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돈 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목회사회학)가 17일 기윤실(기독교윤리실천운동) 홈페이지에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조 교수는 “바울을 지나면 성경 시대에서 교회사의 시대로 넘어온다. 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유대 그리스도인들과의 단절”이라고 했다.
이어 “ 이 시대부터 기독교는 유대교의 아류가 아니라 전혀 다른 종교를 추구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안식일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라며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그래도 안식일과 그리스도인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 이어진다. 그런데 요한계시록부터는 전혀 다른 개념이 나온다.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던 ‘첫날’의 개념은 사라지고 ‘주의 날’(계1:10), 즉 ‘주일’이라는 개념이 나온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첫날이라는 개념은 유대인들의 안식일(Sabbat)을 기준으로 하는 주간 개념의 한 부분”이라며 “그러나 주의 날(the Lord’s Day)이라는 개념은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예배를 위해서 구별된 날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것은 기독교가 유대교의 영향력을 벗어나 이방 지역으로 퍼져나가며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고, 거꾸로 그러한 상황에서 유대교와의 단절을 통해 세계화의 경향을 더욱 확대해 나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는 변화는 주후 150년경 유스티누스에 의해서 쓰인 제1 변증서에 나오는 ‘일요일’ 명칭”이라며 “일요일은 당시 로마의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쓰인 1주간 중 하루이다. 이는 한국어로도 그 뜻이 명확하게 나타나듯 ‘태양의 날’(the day of the sun)이다. 이는 이방 종교의 배경이 그대로 담겨 있는 명칭이기도 하다. 유스티누스는 그 사회에서 일주일 중 예배를 위해 모일 수 있던 날을 지칭했던 것 같다. 아니, 정확히는 그리스도인들이 정규적으로 모이는 그날의 이름을 당시 사람들이 쓰던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신학화를 하는데, 하나님이 창조의 첫날 빛을 만드셨다는 것, 그리고 부활의 주가 상징하는 빛의 의미를 덧붙였다. 조금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요즘 이야기하는 토착화와 같은 것으로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했다.
이어 “의미 있는 것은 유스티누스는 ‘안식’의 개념은 정죄했다는 점”이라며 “이 부분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당시 박해 가운데 있던 기독교인들이 주일을 안식일로 여겨 쉰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었다. 즉 ‘내가 그리스도인이요’하고 공개적으로 광고하는 일이 된다. 그래서 아마 고육지책으로 주일을 노동을 온전히 쉬는 안식일이 아니라, 따로 시간을 정하여 공동 예배를 드리는 날로 여겼던 것 같다. 그리고 그에 맞는 신학적 작업들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러한 경향에 반전을 이룬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변동(Konstanische Wende)이었다. 321년을 기점으로 기독교는 로마에서 공인되었고, 일요일은 공휴일로 선포되었다. 이후 박해가 사라지고, 오히려 기독교가 국교의 위치로 올라서게 되니 환경은 모두 바뀌었다. 소위 크리스텐덤(Christendom, 기독교가 지배적 세력이 된 영역)이 시작되었다”며 “교회와 국가는 서로 결탁하였다. 이것이 절정을 이룬 때가 카롤루스 대제(Kaiser Karl der grosse) 때이다. 그는 789년 법령으로 일요일을 예배와 휴식을 위한 날로 지정한다. 일요일에는 모든 육체노동이 금지되었다”고 했다.
또한 “기독교 사회를 넘어 기독교 국가가 되었을 때, 예배일로서의 주일은 국가 권력에 기대어 다시 안식일이 되었다”며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부분인데, 그것은 결국 안식일 개념이 율법주의적인 틀 속으로 다시 돌아갔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그 사회가 과거 이스라엘과 같은 신정국가 내지는 국가 공동체와 종교 공동체가 합일된 형태는 아니었지만, 기독교인들이 다수가 되고 나중에 기독교 국가로 발전했을 때 주일은 다시 억압의 형태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고 했다.
조 교수는 “놀라운 것은 종교개혁이 이러한 안식일에 대한 율법주의적 이해를 깼다는 점”이라며 “결국 종교개혁가들은 특정한 날을 거룩하게 지키려는 것, 또는 엄격하게 행위를 통제하려는 것은 복음에 어긋남을 강조한다. 심지어 칼뱅은 그러한 시도를 미신이라 하며 철저히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안식일이 주었던 의미, 즉, 하나님을 기억하며 예배드리는 것,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는 유지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종교개혁의 맥을 잇는다고 할 수 있는 청교도들은 종교개혁가들, 특히 그들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칼뱅과는 다른 입장을 나타냈다”며 “그들은 안식일이 창조 시에 세워진 제도이기에 영구히 지켜져야 할 날로 이해했다. 제7일의 개념이 아니라 제8일의 개념으로 이해하기는 했지만, 이날을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 지켰다. 특히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1648년)에서 이러한 생각은 확고히 드러났다. 그리고 이들은 1677년 의회에서 주일준수법령을 제정했다. 어떤 사람도 이날에는 장사나, 세상적인 노동이나, 정규적인 직업의 일을 할 수 없도록 했다. 심지어 이를 어길 시에는 엄격한 형벌을 내리도록 했다. 이렇게 주일은 다시 안식일의 모양으로 변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국가 권력에 의해 통제되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역사는 우리에게 주일과 안식일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한다. 역사를 돌아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이 지켰던 안식일의 그 엄격함과 복음의 자유를 주장했던 바울의 생각 사이를 오갔다”며 “2천 년의 역사를 이렇게 단순하게 요약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일지 모르지만, 예배일로서의 일요일, 또는 주일은 사회적 변동에 큰 영향을 받았다. 신앙이 권력이 되고 교권이 국가적 권력이 될 때마다 주일은 예배의 날에서 안식의 날로, 아니, 다른 말로 하면 억압의 날로 변하곤 했다”고 했다.
아울러 “한국교회는 어쩌면 청교도들의 엄격함을 따라간 것 같다. 굳이 종교개혁가들의 그 혁명적 생각을 외면하고 청교도들이 국가 권력을 장악했던 한때의 관습에 그 뿌리를 이었다. 물론 그러한 엄격함과 신앙에 대한 절대적 헌신이 한국교회를 순수하게 지켜왔던 것에 대해서는 존경을 표한다”며 “하지만 그것이 율법이 되고 오히려 얽매임인 된다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다. 특히, 기독교가 다수가 아닌 디아스포라 상황에 존재하는 한국교회의 여건들을 살펴보며, 우리가 이때에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숙고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