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6월에 발생한 '제 3차 중동전쟁'은 현대 전쟁사에서 가장 주목되는 전쟁의 하나이다. 1967년 6월 5일부터 11일까지 이스라엘이 주변 이웃 국가인 이집트·요르단·시리아·레바논의 아랍연합국을 상대로 벌인 전쟁이다. 이때 이스라엘군은 단 6일 만에 아랍연합 군대를 격파하고 대승을 거둠으로써 '6일 전쟁'의 신화를 남겼다.
당시 인구가 250만명에 불과하던 이스라엘이 주변 4개국에다가 모로코·사우디아라비아·수단·튀니지·쿠웨이트·알제리·리비아·팔레스타인해방기구 등 8개국의 지원국을 합친 아랍연합군을 6일 만에 제압한 사건을 두고 '유대인의 가정교육의 힘'이라는 주장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그 이유는 전쟁이 일어난 소식이 알려지자 미국에 유학 중이던 이스라엘 학생들이 전쟁에 참여하기 위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을 서두르던 사건 때문이다.
이밖에도 '6일 전쟁'에 얽힌 이스라엘군의 미담거리는 수없이 많다. 결혼 전에 근무했던 여군 비행사로 재입대하여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한 28세 임산부는 임신 6개월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지면 조국이 없어지고 조국이 없어지면 뱃속의 어린 생명도 존재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활주로를 이륙했다. 또 전투 중에 부상을 당해 왼쪽 다리를 절단한 사실을 알게 된 병사가 간호사에게 “우리가 다시 예루살렘을 위해 싸워야 한다면 나에게는 아직 한쪽 다리가 남아 있다고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얘기는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6일 전쟁'에 참전한 양측의 군사력을 비교하면 <아래 표>와 같이 이스라엘의 절대적인 열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강한 애국심은 전장에서 최고의 군인정신을 발휘하였고, '6일 전쟁'의 신화를 만들어 낸 힘의 원천이 되었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 국민의 저력은 유대인의 가정교육에서 나온다는 주장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6.25전쟁 때도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 청년들의 애국심에 비견하고도 남을만한 미담의 주인공들이 적잖게 있다. 그 가운데 1950년 6월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던 28세의 청년 서위렴은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자 곧바로 6.25전쟁에 참전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청년이 한국인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한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본명은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이다.
서위렴은 1922년 6월 5일 평양에서 선교사이던 윌리엄 얼 쇼(William E. Shaw, 서위렴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양에서 평양외국인학교를 졸업한 그는 1939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웨슬리안대학에 입학하였고, 1943년 동교를 졸업한 후 클라스메이트인 주아니타(Juanita Robinson)와 결혼했다. 제2차 대전이 발발하자 해군 소위로 입대하여 1945년에는 PT정(Patrol Torpedo Boat, 초계어뢰정) 부정장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하였는데, 당시 그가 아이젠하워 사령관과 키크 제독 등을 태운 PT 518정을 직접 운항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은 유명하다.
이렇듯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영웅이었던 서위렴은 전쟁이 끝나자 1946년 9월 해군 중위로 전역하였다. 1947년 한국으로 돌아와서 미 군정청 경제협력청(ECA)에 근무하던 중에, 해안경비대가 창설되자 진해로 내려가서 민간인 신분의 교관으로 항해술과 함정운용술을 가르쳤다. 이렇게 대한민국 해군 창설에 기여한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1950년 2월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하였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에 선교사로 갈 것을 결심하고 라이샤워 교수 밑에서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는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번민하다가, 결국 부모님께 편지로 자기의 심경을 토로했다. "아버님 어머님! 지금 한국 국민이 전쟁 속에 고통당하고 있는데 이를 먼저 돕지 않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평화로운 때에 한국에 선교사로 간다는 것은 제 양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습니다."(I can not be in good conscience in return to Korea as a Christian missionary in peacetime if I am not first willing to be there to help the Koreans defend their freedom in time of war).
그는 가족에 대한 부담감과 학업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자기가 태어나고 자랐으며 부모님이 생활하는 한국에 대한 안타까움, 자기가 한국에서 가르쳤던 해군 생도들에 대한 염려로 인해 번민하는 가운데, 성경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장 13절)란 구절을 묵상하고는 전쟁에 참전키로 결심했다. 7월 12일 그는 가족을 오하이오에 있는 처가에 맡기고 위싱턴으로 날아가 자원입대하였고, 곧바로 해군 대위로 복귀 명령을 받았다.
한국어가 능통하고, 한국 해안의 지리에 밝았던 그는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 직속의 정보장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수행할 때 기함인 맥킨리(Mount Mckinley) 함상에서 맥아더 사령관을 곁에서 보좌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4일 밤 그는 자신이 어린 시절에 송도에서 헤엄을 쳐서 건너던 무의도가 보이는 인천 앞 바다의 매킨리 함상에서 부모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지금 우리는 고향 땅 가까이에 있습니다. … 저와 원일한(Horace Grant Underwood, 1917-2004)은 함대 선단에서 서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 이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우리에게 미치도록 기도하는 일 뿐입니다.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어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고, 또 주님께서는 저에게 이런 평안을 주고 계십니다."
다음 날인 9월 15일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었다. 유엔군은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인천에 상륙하여 6.25전쟁의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켰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리에 마치자 그는 서울 탈환작전에 참가를 자원했다. 이에 맥아더 사령관은 현장에서 해병대로 전과를 승인하였고 미 해병 제1사단 5연대에 배속되었다.
서위렴과 원일한이 소속된 미 해병 5연대는 인천에 상륙한지 3일 후부터 서울탈환작전에 들어갔다. 김포를 거쳐서 20일에 행주산성에 이르는 한강 도하에 성공하였다. 서울 탈환을 목표로 연희동 능선에서 인민군을 격멸하고, 안산 - 백련산 능선을 넘어 중앙청으로 진격을 시도하였다. 원일한은 2대대 소속이었고, 서위렴은 3대대 소속이었는데, 녹번리 216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다가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인민군 부대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이에 중대장 맥믈린은 측면 타격을 위해 매복자 색출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서위렴 대위를 순찰대에 포함했다.
22일 아침 정찰을 목적으로 녹번리에 접근하는 순간,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북한군의 매복조에 저격당하고 말았다. 피아 간의 총격은 2시간이나 계속되었으며 지원부대가 도착하여 적들을 제압하고, 6명의 해병대 구조대가 길 위에 쓰러진 서위렴 대위를 구조했을 때는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 숨진 상태였다. 서울 탈환을 1주일 앞두고 장렬하게 산화한 것이다.
서위렴 대위의 전사 소식은 부산의 미 8군 군목으로 있던 서위렴 1세에게 전해졌다. 아버지 서위렴 선교사는 한강이 보이는 김포공항 근처에 매장된 아들의 무덤을 찾은 후 마포구 양화진에 있는 외국인 선교사 묘원으로 이장하였다. 그의 묘비명에는 "Greater love has no one than this, that he laydown his life for his friends. John 15:13"라는 성경 말씀을 새겼다. 1956년 9월 22일 서위렴 대위의 6주기를 맞아서 그가 전사한 녹번리 냉정골에는 전사자들을 기리는 기념비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그후 이곳에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서위렴 대위의 전사기념비는 더 이상 보존이 어려웠다. 이때 서위렴 대위의 해안경비대 교관 시절의 제자이면서, 사적으로는 동년배의 친구로 지내던 두 사람이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2001년 10월 20일에 응암동의 어린이놀이터로 옮겨서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연 때문에 검은 대리석 비를 바치고 있는 흰 화강암 좌대에는 “쇼 선생의 숭고한 한국 사랑과 거룩한 희생을 추모하며 이 좌대석을 바칩니다”라는 헌사와 함께 ‘제자이자 친구인 해군사관학교 제2기생 이동극 이완용’이라고 새겨졌다.
필자는 2021년 6월 26일 오후 은평평화공원에 자리한 서위렴 대위의 동상을 찾았다.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 준 사람은 노재동(79) 전 은평구청장이었다. 은평구청장으로 재임하던 2008년 6월 이성호(5대), 함명수(7대), 김영관(8대), 안병태(20대) 제독 등의 역대 해군 참모총장들로부터 응암동 어린이놀이터에 방치되어 있는 서위렴(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추모비를 제대로 보존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에 기념비를 은평평화공원으로 옮기고, 그 옆에 서위렴 대위 동상을 세운 장본인이다.
노재동 구청장의 노력으로 세워진 서위렴 대위 동상에는 귀중한 어록들이 새겨져 있어서 그의 인간됨을 알게 한다.
그가 전사하기 1주일 전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한국 해군 PC-703함장 이성호 중령(후에 제5대 해군참모총장)과 나눈 대화에서 “나도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한국 사람입니다. 내 조국에서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하게 공부만 하겠어요. 내 조국에 평화가 온 다음에 공부해도 늦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한국은 그의 조국이었다. 서위렴은 평소 한국을 ‘Home'이라고 부를 정도로 한국을 사랑했던 진정한 ‘한국인’이었다.
동상의 좌대 뒷면에는 그의 가계도가 그려져 있다. 이 가계도를 보면 서위렴 일가의 한국 사랑과 서위렴 대위가 못다 이룬 한국 사랑을 그의 가족들이 대를 이어 실천한 사실을 한 눈에 알 수가 있다. '윌리엄 쇼' 집안의 연구자인 윤희중 목원대 명예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이들의 한국 사랑은 글로써 표현하기에는 부적절할만큼 대단하다.
가계도의 첫 머리에는 그의 부친 윌리엄 얼 쇼(William E. Shaw)와 모친 아델린 해밀턴 쇼(Adelin Hamilton Shaw)가 등장한다. 1921년 한국에 온 윌리엄 얼 쇼는 평양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광성학교 교목을 지냈으며, 해방 후에는 미 8군의 군목이 되어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그는 국군에 군종제도를 처음 도입하게 한 선교사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대전 목원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다가 1961년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1967년 10월 5일 사망하였는데, 유해는 고인의 유언에 따라 아들이 묻혀 있는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모친 아델린 해밀턴 쇼(Adelin Hamilton Shaw)는 1919년 7월 2일 서위렴 1세와 결혼하였고, 1921년 남편과 함께 한국으로 온 후에 선교사, 교사로 평양·서울·대전에서 활동하였다. 1971년 5월 8일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하였으며 역시 양화진에 있는 남편과 아들 옆에 안장되었다.
그의 부인 주아니타(Juanita Robinson Shaw)는 1956년 두 아들과 서울로 돌아와 외국인학교 교사로 봉사하였고, 1963년 사회사업학을 전공하여 석사학위(Case Western U)를 취득한 후 이화여대 사회사업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한편 세브란스병원에 의료사회봉사과를 만들어서 봉사활동에 앞장섰다. 1968년 한국을 떠난 후 오하이오에 살면서 사회사업에 종사하다가 은퇴했다. 양화진의 남편 묘역(Section F-6) 옆에 그녀의 묘역(F-5)이 예약되었다.
큰 아들 윌리엄 로빈손 쇼(William Robinson Shaw)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하버드대학에서 라이샤워 교수 밑에서 ‘아시아 역사와 언어’로 박사 학위를 받고, 1981년부터 풀브라이트와 덴포스 장학재단 책임자로 한국에 근무하면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초빙 교수로 재직하였다. 특히 그는 <유교국가에서 법의 기준>과 <한국의 인권> 등의 저서를 출간했다. 1993년 심장질환으로 별세하였다.
큰 자부 캐롤 쇼(Carole Cameron Shaw)는 미국에서 작가로 활동하면서 많은 저서와 논문을 남겼다. 특히 1999년워싱톤에 있는 한국대사관 기록보관소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국내 학자들은 접근할 수 없는 중요한 자료들을 토대로 한국의 근대사 연구에 매우 소중한 저서 ‘The Foreign Destruction of Korea Independence'를 서울대 출판부에서 영문으로 출판하여 학계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둘째 아들 스테반 쇼(Stephen R. Shaw)는 1949년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1967년 서울외국인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국에서 자랐다. 오하이오주 법원 판사로 재직하면서 모친 주아니타 여사를 가까이에서 돕고 있다. 서위렴 집안의 한국 사랑은 4대째로 이어져 로빈손과 캐롤의 딸 줄리는 1990년부터 4년 간 오산 공군기지에서 장교로 근무하였고, 아들 데이비드는 1995년 서울에 살면서 'Yonsei Medical School' 의 편집자로 근무하였다고 한다.
필자가 윤희중 교수를 통해 확인한 바에 의하면, 2016년 10월 물리학자인 윤 교수가 미국에 학회 참석하러 갔다가 오하이오주 라이마시에 있는 스티븐 쇼의 집을 방문하고 주아니타 여사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로부터 3개월 후인 2017년 1월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의 매장법이 바뀌어서 남편 곁에 묻히지 못하고, 오하이오의 공원에 묻혔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한국인 친구들은 양화진의 쇼 가족 묘원(F7-8, F-6)에 모여 주나니타 여사 추도예배를 드렸다.(윤희중,「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분」 http://www.heejy.site/ 참조)
한편 서위렴 대위의 자취는 그의 부친 윌리엄 얼 쇼가 학교 설립에 기여하고 교수로 근무하던 대전 목원대학교에도 남아 있다. 서위렴 대위의 전사 소식이 알려지자 졸지에 외아들을 잃은 부친 윌리엄 얼 쇼 선교사를 위로하고 그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기념하기 위하여 미국의 고향과 교회에서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5,955명이 뜻을 모아 14,500달러의 성금이 모였고, 그 돈으로 1957년 부활절에 대전 목산(현 목원대학교 부지) 언덕에 ‘해밀턴 쇼 기념예배당’이 준공되었다.
이렇게 서위렴 일가는 하나 같이 한국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서위렴 대위는 6.25전쟁 중에 일찍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못다 이룬 한국 사랑은 남은 가족에 의해 4대에 걸쳐 '한국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고 말한 헐버트처럼 뼛 속까지 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이었다.
19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 민주화운동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반미주의는 기독교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로 인해 미국인 선교사들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서들이 다수 출간되었다. 그 결과로 지금은 미국인 선교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팽배해 있다. 그러나 서위렴 대위처럼 생명을 걸고 한국을 지킨 선교사 자녀들이 적지 않았다.
1895년 4월 5일 한국에 들어 온 최초의 선교사로 연세대학교를 설립한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 1916) 집안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3명의 손자가 모두 재입대하였고, 이 가운데 원일한은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어 서울탈환작전까지 서위렴 대위와 동행하였다.
또 한남대학교를 설립한 윌리엄 린튼(William Alderman Linton, 1891-1960)의 아들 휴 린튼(Hugh MacIntyre Linton, 1926-1984)은 1926년 한국 군산에서 태어났다. 미 해병 대위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였고, 종전 후에는 전남 순천에 머무르면서 교육선교와 의료 봉사에 매진하면서 결핵 퇴치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리고 평양신학교를 설립한 새뮤얼 오스틴 마펫(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 선교사의 아들인 하워드 마펫(Howaed Moffett, 1917-2013)은 한국전쟁 당시 공군 군의관으로 참전한 후 종전이 되자, 대구 계명대학교 동산병원에 근무하면서 45년동안 고아와 미망인을 위한 무료 진료를 실시하는 등 의료와 구호활동에 앞장섰다.
2021년 6월 26일 윌리엄 쇼(서위렴) 대위의 자취를 찾아 은평평화공원을 방문하였던 필자는 밤 새워 글을 쓰면서 그동안 몰랐던 '쇼 일가'가 남긴 행적들을 살피는 가운데 절로 감사의 마음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서 27일 오후 다시 그곳을 찾아 서위렴 대위 동상 앞에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왜 사랑하는 가족과 희망에 찬 미래를 내려놓고 한국전쟁에 참전했나요?" "도대체 당신에게 한국인은 어떤 존재였나요?"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을 생각할 때, 부끄러운 심정으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김형석 목사(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사)대한민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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