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것에 재물을 사용하면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것이다.
불의한 재물을 바르게 사용하는 길은 자기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불의한 재물이란 불공평하고 불의가 편재하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나 이 재물 자체는 중립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용권을 위임한 것이다. 인간의 욕심과 지배욕이 작동하게 될 때는 재물은 불의한 방식으로 사용된다. 이 재물은 불의한 재물이 된다. 그러나 이 재물이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섬기는 데 사용되면 재물은 하늘의 무한한 보고(寶庫)가 될 수 있다. 재물의 성격은 사용하는 자에게 달려 있다. 불의한 재물을 의롭게 사용될 때 불의한 재물은 의로운 재물이 된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e)는 독일 사업가인 쉰들러(Oskar Schindler)가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유대인들 집단 처형 가운데서 나치 독일 장교를 돈(뇌물, 불의한 재물)으로 환대하여 자기 편으로 만들어 천 2백 명의 유대인의 생명을 살리는 실화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가 들려주신 불의한 재물에 충성한 자 비유는 쉰들러의 이야기에서 가장 바르게 적중된다.
독일 나치시대에 어디서도 피난처가 없었던 유대인들에게
쉰들러의 공장은 안전이 보장된 유일한 천국으로 통했다.
그 과정에서 쉰들러는 '한 인생 생명의 무한한 가치'에 대해 눈뜨기 시작한다.
그러나 절명의 위기가 곧 닥쳐온다.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모든 유대인은 아우슈비츠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이 내린 것이다.
그때 그는 잠 못이루는 번민 끝에 놀라운 선택을 한다.
수백만 마르크의 돈으로 유대인의 생명을 산 것이다.
'돈'에서 '생명의 고귀함'으로 그의 가치관이 확고하게 전환된 것이다.
무려 1,200명의 유대인이 그를 따라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다.
7개월 후 독일이 항복하자 유대인들은 자유인이 되고 그는 도망자 신세가 된다.
이별의 순간, 유대인들이 금니를 빼서 만든 금반지를 그에게 선물한다.
그 반지에는 탈무드에 나오는 한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누구든지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면 그는 곧 전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Whoever saves one life, saves the world entire)'
쉰들러는 이 글귀를 보고 통곡한다. 그리고 외친다.
'더 구할 수도 있었을 거야, 좀 더 구해 낼 수 있었어.
왜 이 차를 안 팔았지. 최소한 열 명은 구했을텐데.
왜 이 금뱃지를 팔지 못했지. 두 명은 구했을 거야.
최소한 한 명은 더 구할 수 있었어. 그런데 구하지 못했어.....".
그의 통곡은 계속되었다.
쉰들러야 말로 불의한 재물로 죽어가는 수많은 유대인 생명을
구해낸 불의한 재물에 대한 충성가라고 말할 수 있다.
(7) 재물(財物)신(神)과 인격적인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하나님은 재물(돈)에 신기한 능력을 부여하셔서 재물은 인간의 삶 속에서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다. 그래서 예수는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교훈하신다. 돈은 물질이기 때문에 돈을 섬긴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섬기는 것이 된다. 말하자면,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쾌락과 권력을 섬기는 것이 된다. 이기적인 쾌락을 추구하면서 재물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없다, 그리고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은 전적으로 인간이 자기 욕망과 권력과 명예 추구를 버리기를 명하시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돈이나 부(富)가 아니라 돈과 부를 취급하는 인간의 태도다. 성경에는 바른 신앙을 가진 부자들(아브라함, 욥, 다윗, 솔로몬, 아리마대 요셉, 고넬료 등)이 있기 때문이다. 돈이나 재물이나 권력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비극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이것들을 섬김의 대상(물신, 物神)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b)는 예수 말씀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불의한 재물(이웃 착취와 이웃과의 불화)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려는 사람은 재물 섬김과 불의한 행위를 버려야 한다. 돈이나 권력이나 재물은 인간의 목표가 아니라 세상과 하나님을 섬기는 수단이다. 돈이나 재물이나 권력이란 지혜롭게 맡아 관리하고 이웃과 세상과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나님이 맡기신 대부금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평가하는 척도가 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섬긴다면 세상의 부나 권력이나 명예에서 자유로운 참다운 부요(富饒)함을 누릴 수 있다. 우리는 재물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사회적 공의를 이루도록 해야 하고, 재물이 하나님 섬기는데 사용되도록 하는 참된 부요한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8) 비유 해석에 있어서 종말론적 차원(하늘 나라의 영원한 보상을 위해 재물 사용)을 놓지 않아야 한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대한 오늘날 신약학자들의 주석에 있어서 다드(C. H. Dodd)는 미래 준비 민첩성, 키스트메이커(Simon J. Kistemaker)는 즉각적인 상황판단에 중점을 둔다. 이들에 의하면 주인이 자기를 해고하고자 하는데 채무자들에게 빚을 감해주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민접한 대처, 삶의 위기에 대한 상황판단과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포기)하여 대처하는 태도 변화가 비유의 중점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은 미래 준비에 민첩하며 직면하는 위기 속에서 즉각적인 상황판단과 대처를 강조하는 장점이 있으나, 재물을 소외자들과 나누며 천국에 저축하여 하나님과 결산하는 종말론적 차원을 약화시키고 있다.
윌리엄(F. E. Williams)는 윤리경영적 시사를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경영학에서 대리인 이론으로서 위임받은 청지기의 권한을 사용하여 채무자의 빚을 탕감해 준 청지기의 약삭빠름에 대해 주인이 칭찬하였다는 것이다. 이 청지기의 자기를 위한 경영적인 약삭빠름은 오늘날 급속히 변화하는 시대에 필요한 태도이긴 하다. 하지만 사회적 소외자들에 대한 긍휼과 나눔의 정신으로 가난한 자들과 재물을 나누면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계산을 약화시키고 있다.
데릿(D. M. Derett)는 실리와 평판의 관점을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중동문화의 명예와 수치의 관점에서 비유를 해석하는 관점이다. 돈보다는 명예를 중시하는 중동문화에서 주인은 청지기의 탕감으로 자신이 관용하다는 주민들의 평판을 즐겼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출애굽기 22장 25절(“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이 주인이 청지기의 행위를 칭찬한 배경으로 본다. 피츠마이어( J. A. Fitzmyer)는 소작농을 배경으로 하는 부재지주의 경영인으로서 청지지가 탕감한 이자란 청지기의 구전(口錢)로서 그가 사업상 얻어질 자기 몫을 포기하였다고 해석한다. 이 관점은 비유의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점 역시 현세적인 실리와 평판에 치중함으로써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임박성, 재물을 사회적 소외자와 가난한 자들과 나누는 하나님과의 종말론적 결산을 등한시하고 있다.
이 비유의 더 중요한 의미는 임박한 미래 대처, 즉각적인 상황판단, 윤리경영적 시사, 실리와 평판이라기보다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임박성 앞에서 불의한 청지기가 가난한 자들의 빚을 청산하는데 재물을 의롭게 사용함으로써 직무를 지혜롭게 했다는 것이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눅 16:9). 재물이란 각종 탐욕(권력과 뇌물로 인한 부정부패)으로 오염된 것일찌라도 가난한 자들의 구제, 사회적 자선사업, 채무자들의 빚 탕감 등으로 선하게 사용될 때 현세적 삶의 개선과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지속적 배당금이 된다.
재물이란 죽음의 목전에서 더 이상 효용성이 없어진다. 재물은 지나가는 세상과 더불어 없어진다. 재물은 사회적 약자들의 구제 등 선한 용도로 사용될 때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서 지속적인 것으로서 가치성을 발휘할 수 있다. 비유는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의 재물을 빚 진자들의 빚을 탕감시킨 데 사용한 것처럼 이웃의 어려운 처지를 도우는 데 사용하라는 것이다. 이 비유는 불의한 일을 지속하라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직면하여 불의한 행위를 회개하도록 고무한다.
(9) 하나님 나라는 변혁적 정의를 가르친다: 하늘나라의 경영방식은 세상경영방식과 다르다.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 불의한 청지기는 자기가 해고될 것을 알고서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다가 빚을 경감해 주였다. 그런데 주인은 그 불의한 청지기의 일을 지혜로운 경영이라고 칭찬하였다. 이러한 경영은 세상적인 경영에서는 정말 미련한 짓이며, 영구히 퇴출될 경영방식이다.
그런데 하늘나라의 경영은 세상 방식과 다르다. 하늘나라 경영은 채무자들의 빚을 경감해주는 경영이다. 청지기는 채무자들의 빚을 경감해주었다. 불의한 청지기는 해고된 후의 대비로서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을가 생각하여 빚을 감해주는 이기적인 선을 행했다. 예수의 눈으로 볼 때 그 청지기는 사기꾼이다. 그러나 자신의 상황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그의 단호한 행동은 모범적이다. 이 일로 인하여 주인은 채무자로부터 자비하고 관대한 분으로 평가를 받게 되었음으로 주인은 청지기가 지혜롭게 행하였다고 칭찬하였다(8절).
주인은 하늘나라의 경영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그만 선행을 크게 보시고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이를 사용하신다. 조엘 그린은 이 비유를 “하나님 나라의 경제학”(Kingdom Economics)이라고 붙이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충성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호의의 확장에서 증명된다.“ 청지기의 채무자 탕감 목적도 주인의 유익보다는 빚진 자들로부터의 호의를 입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귄다는 것이다. 이웃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이다. “불의한 재물에 충성한 자에게 참된 것을 맡긴다”(눅 16:11)는 의미는 부도덕한 청지기가 가난한 자들과 재물을 나눔으로써 재물을 바르게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의 정의(正義)는 이기적 정의였다. 하지만 주인은 불의한 청지가의 정의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포상해준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변혁적 정의(transforming justice)를 말한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주인은 사랑과 자비의 분이시며 우리의 자그만 이기적 정의 자체도 높혀서 차원 높은 진정한 이타적 정의로 만드시는 분이다. 이기적 정의를 이타적 정의로 높이는 것이 변혁적 정의다. 하나님 나라에는 죄인에도 불구하고 더 큰 은혜로 허물을 덮어시는 초풍성의 은혜 법칙(a law of grace of superabundance)이 지배한다.
하나님 나라의 정의는 분배적 정의가 아니라 변혁적 정의다.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란 나의 행한 대로 그 행위만큼 나의 몫을 보상 받는 정의다. 이것은 세상의 율법적 정의다. 이에 반해서 변혁적 정의(transforming justice)는 하늘나라의 정의로서 세상의 정의보다 질적으로 차원 높은 정의다. 전혀 자격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가난한 자들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었고, 그래서 주인이 관대하고 선한 분이라는 칭찬을 받게 했다는 비의도적 결과만을 가지고 의(義)를 삼아 주시는 하나님의 정의가 바로 변혁적 정의다. 이 하나님의 변혁적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났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듣는 자들로 하여금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직면하여 세상의 불의한 재물을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거주를 위하여 사용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계속)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 상임대표/숭실대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김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