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에서 성령의 역할은 주로 교회의 선교에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우선 요엘과 다윗에게 말씀한 ‘종말론적 약속의 성취’로서 성령의 역할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초대 공동체가 재림이 임박할 것이라는 기대를 통해 교회 공동체의 신앙적 위기를 극복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유대적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이방인이 중심이 된 헬라적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모두 성령의 지도하에 있어서 차이가 없는 교회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하나의 교회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누가는 이 대목에서 성령께서 복음 선교의 원동력으로 활약하고 계심을 시종일관 증거하고 있습니다.
김호민 - 성령의 권능을 받으라
우리는 사랑의 역설을 안다. 사랑은 항상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진다. 부모 이기는 자식은 있어도,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 더 사랑하기에 져준다. 예수님은 져주는 것을 넘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뛰어넘는 사랑이다. 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내 삶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한 사람은 잔뜩 들고 있던 인생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참된 쉼을 발견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짐을 내려놓는 방법이 아니다. 내 짐을 대신 지어 주실 예수님이다.
조재욱 - 보통의 질문들
많은 나라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인 국제 기독교 행사에서 예배를 인도했던 적이 있다. 같은 팀에 무용수가 있었는데, 무대 위에 앉아 있는 남성 지도자들 앞에서 여성 무용수가 춤을 추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주최 측의 판단으로, 결국 그녀는 무대 밑에서 공연을 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데, 예수의 발을 머리털로 닦는 여인의 모습을 그곳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지금의 문화적 판단 기준으로 보아도 너무나 부적절한 행동이 당시 현장에 모인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안 그래도 예수께 트집을 잡으려던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 사건은 말거리가 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여인의 눈물과 입맞춤을 ‘환대’로, 향유를 ‘예배’로 받으셨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잠재우신다.
이렇게 여인의 부적절한 표현을 자신을 향한 환대의 예배로 받으신 예수께서는 오늘날 자신의 예배만 성경적이고 다른 이들의 예배는 혼합주의라고 정죄하는 섣부른 판단에 과연 무어라고 말씀하실까? 예수께서 지금 우리 타운에 오신다면 아프리카 교회의 춤을, 카렌 교회의 길고 긴 대표 기도를, 아랍 교회의 푸짐한 만찬을, 전통 교회들의 예전을, 한인 교회의 통성 기도와 새 신자 환영 시간을 좋아하시지 않을까?
모든 예배는 성경적이며 동시에 그 시대와 그 지역의 문화적 옷을 입고 있다. 혹시 불편함을 느끼더라도 판단을 유보하고, 배우려는 자세와 열린 마음으로 내게 익숙하지 않은 예배에 임하면 어떨까? 어쩌면 그곳에서 “나는 이들의 예배가 좋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의 음성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김재우 - 기꺼이 불편한 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