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조직신학회가 지난 28일 오후 8시 월례신학포럼을 온라인 줌을 통해 진행했다. 이날 류재성 박사(서울신대)는 ‘거룩한 삶과 인식: 존 웨슬리와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류 박사는 “ 웨슬리(1703~1791, 감리교 창시자)의 신학적 인식론 안에 있는 거룩한 인식’과 ‘거룩한 삶’의 통합적인 측면, 바로 이 측면을 조명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며 “주된 접근 방식은, 웨슬리의 신학적 인식론이 지닌 ‘이론적 틀’을 연구하기에 적합한 두 가지 모델, 즉 ‘웨슬리 사변형(Wesleyan Quadrilateral)’이나 ‘로크의 경험주의적합리론 체계(Lockean Empiricist-Rationalist Framework)’를 뒤따르지 않고, 단지 필자의 초점에 충실한 모델 한 가지를 취한다. 이 접근방식을 편의상 ‘웨슬리안 기능주의 모델’이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이어 “이 모델에는 두 가지가 포함된다. 하나는 신적인 증언으로서 성경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적인 증언으로서 성도의 삶”이라며 “웨슬리는 이 두 가지 증언들을 가지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설교했고, 그 설교는 단순히 사변적이거나 과학적인 지각의 개연성을 설명하고 입증하는 이론의 설계가 아니라, 인식 주체의 도덕적이며, 영적 변형에 봉사하는 견고한 기초로서 작용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진실한 인식을 얻을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봉사합니다. 이 수단은, 그러나, 단지 인간의 말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드러내시고 자 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증언”이라며 “성서는 하나님의 고유한 자기증언은 웨슬리의 신학적 인식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우선성’을 지닌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성서의 인식론적 우위가, 웨슬리의 신학적 인식론 안에서, 인간의 증언이 지닌 병존(concomitant)적 함의를 배제하진 않는다”며 “웨슬리는 성도의 거룩한 삶이 지닌 인식론적 함의에 관심을 기울인다. 성도의 거룩한 삶을 통해 드러난 인간적 증언(표지)은 웨슬리에게 있어서 우리의 관심을 단순히 이끄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저 증언(표지)이 가리키고 있는 실재, 곧 하나님께로 향하게 한다”고 했다.
이어 “웨슬리가 신적인 증언 만큼이나 인간적인 증언의 인식론적 역할을 강조한 데에는 한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다. 웨슬리는 하나님을 단순히 초월적 일자로 바라보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에게 있어서 ‘아바 아버지’이다”며 “웨슬리의 관점에서, 우리의 신인식은 하나님에 대한 아들의 지식(filial knowledge)이다. 이 지식은 비인격적이거나 추상적이거나, 도덕적으로 무능하지 않다. 그것은, 도리어 인격적이고 구체적이며 도덕적으로 유능하다. 한 마디로 웨슬리의 하나님 지식은 ‘변혁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은 사랑스럽고 순종적인 삶에 대한 헌신으로 우리를 이끌고 들어가, 우리의 살아있는 증언이 하나님 자신의 증언을 반영(echo)할 수 있게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웨슬리는 우리의 인간적인 증언, 곧 성도의 거룩한 삶이 지닌 인식론적 역할이 언제나 그것의 기원인 성서 안에서 재 추적되어야 한다고 덧붙인다”며 “우리는 웨슬리의 신학적 인식론 안에서 매우 독특한 형식의 협력(synergism)을 발견한다. 즉, 웨슬리는 한편으로 성도의 거룩한 삶에서 신인식의 단초를 마련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저 단초를 성서의 개신교적 우위성에 재정향시킨다”고 했다.
류 박사는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1905~1988, 스위스 신학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에게 중개함에 있어서 형상(Gestalt)과 내용(Gehalt)이라는 두 가지 미학적 카테고리를 사용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발타자르에게 형상(Gestalt)이란, 단순한 기표가 아니”라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사항은 두 가지 이다. 첫째, 형상(Gestalt)과 내용(Gehalt)의 관계를 ‘구분’이 아니라 ‘일치’의 차원에서 연결시키고 있는 발타자르의 이 독특한 사유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미학을 전용한 것이다. 또 다른 전용은 아퀴나스의 ‘애착적 인식(apprehensio afectiva)’이며, 발타자르가 저 미학의 아퀴나스적 카테고리를 자신의 신학적 인식론에 사용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논리적으로 뒤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둘째, 아퀴나스의 애착적 인식이란, ‘형상’과 ‘질료’가 ‘일치’하면서 드러난 ‘미’에 응축된 인식의 차원을 의미한다”며 “다시 말해, 그것은 인식의 주체가 어떤 사물을 인식할 때 일어나는 ‘수용’즉, 인식 주체의 인식 대상으로의 ‘애착’ 또는 ‘형상 동화’를 의미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발타자르가 주장한 저 형상(Gestalt)과 내용(Gehalt)의 미학적 카테고리는 그의 신학적 인식론을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가”라며 “발타자르의 저서〈주님의 영광〉에서 발타자르가 자신의 신학적 인식론에서 신인식의 외적 근거(extra nos)로 삼은 ‘그리스도의 형상(Christ’s Form)’과 내적근거(intra nos)로 삼은 ‘그리스도인의 형상(Christian form)’이다”고 했다.
그는 “존 웨슬리와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를 통해 한 가지 사실을 조명할 수 있는 것은 신학적 인식론을 수행하는 기독교 전통의 저 오랜 방식 안에는, 단지 저 지적이고 변증학적인 메커니즘을 세우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학(theoria)과 영성(praxis)의 통합적인 차원도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웨슬리는 이 통합의 측면을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지식이 어떠한 사변이나 추론이 아니라, ‘아들의 지식’이라고 함으로써 우리에게 보여준다. 다시 말해, 그에게 있어서, 신인식은 인식 주체에게 인격적이고, 관계적이며, 도덕적으로 변혁적인 ‘아들의 삶’을 하나의 필요조건으로 요청한다. 발타자르도 마찬가지”라며 “물론 둘 사이에는 커다란 방법론적 차이가 있지만, 발타자르도 웨슬리와 같이 거룩한 인식과 삶의 통합적인 측면을 요청한다. 특히 그의 미학적 카테고리를 통해, 자 아퀴나스의 ‘애착적 인식(apprehensio afectiva)’에 대한 현상학적 풀이로서 발타자르가 제시한 ‘그리스도인의 형상(Christian form)’을 통해, 우리는 그 요청을 확인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만일 우리가 이 두 신학자들에 의해 조명된 신인식의 통합적 차원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지식이 결국 실천을 희생하여 수행될 수 있는 것이 아님도 받아들일 수 있다”며 “거룩한 인식과 삶의 통합을 위한 웨슬리와 발타자르의 비전이 한국 신학교내에서 신학적 인식론을 수행하는 많은 이들에게 ‘성결’을 위한, 성결을 향한 신학문화의 중요성을 재조명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