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에 대한 지식’보다 더 소중한 것이 또 있으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선 귀가 따갑도록 많이 들어왔다. 그분의 인격, 성품, 능력, 가르침 등에 대해서 우리는 꽤 많이 알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이가 별로 없다는 사실에 대해선 대부분이 잘 모르고 있다. 실제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2] 하나님은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이 아니라, 이 모습 이대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과연 그럴까? 하나님이 성숙되고 변화된 내 모습을 사랑하시지 문제 많은 내 모습을 사랑하실 리가 있겠는가? 아니다. 틀린 생각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키우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물론 그 사랑을 줄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3] 설사 우리가 분주함, 우울, 집안 문제, 기타 더 심한 일의 급습으로 하나님과의 동행에서 멀어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 하나님을 까다롭고 차갑고 걸핏하면 화를 내시는 분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많다. 우리의 회의와 냉소와 의기양양한 합리주의가 우리 가운데 계신 초월자를 세상 밖으로 몰아내, 그 자녀들의 기쁨과 고민으로부터 분리되고 동떨어진 분으로 만들었다.
[4] 1930년대에 대니얼 콘시딘(Daniel Considine)은 “어머니가 자식의 허물을 못 본다지만 주님이 우리 허물을 못 보시는 정도에 비할 바 아니다”라고 썼다. 죄의 심각성을 폄훼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과거에 매여 과거를 한탄하며 현재의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계속 하나님을 멀리하는 처사나 마찬가지다. 2세기 헤르마스(Hermas) 목자의 말처럼 “자신의 죄 타령일랑 그만두고 의를 위해 기도하라.”
[5] 너무 멋진 말이다. 지난 날 과거의 실수와 허물에 매여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시간을 낭비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사랑과 자비와 세심한 배려의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헨리 나우웬의 저서 『마음에서 들려오는 사랑의 소리』(The Inner Voice of Love)에는 ‘신뢰’란 단어가 65번 나온다. 나우웬의 이전 책들에는 ‘믿음’이란 단어가 빈번히 등장한다.
[6] 그러나 이 책 속에 ‘믿음’은 1번, ‘신뢰’는 65번 나온다. 성숙을 향한 그리스도인 삶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길목 어디선가, 믿음은 소망과 합해져 신뢰로 자란다. 철두철미 신실하신 하나님께 대한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 가지 확신이 피어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처음 시작하신 일을 지속하고 완성하신다는 확신이다. ‘믿음’은 불신자들의 문제이고 신자들에겐 ‘신뢰’가 관건이다.
[7] 막 4:35-4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강 건너편으로 가시고자 했다. 예수님은 배 고물에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데, 갑자기 큰 광풍이 일어나 배들이 뒤집히거나 파손되기 직전이 되었다. 제자들이 바닷물을 퍼내고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막아보는데 역부족이었다. 이때 제자들의 눈에는 상황파악도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급히 예수님을 깨우면서 자기네가 지금 위기상황을 맞고 있음을 알린다.
[8] 잠에서 깨어나신 예수님은 파도를 꾸짖어 풍랑을 잔잔케 하신 후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책망하셨다. “너희가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막 4:40).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눅 8:25). 여기서 한 가지의 의문이 생긴다.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을 향해서 ‘믿음이 없는 자’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럼 제자들이 당시 불신자였단 말인가?
[9] 아니다. 그럼 어째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하셨단 말인가? 이건 원어적으로 정리가 필요한 내용이다. 여기서 ‘믿음’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πιστις’로 ‘믿음’ 또는 ‘신뢰’로 번역한다. 이 본문에서는 전후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믿음’이 아니라 ‘신뢰’로 번역했어야 한다. 번역가가 본문 전체의 흐름도 모르고선 ‘믿음’으로 잘못 번역해버린 것이다.
[10] 마 8:26절에선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리켜서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하셨음에 주목하라. 믿음이 없으면 불신자가 되지만, 신뢰부재는 신자들에게 아주 빈번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렇다. 당시 제자들의 문제는 ‘신앙부재’가 아니라 ‘신뢰부재’였다. 믿음이 크지 못하고 작으면 신뢰가 열매로 맺힐 수가 없다. 믿음도 ‘큰 믿음’이라야 한다. ‘참 믿음’ 말이다. 믿음이 작으면 의심, 염려, 근심, 두려움과 신뢰부재가 생기게 된다.
[11] 오늘 나는 하나님께로 가는 거침없는 참 믿음을 소유한 온전한 ‘신뢰의 사람’인가 스스로 점검해보라. 우리 하나님은 항상 신뢰할 만한 분이시다. 따라서 참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가 다 그분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다. 영원 세계에 들어가기까지 이 땅에서 오직 ‘신뢰의 사람’으로 살다가 갔으면 좋겠다.
신성욱 교수(아신대학교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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