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전 세계는 문화 막시즘이라는 큰 파도로 인해 극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문화 막시즘은 과거 구소련의 전통적 막시즘처럼 경제를 이데올로기화한 사회혁명보다는 문화로 접근한다. 다문화주의, 젠더 이데올로기, 생태주의라는 아젠다를 통해 나타난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피부로 와 닿는 양태는 LGBTQ라는 다양한 성(性)을 존중하고 가정을 해체하며 문란한 성생활을 강요하는 급진적 성혁명 운동이다. 이런 급진적 성혁명의 목표는 유대-기독교 세계관에 의해 세워진 세계문명을 근본부터 파괴하는 데 있다. 이렇게 파괴된 잿더미 위에 그들은 사회주의 혁명과 유토피아로 재설정(reset)하려 한다.
이런 끔찍한 시도는 기독교 문명에 의해 주도되던 풍요와 자유의 세계를, 극심한 가난과 소수의 노예 생활이라는 옛 봉건시대로 몰아갈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심각성을 공감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정작 이에 대하여 성경적인 명쾌한 진단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이런 차원에서 정일권 교수가 쓴 <문화막시즘의 황혼>의 한 부분은 성경적으로 매우 적절한 진단이라 보기에 부족하지만, 필자가 이해한 방식으로 소개함으로 독자들에게 막시즘을 진단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한다.
먼저 영지주의에 대한 개념을 정리해 보자. 영지주의는 영(靈)과 정신(情神)은 선하고 육과 물질은 악하다는 극단적 이원론에 근거한다. 이 관점을 통해 구약의 창조주 하나님은 물질을 만든 저급한 신으로 본다. 마찬가지로 문화 막시즘도 이 세상을 극단적 이분법으로 본다. 이 이분법에 의해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기독교적 문명은 저급한 물질주의라는 구조 악으로 규정되고, 막시즘적 유토피아를 종말론적 대안(선)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기독교적 문명이 제공한 일부일처제,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법치주의 등이 사람들에게 극심한 피해를 줬다는 피해자 멘탈리티(victim mentality)를 심어주고, 이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르상티망 ressentiment)을 품도록 한다. 피해자 멘텔리티와 증오심에 몰입된 사람들은 자신도 가해자이며, 증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역지사지)을 전혀 못 한다. 어떤 설득에도 귀를 열지 않는다. 단지 세상이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다는 증오만 증폭할 뿐이다.
이런 전제에서 영지주의의 악마성은 정치라는 방식으로 실체를 드러낸다. 오스트리아 출생의 미국 정치철학자 에릭 푀겔린(Eric Voegelin)에 의하면 “독일의 나치즘과 소련 공산주의 운동은 새로운 영지주의 운동”이라 한다(정일권,「막시즘의 황혼」,(CLC,2021),p.92.). 어떻게 나치즘과 소련 공산주의 운동이 영지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현실(기독교적 문명)을 파괴하고 그 위에 전체주의 정치로 천국을 만들 수 있다고 약속하기 때문이다. 나치즘이나 소련 공산주의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그들은 현실 세계를 부정하고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 대중을 끊임없이 희생시키며 완벽한 낙원이 도래할 것이라는 헛된 소망을 두도록 선동한다.
여기서 영지주의 정치종교의 특징이 나타난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종말에 주어질 내세 천국을, 그들은 역사 속에서 지상에 이룩할 수 있다고 믿게 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푀겔린은 막시즘이 영지주의와 그대로 일치하는 이유를 “프로레타리아 독재에 의해 자본주의가 무너진 뒤, 역사 속에서 지상에 완벽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정일권,「막시즘의 황혼」 p.93.). 이런 차원에서 막시즘은 기독교의 내세적 종말론의 희망을, 현세와 역사 속에 실현시키려 한다는 차원에서 그 이단성을 명확히 드러낸다. 그러므로 정일권은 “사회주의는 하나님 없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다”라고 적절하게 지적한다.
막시즘의 심각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막시즘은 하나님 없는 유토피아, 예수님 없는 구원, 내세 없는 현실적인 낙원 건설을 약속한다는 차원에서 “영지주의적 정치종교”요, 이단이라 할 수 있다. 막시즘이 정치종교이기 때문에 막시즘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마치 광신도들과 동일한 반응을 보인다. 그들에겐 합리적 설득이 결코 통하지 않는다. 비록 기독교라는 종교 범주 안에 들어온 사람들(그리스도인)이라도 막시즘에 오염되면 성경을 배격하고 막시즘을 경전화 한다. 기독교에 의해 제공된 자유민주주의와 근대적 자본주의가 준 혜택의 긍정적인 면을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에게 이 모든 것들은 그저 악으로 보일 뿐이며, 오로지 막스가 약속한 이상적인 지상 낙원만 보일 뿐이다. 왜냐하면 막스의 달콤한 속삭임은 내세의 구원보다 현실적이고 육체적이며, 감각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나 그랬던 것처럼 영지주의 종교의 종말은 비참하다. 현실에서 결코 그 약속이 지켜진 적은 없다. 나치즘과 구소련이 보여준 것처럼 끔찍한 대량 학살과 추종자들의 희생, 그리고 극심한 가난과 전인격적 파괴와 비극만 돌아올 뿐이다. 구원은 그들의 기대처럼 결코 현세에 완성되지 않는다.
타락한 이 세상에서는 완전한 유토피아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성경의 가르침은 이 땅은 복음으로 죄인들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 나라가 최대화(카테콘) 되도록 하는 것만 허용된다고 가르친다. 유토피아의 완성은 주님의 재림으로 비로소 완성된다. 이 세상에 지상 낙원이 건설될 수 있다는 선동은 달콤하지만, 진실은 결코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대해야 할 것은 단지 복음을 통해 이 세상의 구원을 최대화시키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인내하는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주님의 재림을 통해 구원이 '내세에' 비로소 완성될 것을 소망한다. 이것이 성경적인 올바른 관점이다.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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