로부터 배웠다. 그가 배운 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다. 그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주의 신앙을 현장에서 가르쳤다. 오늘날 우리 목회 현장에서 그의 복음주의를 가르침으로써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을 해야 한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지만 그런 가운데 하나님 은혜의 역사는 흘러가고 있다. 오늘 이 시대가 힘들고 어렵다고 해도 우리를 통해 살아 역사하시기를 잊지 않고 가길 축원드린다"라고 했다.
한편, 콘퍼런스는 6일 오전 10시 20분부터 오후 8시까지 진행됐으며, 도 목사의 주제 강의 외에 박완철 목사(남서울은혜교회)의 특강 '개혁주의 입장에서 바라본 새로운 설교학', 손동식 박사(거인들의 설교연구소 대표)의 두 번째 주제 강의 '존 찰스 라일의 시대 상황과 설교', 서문강 목사(중심교회)의 세 번째 주제 강의 '존 찰스 라일의 목양적 성화론' 그리고 도지원 목사의 네 번째 주제 강의 '존 찰스 라일의 목회적 유산'으로 진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