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을 따라 많은 읍과 마을이 있다. 강 위쪽으로 90리(27마일)를 거슬러 올라가면 강경(Kan gim, 江景)7)이 있고, 동쪽으로 20리 더 가면 놀미(Nolmi)8)가 있는데, 이 두 도성은 이 지방에서는 큰 읍이고 여기서 (5일마다) 장이 열린다. 강을 따라 30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충청남도 수도인 공주(Kong-Joo, 公州)가 있는데 여기서는 매해 2차례 커다란 축제가 열린다. 강을 따라 공주까지 배의 운항이 가능하고, 군산 동쪽 100리 지점에는 전라북도 도청인 전주가 있다.
이 지역에서 군산 북부까지 30리 안쪽과 강 건너편까지 소형 배로 갈 수 있다. 군산 북부 지역과 강 건너편 언덕은 울창한 소나무로 덮여있고 최근에는 석탄층이 발견되었다. 항구 맞은편에는 섬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봄, 여름에 수백 척의 어선이 모여든다. 군산 지역은 땅이 비옥하고 인구가 많으며, 좋은 숲이 있고 날씨는 서울보다 훨씬 온화하며, 번영하는 요새를 건설할 수 있는 요건을 갖췄다.
군산을 중심으로 이 지역의 특징은 들판과 언덕 위에 버려진 사람 시체들이 흩뿌려져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주 시체를 땅에 매장하지 않고 땅 위에 놓고는 약 3피트(약 0.9m) 높이의 짚더미로 덮었다9). 비와 바람으로 짚이 썩고 날아가는 데 오래 걸리지 않고 뼈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시체가 묻히지 않은 채로 남겨진 이러한 광경을, 몇 년 전 전라도 남부에서 동학군과 대한국 군인들 간의 전투 이후 시체를 개와 까마귀를 위해 버려둔 것을 제외하고는 대한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본 적이 없다.
우리는 다음 날(역주: 1899년 2월 20일) 오전 6시에 군산을 떠나 같은 날 저녁 목포에 도착했다. 항구로 접근하는 수로 길은 폭이 약 400야드(약 366m)에 불과하고 조수 물이 시속 9노트(약 17km)의 속도로 밀려들고 나가기 때문에, 작은 증기선은 종종 해류에 의해 밀려 나가기도 한다.
항만 입구 안쪽에는 3개 지역으로 연결되는 커다란 만이 있는데, 북쪽으로는 무안군으로 갈 수 있고, 남쪽으로는 풍요한 해남 계곡으로, 동쪽은 목포로 연결되는 입구가 있다. 항구는 넓고 수심은 매우 깊으며 평균 10파톰(약 18m)이고, 해안에서 100야드(약 91m) 이내의 수심은 9파톰(약 16m)에 달한다. 나는 목포항 개항10) 이전에 이곳을 두 차례 방문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곳곳을 잘 알아볼 수 없도록 많이 변했다.
이러한 급격한 도성의 변화는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이야기의 한 장면과 같다. 2년 전 목포 항구는 물에서 갑작스럽게 솟아오른 넓은 논과 갯벌로 둘러싸여 있는 큰 바위 위에 지어진 몇 채의 오두막뿐이었다. 이제는 모든 허름한 집들이 사라졌고, 갯벌 옆 해변은 지금은 그 길을 따라 새로운 일본인 상점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다. 바위 옆의 해변은 매립되었으며, 이제 세관 창고를 짓고 보트를 싣고 내리기에 충분하다.
목포는 한국에서 유명한 곡강(Kok river, 현 영산강)11) 하구에 위치해 있는데, 그 특징적인 구불구불한 강을 가리켜 아흔아홉 구비 강이라 불린다, 강 위쪽으로 300리를 거슬러 가면 5개의 커다란 도읍이 있다. 즉, 나주(Na-Joo, 羅州), 광주(Quang-Joo, 光州), 능주(Nung-Joo, 綾州), 남평(Nem-Pion, 南平), 화순(Wha-Sung, 和順)이 있으며 모두 10마일(약 16Km) 정도씩 떨어져 있다. 이 도시들 중 나주는 전라남도의 옛 수도이고 광주는 전남의 새 수도이다. 이 도시는 한국에서 가장 땅이 비옥하고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이다.
몇 마일마다 큰 마을과 도읍을 만나게 되고, 논은 수 마일에 걸쳐 뻗어 있고 1년에 2작물을 수확하게 되는데, 보리나 밀, 그리고 벼를 수확한다. 산은 그리 많지 않고 높지도 않으며 도로 사정은 좋다. 쌀, 보리, 콩, 대나무는 물론 그 재료로 만든 모든 물건들, 자생 면화와 식물 재료로 만든 옷, 나무 광택제 등이 전국으로 보내진다. 전신국이 개설된 이후로 수출입이 매일 증가하고 있으며, 해관장 대리인 아모르(Mr. Armor) 씨가 비유적으로 표현했지만, 목포와 서울을 연결하는 철도12)가 건설되면 목포는 머지않아 한국의 상하이가 될 것이라 했다. 항구는 매우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며, 다시 해관장 대리 아모르의 말을 인용하자면 며칠 동안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그는 그 차이를 쉽게 알게 된다고 한다. 여기 목포에는 이미 은행, 보험사, 일본 우체국, 한국 우편국 및 전신국, 정미소가 있다. 소시엔 카이샤(Soshien Kaisha)의 증기선이 이곳에 정기적으로 운항하고 있으며, 올해 봄부터는 니뽄 유센 카이샤(Nippon Yusen Kaisha)의 증기선도 이곳을 경유할 예정이다. 아직까지 외국인 모임에는 로마 가톨릭 선교사 아모르(Armore), 벨씨 부부(Mr. and Mrs. Bell)13), 그리고 오웬(Dr. Owen)14) 의사가 전부15)이다.
우리는 22일16) 아침 목포를 떠났지만 2시간의 항해 후 한국의 또 다른 증기선 ‘현익(Hyenik)’호를 만났고, 그 배가 알려준 정보로는 방금 제주도에서 돌아왔는데 그곳에는 강풍이 불고 있어 화물과 승객을 내릴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사태는 항구 시설이 없을 뿐만 아니라 피항 시설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목포로 되돌아가서 하루 종일 기다려야 했다. 우리는 다시 밤 12시가 돼서야 출항했고, 다음날(역주: 2월 23일) 정오에 제주섬 해안에 도착했다. <계속>
[미주]
7) “충청남도 논산시의 남부에 위치하는 읍이다. 조선 시대에는 평양·대구와 함께 전국 3대 시장의 하나였고 서해안 최대의 수산물 시장이었다.”, 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지명에서 발췌.
8) ‘논산’의 옛 지명이 놀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군산 포구 동쪽 20리라 한다면 1895년 행정구역 개편 이후 옥구군과 임피군의 경계지에서 장시가 열렸던 현 대야면일 것이라고 군산대 구희진 교수는 추정해 자문했다.
9) 이러한 장례 풍습은 전라도 섬 지방에서 볼 수 있던 풍장 또는 초분(草墳)이다. 외국인들이 전하는 사진 등을 본 역자의 생각은 내륙에서 보였던 이러한 장례는 이 시기 동학농민운동 희생자들의 시신을 처리하기 위해 일정 기간 사용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10) 목포항은 1897년 10월 1일 개항되었으며, 1899년 5월 4일에 칙령(勅令) 제15호에 의하여 무안(목포)에는 감리서(監理署)를 두었다. 고종실록 권39.
11) 조선시대 나주군에 곡강면(曲江面)이 있었으나 1914년 나주군 동강면(洞江面)으로 통합되었다. 피터스의 원본에는 이 문장 역시 ‘Kok river’ 대신에 ‘Chang-Po river’라 쓰여 있다. “영산강의 이름은 지역에 따라 남포강·목포강·금강·사호강·곡강으로 불렸다.” 환경부 홈페이지, 우리나라 강 이야기.
12) 목포까지 연결되는 호남선 철도는 1910년 1월 1일 착공해 1914년 1월 22일 개통되었다. 철도청, 한국청도100년사.
13) 유진 벨은 미국 남장로교회에서 제2진으로 파송한 선교사이고, 1895년 4월 9일 오웬과 함께 내한했다. 전남 지역 개척을 위임받고 목포 선교부를 설립하고 교회 개척과 교육 활동에 힘썼다. 이 가문은 4대째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출처: bauri.org
14) 오웬 의사는 1898년 11월 5일에 목포에 도착해 미국남장로교회 선교부에 합류했다. 『the Korean Repository』 , VOL.1, NO.4(1899.3.2.), p.2.
15) Ibid 같은 날짜 리포지터리 기사에 따르면, 당시 목포에는 이미 일본인들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었고, 중국인 약간 명, 그리고 영국인 1명, 미국인 3명, 프랑스인 1명이 있었다.
16) 피터스의 목포 출항을 확인해 주는 기사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Rev. Alex. Kenmure and Mr. A. A, Pieters enroute to Cheiju (Quelpart) spent the day at Mokpo, Feb. 21st.”, 『the Korean Repository』, VOL.1, NO.4(1899.3.2.), p.2.
역자: 리진만(우간다·인도네시아 선교사)
감수: 장서원 박사(서울대 천문우주연구센터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