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 들어서기 바쁘게 장군의 한국인 부인이 오렌지 주스 잔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잔을 들고 앉아서 기도를 하고 얼굴을 드니 부인은 얼른 마시라고 손으로 마시는 시늉을 했다. 내가 한 모금 마시는데, 장군이 말문을 열었다.
"닥터 고, 수지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받았는데, 벌써 그렇게 되었나요? 아이들은 참 빨리 자라네."
내가 그의 얼굴을 보며, "아이들은 빨리 자라고 우리는 빨리 늙고 그렇지요. 뭐"라고 대답을 했다.
그는 "말도 말아요. 나 늙는 거 봐요"라고 하며 미소를 지었다.
부인이, "그래도 이 양반을 세상이 잊지는 않았어요. 백악관에 갈 일이 생길 거 같아요. 최고훈장인 명예훈장을 심사한다는 연락이 왔어요"라며 환하게 자랑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원래 월남전쟁 중에 그게 상신이 된 건데 윗사람 누군가 날 질투해서 은성무공훈장으로 강등해서 주길래 받았는데, 이제 늦게나마 주려나 봐요"라고 그가 설명했다.
내가 "적과 싸우는 전장에도 정치와 술수가 있나 봐요?"라고 하니, 그가 "일부 정치에 빌붙는 군인들이 있지요"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백악관에 가서 최고훈장을 받으시면 군인으로서 보람이 있겠습니다"라고 좀 아첨기를 섞어서 말을 띄우니, 그는 무표정하게 "백악관엔 안 가요. 좌파 바이든에게서 받을 생각은 없어요. 내 나이가 몇인데 그런 것에 연연하겠어요. 군인은 전장에서 죽어야 하는데.... 전쟁이 무엇인지 모르는 펜대 잡은 인간들이 뭘 주느니 마느니.... 그것도 이 나라를 말아먹고 있는 좌파 우두머리가.... 주고 싶으면 지네들이 여기 와서 주던지"라며 받았다.
난 웃으면서, "대통령이 인디애나주의 한 지방에 찾아와서 최고훈장을 수여한다면 그게 장군에게 더 영광스럽겠는데요"라고 추임새를 넣었다.
부인이, "우린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저 이가 육군 명예의 전당에 전쟁영웅으로 헌정된 거로 만족해요"라며 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인이 한인이라서 우리의 이야기는 영어와 한국어가 엉키고 설킬 때가 있었다.
"장군, 지금도 부인께 충성을 다 하세요?"
그가 두 손을 합장하면서 말했다. "내 밑에는 부하들이 있었고 내 위에는 저 사람이 있었지요. 지금은 부하는 없이 상관만 모시고 살아요. 이 집에서는 내가 졸병이지요."
그는 익살을 떨었다.
"하하하."
전쟁영웅이 아내에게 설설 기는 그들의 삶을 아는 나는 크게 웃었다.
"난 이제 주님께 갈래요. 그러면 저 이는 예쁜 미국 여자랑 아기자기하게 살 게 되겠죠."
"장군, 부인께서 왜 저러세요?"
"글쎄 말이에요. 내가 뭘 잘못했나? 그런 건 없는 거 같은데...."
"부인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 좀 배신행위 아닌가요?"
"닥터 고, 바로 그게 내 말이요. 자주 좀 와요! 요샌 저 소리를 자주 하니 내가 염려가 되어요."
"부인, 남편을 다 부려먹고 이제 나이 많고 병들었는데, 미국 여자에게 주신다고요? 미국 여자가 무슨 재미로 살겠어요?"
"닥터 고, 맞아요. 저 사람이 내가 알래스카 왕게 게다리인지 날 쪽쪽 다 빨아먹고 버리려는 수작인 거 같아요. 한인교회 섬긴다고 내가 늘 따라가서 우둑하니 기다렸고, 중국에 성경 가지고 가서 퍼뜨린다고 해서 몇 년을 내가 수발을 다 했고, 신학공부하고 싶다고 해서 다 받들었고 나중에는 미술공부하고 싶다고 해서 뒷받침 다 했고, 육십 년을 충성으로 섬겼는데 이제 나를 버리겠다니...."
"장군, 너무 순진하셨어요. 전 그래서 한국 여자랑 결혼을 안 했습니다. 한국 여자들 무서워요."
"닥터 고, 말도 말아요. 난 베트콩들은 넘어오는 대로 섬멸했지만, 한국 여자 하나에 짓눌려서 이렇게 폐인이 되어버렸어요."
"호호호. 과장이 심하시네요. 설마 내가 베트콩보다 셀까 뭐."
"하니(여보), 당신이 눈을 부릅뜨면 내가 쥐구멍 찾고 그런 거 생각해 봐요."
"호호호, 호호. 우리 집에 쥐구멍이 어디 있어요? 참, 내."
"부인, 어쨌거나 그런 말씀은 38년 된 고물차를 조카딸에게 주고 아기자기하게 운행하라는 것과 진배없으니 그만두시지요. 하하하."
"여보, 닥터 고의 말을 새겨들어요. 난 지금 고장 난 트럭이라고."
"아이고, 알았어요. 내가 수리해 줄게요."
"닥터 고, 한국이 이거 김정은이 밥이 되는 거 같은데 당신 생각은 어때요?"
그가 화제를 바꾸었다.
"뭐, 어려운 일들이 터질지도 모릅니다."
"난 저 사람 때문에도 그렇고, 내가 한국에서 복무도 해서 그렇고 또 군인이니 당연히 공산주의를 싫어해서도 그렇고, 해서 한국 관련 뉴스는 빼놓지 않고 봐요. 지금은 하루 종일 TV 앞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그런데 한국이 어째 심상치 않아요."
"어떤 면에서 그렇다고 보십니까?"
"닥터 고, 당신 같은 애국자가 그걸 나에게 물어요? 현 정권이 여론조작으로 선거를 치렀다는데 야당이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국민들도 무심한 거 같고. 이건 심상치 않은 조짐이요. 그리고 간첩단이 체포되었다는데, 우리가 여기에서 보기에는 한국에는 북한과 중국의 간첩들이 우글우글합니다."
"글쎄요, 뭐, 내년 대선에서 정권을 우파가 탈환하면 달라지겠지요. 뭐."
그때 부인이 거들며 나섰다.
"내년 대선에서 이길 수 있는 야권 주자들이 없어요."
미국에 있는 한인들은 한국 TV를 주야로 시청하니 최신 소식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닥터 고."
"네, 장군."
"그 말요, 한국은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 없이 휴전선을 약화시키고 군대를 너무 줄이고 있어요. 베트남(월남)이 왜 망한 줄 알아요? 적이 강해서가 아니요. 월남에 미국이 퍼부은 경제지원과 전쟁물자가 얼마요? 한국군도 월남전에서 신화를 이루었지요. 월등한 전력과 국제지원 속에서도 월남 정부가 자기 나라를 견고하게 지키려는 애국심을 유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를 빼앗긴 거지요."
"네...."
"김정은이와 그 여동생이 한마디 하면, 한국 정부와 여당 국회의원들과 대통령이 일사불란하게 그 말에 보조를 맞추는 건 비극이고 국가적 참극을 예약하는 일이요. 이에 반항하는 여당이나 국민이 없는 것이 바로 그 예약을 확인해 주는 거고요."
"저도 그게 걱정입니다만."
부인이, "왜 주스를 안 드세요?"라며 긴장을 누그러뜨렸다.
"네. 설탕이 좀 많이 든 거 같아서요."
"닥터 고, 설탕을 가려야 하는가요?"
"네. 그렇게 되었습니다."
"음. 운동을 좀 하면 되어요. 운동을 하세요."
"네, 그러려고 하는데 작심삼일입니다."
"건강을 잘 챙겨서 나라의 위기가 닥치면 그때 쓰세요, 닥터 고."
난 머쓱해져서 탁자 위의 주스 잔을 붙들고 있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매일 한국의 안보를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해요."
부인이 간절하게 말했다.
"군대가 문제야."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군이 뭉그러지는데도 군이 아무 말 없이 정치꾼들에게 놀아나면 나라가 절단 나요. 한국인들은 순신 리 장군을 추앙하지만, 순신 리 같이 행동하진 않아요."
부인이 거들었다.
"이순신 장군? 흥, 국방부 장관이란 것들이 어린 애 같은 적국의 독재자 김정은에게 머리 조아리고 자기 나라를 군사적으로 불리하게 하는 협정이나 맺고, 합참의장이니 총사령관이니 다 제 한 목숨, 제 밥벌이에 매달렸는데 어떻게 이순신이 나와요?"
"흠. 대통령이 국방안보에 대해서 잘못하면 직언하고 간언해야 하는 군 수뇌부가 이리저리 휘둘리고. 군이 무너지면 국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안 그래요? 닥터 고?"
"네. 그렇습니다."
"한국이 미군이 철수한 아프가니스탄처럼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미군이 떠나자마자 아프가니스탄의 지방 거점들은 모두 탈레반이 신속하게 점령해 버렸고 결국 아프간 정부가 항복하고 대통령은 엄청나게 많은 달러 보따리를 싣고 남기고 하며 외국으로 망명해 버렸지요. 미국이 천문학적으로 달러(한화 97조 원 상당)를 투입해서 강군으로 육성했다는 아프간 정부군은 장난감 병정들처럼 무너졌어요. 부패하고 싸울 의지가 없으니 그냥 도망치고 투항하고 패배했지요. 나라를 버리고 탈출했던 월남 피란민들의 아비규환이 카불의 아프간 공항에서도 재현되었어요."
"네. 우리 눈앞에 그 비극이 현실로 나타나니 우리나라 한국이 더 염려스럽습니다."
"한국 안의 종북, 종중국파들이 한국을 무너뜨리고 있다면 여당은 결사항전을 해서 국민과 국군을 하나로 단결시켜야 해요. 국방은 장난이 아니요. 경제는 무너져도 일으킬 수 있지만, 국가는 한 번 빼앗기면 다시 회복할 수 없어요. 닥터 고. 모쪼록 한국인들이 국방을 완벽하게 하지 않으면 죽음만이 있다는 것을 알도록 알리세요."
"네."
대답은 했으나 나는 맥이 빠졌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장군 부부는 나를 배웅하러 나왔다. 마당에는 미국 국기가 게양대 꼭대기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이 이는 매일 성조기에 경례하고 아침을 시작하고 또 그렇게 하고 저녁을 먹어요."
"게양대가 굵고 튼튼한데요. 스테인리스 스틸인가요? 알루미늄인가요?"
"모르겠는데. 게양대만 전문으로 세우는 회사가 박아 놓은 거니까. 제가 돈 좀 썼지요. 나라가 나에게 해 준 것을 내가 나라에 해 준 것이 앞지르기 시작하는 그 점이 되어야 애국의 시발점이 되는 거예요."
작별 인사를 하고 나와서 나는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내가 나라를 위해서 하는 것이 나라가 나를 위해서 해준 것보다 많아지는 시점이 애국의 시발점이라.... 그렇다면 나는 어느 시점에 와 있는가? 한국 우파는 어느 시점에 있는가? 야당은 어느 지점에 있는가? 국군은 어디에서 헤매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