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김리교회 김기석 목사가 지난 1일 주일예배 설교를 통해 안식을 논쟁을 다루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종교적 계율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상기시켰다. 김 목사는 ‘덫인 줄 알면서도’(누가복음 6:6-11)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먼저 안식일의 뜻을 살폈다.
김 목사에 따르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렛날에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창2:3)고 말한다. 또 안식일을 뜻하는 히브리어 ‘샤배쓰’(shabath)의 기본적 의미는 ‘멈추다’, ‘쉬다’는 뜻이었다.
김 목사는 “물론 일을 멈추고 빈둥거리는 게 곧 안식은 아니다. 히브리의 지혜자들은 안식일은 일에 몰두하느라 잠시 잊고 지내던 근본을 회복하는 날이라고 말한다”며 “인간과 세계의 조화를 깊이 자각하고, 우리 삶을 하나님 뜻에 따라 조율하는 것이 진정한 안식이다. 아브라함 헤셸은 안식일의 거룩함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은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는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미친 듯이 질주하던 삶에서 벗어나, 우리 영혼 속에 심겨진 아름다운 것을 가꾸어야 할 때이다”라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기 위해 ‘밭에 숨겨놓은 보물’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사실 그 보물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도 있는 것이다. 사랑, 친절, 온유, 자비, 공감, 경외심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보물을 바깥에서만 찾는다. 어거스틴도 <고백록>에서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한 바 있다”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이처럼 밝히고 있다. “흔히 사람들은 높은 산봉우리, 망망한 바다의 물결, 넓은 강의 흐름, 끝없는 대양, 별의 운행을 구경하러 여행을 떠납니다만 자신들에 대해선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성아구스띤, <고백록> 10권 8장, 최민순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p.263)
김 목사는 “이 구절은 14세기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인문주의자인 페트라르카(1304-1374)를 통해서도 많이 알려진 바 있다”고 했다. 그는 “어느 날 그는 동생과 함께 오른 방투산에서 대자연의 파노라마에 취해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늘 가지고 다니던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꺼내 읽다가 앞에서 말씀드린 구절과 만났던 것”이라고 했다.
김 목사는 “그는 부지런히 살면서도 정작 자기의 내면을 살피는 일을 잊고 살았음을 자각했다. 이후에 그의 글과 생각은 확연히 달라졌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르네상스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본다. 우리도 속에 있는 보물을 본체 만체 하고 밖의 보물만 찾느라 고단한 것은 아닌가? 안식으로의 초대는 우리 삶의 근원을 돌아보라는 부름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예수의 안식일 논쟁을 조명했다. 김 목사는 “안식일은 성전과 더불어 유대인들의 정체성의 두 기둥이었다”고 했다. 하루는 예수님 일행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게 되었는데 시장했던 제자들은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 일종의 밀 서리를 한 셈이었다.
이에 대해 김 목사는 그러나 “당시 문화에서 그것은 지탄을 받을만한 행위는 아니었다”고 했다. 단지 문제는 그 날이 마침 안식일이었다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김 목사는 “그 광경을 본 바리새파 사람들이 “어찌하여 당신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라고 항의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다닐 때 일어났던 일을 환기시킨다. 다윗은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가서 거룩한 떡(showbread, 진설병)을 얻어먹었습니다(삼상21:1-6). 거룩한 떡은 안식일마다 새로운 것으로 바꿔 올린 후, 물려낸 것은 제사장들의 음식이 되었다. 전통은 지켜져야 하지만, 비상한 상황에서는 전통을 어길 수도 있어야 한다. 무슬림들은 금식월인 라마단 기간 중에도 노약자나 임산부, 환자, 여행객들은 금식 의무를 면제해준다고 한다. 종교적 계율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 근본적 사실을 지적하신 후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다. 충격적인 말이었다. 보통의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믿었을 테니 말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또 다른 안식일에 주님은 회당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 자리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특별히 ‘오른손’을 언급한 것은 그가 처한 곤경의 심각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라며 “왼손잡이들도 많지만, 성경에서 오른쪽은 하나님의 도움이 오는 방향으로 여겨졌다. 오른손이 오그라들었다는 말은 신체적 장애를 안고 산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가 사회적으로도 좀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여겨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회당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에게 관심을 보이실 것임을 알고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지 엿보고 있었다. 그를 고발할 구실을 찾기 위해서였다. 탐색하는 듯한 그들의 눈빛을 연상해 보라. 그들은 토라와 예언서의 전문가를 자처하면서도 오른손 마른 사람에 대해 어떤 연대감도 보이질 않을 뿐 아니라, 그의 쓰라림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율법 조문이지 구체적인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아픔을 헤아리고, 그가 설 땅을 마련해주고, 그가 회복되도록 돕는 것은 그들의 관심이 아니었다. 그 오른손 마른 사람은 자기들의 해박한 신학 지식을 드러내는데 필요한 부정적 예였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김 목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주님은 그들의 속마음을 다 읽고 계셨습니다. 전문가를 자처하고 있지만, 그들 속에는 정작 있어야 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아니 잘 알기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가운데 서라.’ 그는 더 이상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저주받은 자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속 생각을 드러내는 깃발처럼 그는 회당 한복판에 우뚝 섰습니다. 긴장이 고조되었을 것입니다. 투명 인간 취급을 받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낼 때 사람들은 긴장합니다.”
김 목사는 이어 “그때 주님은 지도자라 하는 사람들을 향해 질문을 던지신다. ‘너희에게 물어 보겠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건지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6:9) 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라며 “답을 몰라서가 아니다. 답을 하는 순간 예수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착한 일을 하는 것, 생명을 살리는 것이야말로 안식일의 본뜻이 아니겠는가?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자기들이 오히려 자기들이 판 함정에 빠진 격이다”라고 했다.
아울러 “똑같은 이야기를 다룬 마태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신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다고 하자. 그것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그것을 잡아 끌어올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마12:11) 그러면서 주님은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고 말씀하신다. 같은 사건을 다룬 마가복음 본문은 주님의 질문에 묵묵부답인 사람들을 보며 예수님이 노하셨다고 전한다(막3:5).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보셨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김 목사는 또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며 “아테네 법정이 소크라테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까닭은 세 가지였다.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것, 국가가 인정한 신을 부정한다는 것, 다른 새로운 영적인 것 즉 그가 다이몬이라 한 것을 도입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지도자들의 허위의식을 폭로했기 때문에 괘씸죄에 걸렸다고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자기가 쓰고 있던 허위의식의 가면이 벗겨질 때 사람들은 불같이 화를 낸다. 뭐가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수긍했더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굳어진 마음에는 탄력이 없다. 돌이키기 어렵다는 말이다. 출애굽 당시에 일어난 재앙 이야기에서 사람들을 당혹시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强愎)하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그 말은 하나님의 의지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라 바로의 굳어진 마음은 새로움을 받아들일 여지가 없었다는 뜻으로 새겨야 한다”고 했다.
김 목사에 따르면 소위 율법 전문가들은 회당에서 손이 오므라진 사람이 회복되는 광경을 보고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죄인이란 온통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존재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함께 기뻐할 능력이 없다.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구겨진 자기들의 자존심뿐이다. 전문가라는 자기들의 허위의식을 폭로한 예수의 말과 행동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화가 잔뜩 나서,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했다. 마가복음은 이 이야기를 훨씬 더 정치적으로 해석한다. 마가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바깥으로 나가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했다(막3:6)고 전한다. 악한 이들의 공모는 이렇게 단단하다. 자기가 누리던 사회적 지위와 위신을 지키기 위해서 못할 일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김 목사는 그러면서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주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그 불순한 의도를 뻔히 아시면서도 왜 그 자리를 회피하지 않으셨을까? 사람들의 말대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는 일이 촌음을 다투는 일도 아니니 말이다”라며 “주님은 적대자들을 말로 설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셨을까?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기적을 보면 그들의 태도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셨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주님은 누구보다 인간의 복잡성을 잘 알고 계셨다”고 했다.
주님의 처신이 다소 위험했다고도 재차 강조했다. 김 목사는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당신의 뜻을 펼치셨더라면 좋았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주님은 아무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진실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만들 생각이 없었다. 신변 안전을 최우선의 관심으로 삼았더라면 주님은 그들과 제휴하는 길을 모색하셨을 것이다”라며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안전이 아니라 진리다. 그 때문에 주님은 그것이 함정인 줄 알면서도 터벅터벅 그 덫 속으로 걸어 들어가셨다. 잔뜩 주눅이 들어 살고있는 오른손 마른 사람에게 삶의 희망을 돌려주기 위해 주님은 위험을 무릅쓰셨다”고 했다.
끝으로 김 목사는 “본문은 숨어서 엿보는 이들과 사람들의 한복판에서 숨김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예수님을 나란히 보여준다”며 “누가 빛인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현장이었다. 전문가들의 적대감은 깊어졌을지라도 침묵하고 있던 다수는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를 느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라는 법이다. 취약한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기꺼이 모험에 뛰어들고, 그 결과는 사랑으로 감내하는 것, 바로 그것이 주님이 보여주신 삶이다. 고통받는 사람을 가슴에 품고 뜨거운 사랑으로 보살피시는 예수님의 삶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본다. 주님이 앞서가신 그 길을 따라 걸을 때 우리도 어둠을 찢고 빛을 낳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 아름다운 소명을 가슴에 새기고 살 때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