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자산어보'는 정약전(1758-1816)이 흑산도 귀양살이 중에 쓴 『자산어보』(玆山魚譜, 1814)를 소재로 하고 있다. 정약전은 다산 정약용의 둘째 형이다. 『자산어보』는 정약전이 1801년 귀양을 가서 죽을 때까지 살았던 흑산도의 바다 어류와 해산물을 관찰해 정리한 어류 연구서다.
성 교수는 "(정약전이)귀양을 갔다고는 해도 당시 양반 신분의 선비가 사람들이 하찮게 여겼던 물고기를 관찰하여 책을 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며 "제1권 "비늘이 있는 어류" 편은 민어와 조기로 시작하고, 제2권 "비늘이 없는 어류" 편은 오늘날에도 흑산도가 자랑하는 홍어로 시작한다"고 했다. 아래와 같다.
"(홍어는)암컷은 크고 수컷은 작다. 몸통은 연잎과 비슷하게 생겼고 색깔은 적흑색이다. 연한 코는 머리가 있는 위치에 있는데 몸에 붙어 있는 부분은 두툼하고 끝부분은 뾰족하다. 입은 연한 코 바닥 부분에 있는데 가슴과 배 사이에 곧은 모양으로 나 있다....혹 암컷이 낚시 바늘을 물고 엎드리면 수컷이 다가가 교미하기도 해서, 낚시 바늘을 들어 올리면 함께 따라서 올라온다. 암컷은 먹는 것 때문에 죽고 수컷은 음탕함 때문에 죽는 것이니 색욕을 탐하는 자들에게 경계가 될 만하다....동지 이후에 처음 잡기는 하지만 입춘을 전후로 해서 살지고 커져서 맛이 좋다. 3~4월이 되면 몸통이 야위어져 맛이 떨어진다. 회, 구이, 국, 포로 먹기에 적당하다. 나주 인근 고을 사람들은 삭힌 것을 먹기 좋아하니 사람마다 기호가 같지 않다."
정약전은 홍어를 해부한 내용도 덧붙였다. 성 교수는 "이 책은 정약전이 창대(장덕순)라는 어부와 함께 관찰하고 연구한 내용에 더해 정약용의 제자인 이청이 『본초강목』 등 문헌들을 조사하여 이 관찰의 근거와 설명을 덧붙여 과학서로 손색이 없도록 했다"며 "처음에는 서양의 과학 서적처럼 그림을 넣어 어류도감을 만들려고 구상했으나, 동생 정약용의 "문자가 단청보다 낫다"는 조언에 따라 그림 대신 글로만 설명한다"고 했다.
성 교수는 이어 "이 책을 읽으면 후대에 나온 파브르(1823-1915)의 『곤충기』(1879-1907)와 비슷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파브르의 관찰은 널리 알려져 풍성한 과학적 결실로 이어졌고, 정약전의 관찰은 더 이어지지 못하고 잊혀져버렸다는 차이가 있다. 조선 후기 우리나라에 소개된 서양 과학이나 우리나라 학자에 의해 연구된 과학은 다 이런 처지가 된다"고 했다.
성 교수는 그러면서 "이 책이나 이 책을 기반으로 한 영화는 다 우리나라에 전해진 초기 로마 가톨릭(서학, 西學)이 그 배경에 있다. 1801년 300여 명이 참수된 신유박해 때 정약전의 동생 정약종과 매형 이승훈의 참수와 연이어 일어난 형 정약현의 사위 황사영의 백서 사건이 영화에 등장한다"며 "이로 인해 풍비박산이 난 집안에서 살아남은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는 서학을 신앙으로 받는 것에서는 배교하였으나, 남은 평생 학문과 실용적 가치로는 인정받는 삶을 살았다. 정약전은 이 서학을 통해 배운 과학적 방법으로 탐구하여 백성의 삶에 유익을 주려는 정신으로 『자산어보』라는 이 책을 쓴 것이다"라고 했다.
성 교수에 따르면 조선 후기 중국을 통해 서양과 접촉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로 로마 가톨릭 예수회 선교사들이 쓰거나 번역한 서적을 통해 서양 과학을 처음 접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에게 있어 실용성이 강한 서양의 과학은 큰 호기심의 대상이었단다.
특히 성 교수는 "천문학의 경우 김석문, 홍대용, 박지원 등 조선 후기 학자들의 글에 땅이 둥글다는 '지구'(地球) 개념과 땅이 돈다는 '지전'(地轉, 지구가 회전한다) 개념이 등장한다. 홍대용은 1765년 사신 일행을 따라가 북경에서 머무르는 동안 천주당에 여러 번 방문하는데, 그 이유는 선교사들이 가진 과학에 대한 지식 때문이었다. 그때 듣고 자신이 연구한 과학이 『의산문답』(1766)이라는 책으로 남아 있다"고 했다. 아래와 같은 기록도 인용했다.
"달이 해를 가릴 때에 일식이 되는데, 가려진 모습이 반드시 둥근 것은 달의 모습이 둥글기 때문이다. 또한 땅이 달을 가릴 때에 월식이 되는데, 가려진 모습이 또한 둥근 것은 땅의 모습이 둥글기 때문이다. 그러니 월식은 온 땅의 거울이라 할 수 있다. 월식을 보고도 땅이 둥글다는 것을 모른다면, 이것은 거울로 자기 얼굴을 비추면서도 자기 얼굴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어찌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느냐?...무릇 땅덩이는 하루에 스스로 한 바퀴를 도는데, 땅 둘레는 9만 리(약 4만 km)이고 하루는 12시간(오늘날 시간으로 24시간)이다. 9만 리 넓은 둘레의 땅이 12시간에 도는데, 그 속도는 번개나 포탄보다도 더 빠른 셈이다. 땅이 이처럼 빠르게 돌기 때문에 허공의 기가 격하게 부딪히면서 허공에서 쌓여서 땅에 모이게 된다. 이리하여 상하의 세력이 생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지면의 세력 즉, 땅이 끌어당기는 힘이다. 따라서 땅에서 멀어지게 되면 끌어당기는 힘도 없게 되는 것이다."
성 교수는 "그런데 로마 가톨릭 교리로 철저히 무장한 예수회가 전하여준 서양 과학은 주로 로마 가톨릭이 인정한 중세 과학이었다. 그것도 과학 자체보다 포교를 위한 목적이었다. 예를 들어, 천문 서적의 경우 교황이 1617년 금서로 지정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인 태양중심설(지동설)이 아닌, 지구중심설(천동설)과 티코 브라헤가 일부 수정한,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돌고, 태양 주위로 행성들이 돈다는 수정 천동설 이론을 소개했다"고 했다.
이어 "홍대용이나 박지원 등 당시 우리 학자들이 듣고 논한 천문 이론도 이것이었다. 1767년에 와서야 비로소 예수회 선교사 브누아의 『지구도설』 등에 의해 코페르니쿠스 이론이 처음으로 중국에 소개된다. 이는 교황청이 1758년 태양중심설 관련 서적들을 금서 목록에서 제외한 시기와 일치한다. 이 『지구도설』이 언제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아무튼 우리나라에서 태양중심설은 1850년 이후 최한기에 의해 처음 주장되었는데, 시기적으로는 개신교나 제국주의의 강력한 외부 세력이 동양에 밀려들어 오고 난 이후였다. 이는 중국에 본격적으로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와 서양 근대 과학을 소개한 것이 19세기 중엽인 사실과 연관된다. 1867년까지 중국에서 개신교 선교사들이 새롭게 소개한 과학서가 48종이었다고 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서양의 과학이 우리나라까지 소개되는 데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영향이 컸다. 16세기 반동종교개혁으로 예수회가 해외 선교에 적극 나선 일이 우리나라가 서양의 과학을 처음 접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과학혁명에 의한 근대 과학을 본격적으로 접하는 것은 개신교가 전파되는 한참 후에나 가능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를 통해 소개된 과학이 다 우리나라에서는 결실을 보거나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되고 만다. 영화 <자산어보>는 그 시대를 산 한 외로운 학자의 삶을 흑백으로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고 덧붙였다.