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훈 교수의 성경 에세이] 그리스도인의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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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제공
교회가 소란스럽습니다. 교회가 2개의 진영으로 정치공학에 비례해 나뉘었습니다. 한 쪽은 예배당 출석 예배만이 진정한 예배라고 목청을 높입니다. 다니엘과 주기철 목사님까지 소환되었습니다. 온라인 예배드리는 자들은 "배교자"라는 뜻입니다. 다른 한 쪽은 "온라인 예배"에 집중하며 정부의 정책에 순응하자고 합니다.

저는 이 상황에서 생뚱맞게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성경에 얼마나 무지하며, "예배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성찰에 인색한가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고, 예루살렘 예배만을 인정한 유다의 역사를 살펴봅시다. 역사학의 거장 폴 존슨의 "유대인의 역사"에서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BC 622년에 예루살렘 성전을 보수하던 중 대제사장 힐기야가 고대의 기록을 담은 책을 발견한 뒤 이런 주장은 더욱 힘을 얻었다. 어쩌면 그 책은 모세오경의 원본일 수도 있고, 어쩌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을 제시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을 때 임하는 무서운 저주를 서술한 28장에서 정점에 이르는 신명기서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호세아가 경고한 예언을 확증하고 북왕국이 멸망한 것처럼 남왕국도 멸망할 것을 암시하는 듯한 이 책이 발견되자 공황상태가 야기되었다.

요시야 왕은 자신의 옷을 찢고 전면적인 제의 개혁을 명령했다. 모든 우상은 파괴되고 산당은 폐쇄되고 이교나 이설, 또는 이단 성직자들은 죽임을 당했다. 근본주의식 개혁은 이전까지 예루살렘에서는 한 번도 지키지 않았던 유월절을 국가 절기로 엄숙히 지키는 데서 정점을 찍었다.」

폴 존슨 박사의 해설에 해당하는 본문이 "왕하23:21~23"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린 예배만이 진정한 예배라는 교리가 이 때 확립됩니다. 시간이 흘러 예수님이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오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어디서 예배드려야 진정한 예배인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심산에서 드려야 하는지 아니면 예루살렘인지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뚱맞게 그리심산도 예루살렘도 아니고,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이른다고 답하십니다(요4:20~21).

제가 이재철 목사님의 온라인 예배 강조 유튜브 영상을 비판한 취지는 온라인도 장소의 문제이기 때문에 "온라인"을 강조하면서 이것을 교회의 개혁과 연결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곡해하게 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리심산이냐? 예루살렘이냐?"의 질문이나 "온라인이냐? 예배당이냐?"에서 "온라인"을 강조하는 것이나, 결국 예배 장소에 집착하는 잘못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장소인 "예배당"에 집착하는 것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우상숭배를 거부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린 일과 현재 코로나 시국 한국교회의 예배 논란은 아무런 관련성이 없습니다. 교회의 일부 강경파의 주장을 다니엘에게 적용하면 결과가 예상밖에 이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진정한 예배가 가능하다면, 다니엘은 예배를 드리지 않은 "배교자"가 되겠지요. 다니엘은 "집에서 창문열고 기도했지요" 집에서 창문열고 기도한 다니엘은 배교자입니까? 물론, 바벨론에는 출석할 유대교 성전이 없습니다. 현재 북한에도 예배당이 없습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했으니, 이 논리라면 성전을 복구할때까지 유대인 누구도 예배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유대교도가 아닙니다. 유대교도 지금은 이 교리를 고수하는 랍비나 교파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건물로 우상이 된 성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들의 논리를 교회사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에서 공인되기 전까지, 초기교회 성도들은 어디에서 예배를 드렸을까요? 성도의 가정에 모였습니다. 예배당 예배가 아니니까, 초기 교회는 313년까지 예배드린 적이 없었다고 단정지어도 될까요?

주기철 목사님 사례도 적용해 봅시다. 온라인 예배를 드린 성도들은 신사참배한 "배교자"와 같다고 정죄해야 합니다. 강경투쟁 교회의 성도들 중에 담임목사님이 주관하는 예배에 불출석한 분들은 모두 "배교자"입니까? 그 교회 안에서도 참 성도와 배교자로 성도들이 갈라치기 될까봐 저는 두렵습니다.

이런 것이 일종의 종교적 폭력입니다. 스타벅스 불매를 율법주의에 근거해서 시도하면 스타벅스에서 근무하는 집사님이 성도들의 수군거림에 상처를 받습니다. 개인의 사정도 고려하지 않고, 이 분을 "배교자"로 정죄하시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자주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신학적으로 자신이 담임하는 성도들께 진정한 "예배"에 대해 교육하고 양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도가 아닐까요? 이것이 좌파와 우파, 진영논리로 해결 될 수 있는 문제일까요? 우리 이웃들이 우리를 오해합니다. 초기교회는 근거없이 루머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우리가 오해를 자초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불신자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고, 로마의 지식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정통교회의 신학을 체계화 하였고, 덕분에 로마라는 제국을 기독교가 활용하게 됩니다. 이단의 창궐이라는 위협에서도 정통교회가 승리합니다. 우리는 이런 노력은 제대로 하려고 하지 않고, 이웃과 싸우고, 공무집행하러 온 공무원에게 삿대질하는 것을 영웅시하고 있습니다. 그 공무원은 그냥 위에서 시키는 일을 할 뿐입니다. 운동권들이 시위하다가 자기 또래 전경을 공격하는 것과 유사해보여서 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성도들의 억울한 마음을 제가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송전도 벌였지만, 돌고돌아 10%-20명 미만이라는 "제자리"입니다. 방역정책의 키를 잡고 있는 오세훈 시장은 강경파만큼 강경합니다. 정치적 협상의 가능성은 강경파들이 만드는 정치적 "리스크" 때문에 더 어려워 집니다. 교회방역을 풀어주고, 교회발 "리스크"가 발생하면 야당출신 시장은 여당의 공격과 시민의 분노로 정치적 치명상을 입게 됩니다. 교회 사정에 따른 출석인원 최대화 협상이 아니라, 강경투쟁은 점점 더 교회에도 올무가 됩니다. 이것을 저는 "악순환"이라고 부릅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제가 일하는 대학도 이제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엄중한 현실입니다. 본격적인 가상현실 "메타버스" 시대가 도래합니다. 교회는 이런 시대변화에 아무런 준비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예배의 본질에 대해 깊이 묵상합니다.

이정훈 교수(울산대, 엘정책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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